397화 요정 클럽
지글지글 끓는 용암 구덩이. 유황 냄새나는 연기.
오랜만에 몸이나 지져 볼까 하고 들어왔건만 선객이 있었다.
순간 멤버들 중 한 명이 아닐까 했지만.
“누, 누구?”
“그쪽이야말로 누군데요?”
눈앞의 사람은 멤버가 아니었다. 아니, 정상인이 아니었다.
목욕하러 들어온 나와 달리 갑옷 그대로 용암에 몸을 담그고 있는 사람.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여자 같은데…….
‘이상한 사람이다. 갑옷을 입고 용암에 들어오다니.’
슬며시 몸을 가리며 뒤로 물러섰다.
경계 어린 눈으로 상대방을 노려보자 상대방도 날 위아래로 훑는다.
“뭐예요, 그 눈빛은.”
“아, 아뇨. 하던 일 마저 하세요. 실례했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랑 마주치면 일단 사과부터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
주섬주섬 인벤토리에서 펠라인 세트를 주워 입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옷은 용암에서 버틸 수가 없어서 이미 다 타 버렸다.
풀 플레이트 아머와 무지개 갑옷이 단란하게 용암에 들어가 있는 민망한 광경.
괜히 부끄러워 투구까지 쓴 채 웅덩이를 빠져나왔다.
“거기, 잠깐 멈춰 봐요.”
“저, 저요?”
“여기 그쪽 말고 아무도 없잖아요.”
눈알을 굴리다 어깨에 올라타 있는 덕춘이를 내밀었다.
잠깐 정적.
그치? 널 부른 건 아닌 거 같지?
“그에에.”
-까앙
덕춘이가 한심한 눈빛으로 내 투구를 때린다.
그걸 말이냐고 하는 모습.
이상한 사람이랑 엮이기 싫었으나 가만히 있는 것도 뭐해 당당히 나가기로 했다.
슬쩍 손을 뻗으며.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통성명을 했다. 주춤 뒤로 빠졌던 상대방도 손을 내밀며 악수를 한다.
“마그마 요정이라 불러 줘요. 요정 클럽 막내로 깜찍함이 맡고 있죠.”
“…오.”
과연 끔찍을 맡고 있는 사람인가. 요정 클럽은 또 뭐야. 내가 아는 요정이랑은 너무 다른데.
악수하지 말고 바로 도망칠걸.
떨떠름한 표정으로 권능을 사용해 그녀의 정보를 살폈다.
[엘로이즈 베흐나흐]
-최대 등반층 76층
-상위 헌터로 이루어진 클럽, 요정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S급 권능, 용암 인간 보유.
-칭호, 불바다 보유.
-칭호, 용암 바다의 선장 보유.
.
.
.
엘로이즈 베흐나흐라.
이게 본명이겠지. 마그마 요정이라더니 닉값 하네.
아무래도 권능 중심으로 성장한 스타일인 모양.
권능 종류에 따라 전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도 있으니까.
‘상위 헌터 클럽이라.’
눈길이 가는 정보는 이쪽.
상위층에도 헌터가 있는 건 당연했다. 당장 내가 아는 루키 그룹도 있고.
상위층 전에는 길드 단위로 부류가 나뉘었다면 상위층부터는 클럽에 따라 나뉘는 느낌.
엘로이스가 날 빤히 바라본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인가 했는데, 흠흠. 지금도 이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이상한 사람한테 이상하다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사람이죠? 커뮤니티에서 말이 많은 인물. 쁘찡 연합 소속이라고 아는데, 맞나요?”
나한테 호기심이 있다는 게 이거였나.
아무래도 커뮤니티로 내 인상착의가 알려진 모양. 사실 알려지고 말고 할 게 없다. 연합 사람들 떠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거니까.
반응을 보니 다행히 연합 사람은 아닌 거 같다.
다행이다. 아직 멤버들을 제외하면 연합 사람들한테 얼굴을 공개한 적이 없어서.
차라리 모르는 사람한테 얼굴이 들킨 게 낫지.
것보다 쁘찡 연합이라.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남의 입에서 들으면 꽤 부끄러운…….
아니지! 이제는 부끄럽지 않다. 난 정신 보호 만렙이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쁘찡 연합의 이블아이입니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크흠! 연합 소속이 맞아요.”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저절로 목소리가 작게 나온다.
그럼, 그렇고말고.
“그에에.”
