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화 76층 클리어
세계수와 연결되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느껴지는 존재감.
작지만 분명한 존재감을 가진 그것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체는 말할 것도 없이 눈의 정령.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난 알고 있다, 세계수와 눈의 정령은 같은 존재임을. 정확히 말하자면 눈의 정령 여왕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 더.
‘세계수는 환경이 나빠지면 씨앗으로 돌아갈 수 있어.’
탑에서 만났던 녀석도 같은 이유로 씨앗이 되어 내게 퀘스트를 주었으니까.
이후 세계수가 부활하면 새로운 눈의 정령 여왕이 탄생하겠지.
문제는 지금 세계수가 제정신이 아니기에 정령의 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데…….
[세계수의 고통을 함께합니다!]
-치지지지지짓!
“크하아아악!”
아찔한 통증이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 그동안 겪어 온 것들과는 종류가 다른 고통이었다.
단순히 아프다는 것을 떠나 나의 존재 자체에 타격을 주는 기분.
흐름을 벗어난 이에게 내려진 철퇴와 같았다.
정령의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일을 오랫동안 지속해 온 대가.
[피의 광기가 잠식해 옵니다.]
[부정한 환각이 머리를 지배합니다.]
[흔들리는 믿음이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
.
.
연속해서 떠오르는 페널티.
단순히 환각이나 광기라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거다.
에이션트 몬스터를 만났을 때도 그랬으니까. 그 전에 숭배자 골드 등급인 데이본드의 힘에 노출됐을 때도 마찬가지고.
그렇기에 짰던 계획이었건만…….
[존재 의의가 부정됩니다.]
[타락의 대가를 치릅니다.]
“끄그그그그극!”
이번 건 장난이 아니다.
누군가 정신을 붙잡고 마구잡이로 뒤흔드는 느낌.
혼이 나갈 것 같다는 말을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인가. 평행 감각이 사라져 내가 서 있는지 누워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시야가 뒤죽박죽으로 섞이고, 과거의 기억과 환상이 교묘하게 배치돼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
[정신 보호 (SSS) Lv.3]
[혼돈 수치가 일부 혼란을 삼킵니다.]
“허억! 헉!”
조금이지만 정