쉿. 가만히 있어, 덕춘아.
멀뚱히 용암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뭐한지 엘로이즈도 웅덩이에서 빠져나왔다.
갑옷 틈새에서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이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나도 같은 처지라는 게 가슴 아플 뿐.
“언제까지 대기하나 했는데 드디어 위로 올라갈 수 있겠군요. 좋은 소식이에요. 올라온 건 그쪽뿐인가요?”
“더 있어요.”
“오오! 진짜요? 저도 보고 싶어요!”
목소리 톤이 올라간 엘로이즈가 기대감을 엿보인다.
탑이 폐쇄적이라 그런가, 사람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혼자 대기실에 있던 모양이고. 다르게 말하면…….
‘그동안 우리 말고 올라온 사람이 없나 본데.’
대기실을 떠날 수 있는 조건은 충분한 인원이 모이거나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때.
들떠 보이는 엘로이즈, 아니. 자칭 마그마 요정이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뭔데, 왜.
“사실 쁘찡 연합에도 관심이 있었거든요. 정확히는 쁘띠공듀한테요!”
“쿨럭! 크허헉!”
“괜찮아요?”
“아, 예. 잠깐 사레가 걸려서.”
쁘띠공듀한테 왜 관심이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있을 법도 하다. 뭐가 됐든 신규 세력 중에는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와서는 글로벌 연합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고, 사실상 대형 길드에 지배되던 탑의 구조가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시작은 한국. 이어 다른 나라도 대형 길드를 몰아내고 있다고 들었다.
비슷한 이유로 루키 그룹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상황이고.
요정 클럽 역시 같은 이유로 내게 관심을…….
“아니, 요정은 우리가 먼전데 자꾸 쁘띠공듀가 요정이라고 하잖아요! 연합에서!”
얼굴을 쓸어내렸다. 투구를 쓰고 있어 딱딱한 감촉만 들 뿐이었지만.
그딴 이유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단 말인가. 왜지, 왜 피곤하지?
“연합 소속이면 알 거 아니에요. 쁘띠공듀도 만나 봤을 거 같은데? 듣자 하니 연합 메인 멤버라면서요?”
내가 그 쁘띠공듀입니다.
“어떤 사람이에요? 다른 언니들이 말하길 루키 그룹도 관심 있어 보인다던데.”
“그냥 평범해요.”
“에이, 거짓말. 저도 공략 캡처 한 거 봤거든요? 누가 제정신으로 그런 공략을 써요.”
그러는 넌 왜 제정신으로 깜찍한 요정이라고 말하고 다니니?
맞다. 공략도 올려야 한다. 다시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여유가 없을 게 분명했기에 대기실에 있을 때 작업을 해야 한다.
밀린 메시지도 확인하고, 오랜만에 커뮤니티 보면서 시간도 보내고.
‘수상한 초대를 받는 자 칭호’ 때문인가 요정인지 뭔지 이상한 클럽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위로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마주칠 이들이니 미리 만나서 나쁠 건 없다만…….
-띠링
커뮤니티 알림이 떴다.
누군가하고 보니 멤버들. 대기실에 도착한 후 서로의 위치를 묻고 있던 모양.
나야 히든 스테이지에 있다 와서 좀 늦게 봤다.
멤버용 채팅방에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냥냥펀치]: 공듀우우우, 어디 있는 거냐고오오오.
[정수리 핥짝]: 어디서 또 이상한 짓 하고 있겠지.
[니머리 탈모]: 얘들아? 난 어디 있는지 안 궁금해?
[냥냥펀치]: ㅇㅈ. 분명 엉뚱한 곳에 굴러다닐 듯. 용암에 들어갔다던가.
[정수리 핥짝]: 에이, 용암에 왜 들어가 멍청이도 아니고.
[니머리 탈모]: 나 이쪽 기둥 같은 바위 3개 있는 곳에 있어!
냥펀 정답.
일단 합류부터 할까. 70층 마지막 시나리오가 남은 상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
대기실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상위 헌터를 마주쳤다. 시나리오 중에도 마주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더군다나…….
‘뭐가 됐든 클럽 소속이니까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올라오면서 등반가를 만난 적이 없으니 사실상 대부분의 상위 헌터는 77층 이상에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나도 답장을 달았다.
[쁘띠공듀]: 자칭 마그마 요정이라 말하는 사람 만났어욧!
[쁘띠공듀]: 용암 웅덩이 있는 곳인데 선인장 같은 바위 있는 곳이지용.
[냥냥펀치]: 자칭… 요정? 공듀… 드디어 자아가 분리된 거야? ㅠㅠ.
[정수리 핥짝]: 히든 가든에서 그 난리를 치더니 결국에는… 짜식, 힘내라!
[니머리 탈모]: 하하하하! 그래! 난 사실 선인장 바위가 있는 곳에 가고 싶었지! 다들 기다려!
내 위치는 대충 알렸고.
“멤버들 보고 싶다고 했죠? 곧 보게 될 거예요. 그전에 나도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 마그마 요정 씨?”
아, 왜 내가 대신 부끄럽지?
떫은 입맛에 작게 혀를 차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저도 좀 궁금해지네요. 요정이라는 클럽에 대해서요. 상위층 그룹에 대해서 잘 모르거든요.”
이번 기회에 알아보자.
얼마나 다양한 그룹이 있는지. 어디서 뭘 하는지.
가능하다면 다음 시나리오에 대한 단서도.
* * *
상위층 커뮤니티.
65층에 진입해서야 엿볼 수 있는 공간이었고, 70층에 올라서야 글을 쓸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상위층 헌터는 70층 미만 채널에서 글을 올릴 수 없었으니 중간 다리가 되는 사람이 없으면 서로 연락할 방법도 없는 구조.
그만큼 알려진 것도 적었으며 폐쇄적인 구조를 띠었다.
그러한 특성을 더 살리는 기능이 있었으니.
[비공개 채팅창- 요정 클럽에 입장합니다.]
남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초대된 인원들만 떠들 수 있는 채팅방을 개설할 수 있다는 것.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쁘띠공듀를 비롯한 멤버들 또한 개인 메시지 대신 비공개 채팅방을 애용했으니, 그보다 먼저 상위층에 올라온 이들은 이런 경향이 더 강했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서로에 대한 견제. 새롭게 상위층으로 진입한 이를 끌어들인 후 개인적인 지원과 정보를 건네주는 경우가 많았다.
소속 없이 활동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았지만 그들 또한 각 그룹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다.
[찌리리 요정]: 우리 막내 곧 올라올 거 같대!
[송곳 요정]: 진짜? 꺄아아악! 너무 잘됐다!
[찌리리 요정]: 언니, 막내 근데 지금 스텟이 몇이지? 80층 올라올 수 있는 거 맞아?
[송곳 요정]: 글쎄. 스텟도 문젠데 그쪽 좀 오래 고이지 않았나?
[찌리리 요정]: ㅇㅇ. 근육 요정이 최근에 올라온 사람 없대. 대부분 남아 있는 듯.
[송곳 요정]: 그쪽이 빡세긴 하지. 우리 막내 무사히 올라왔으면 좋겠다 ㅠㅠ.
저마다 막내가 무사히 올라오기를 바라는 요정 클럽 구성원들.
프랑스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한 가지 특징이 있었으니…….
[송곳 요정]: 이제 막내 빼면 다른 사람들도 없잖아. 흑흑…….
구성원 모두 탑에 올라오기 전부터 닉네임을 맞췄다는 것이었다.
대격변 이전부터 플레이하던 하드 로그라이크 게임 길드, 요정의 길드원들.
세상이 바뀌며 게임이 사라졌지만 이후에도 연락을 하던 이들이었고, 언젠가 탑에 올라가면 새롭게 길드를 만들자며 뭉친 이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같은 게임 길드였던 이들도 닉네임을 맞춰 올라왔지만 대부분 낙오되어 탑 밖으로 나간 상황이었다.
[찌리리 요정]: 음… 이렇게 된 거 그쪽에 도움 요청해 볼까? 그쪽도 막내 거기 있다 했는데.
[송곳 요정]: 어디? 아, 루키 그룹?
[찌리리 요정]: ㅇㅇ. 산군 소속 한 명도 70층 막바지라 했어.
[송곳 요정]: 걔네도 은근 많이 모이네. 이번에 상위층에 올라온 애도 산군이랑 영입 각이라더니.
[찌리리 요정]: 그쪽도 같이 올라오면 좋으니까 받아들이지 않을까?
[송곳 요정]: 언니, 언니. 내가 연락할게. 그래도 내가 안면식이 있잖아.
[찌리리 요정]: ok, 알았엉!
상위층의 두 그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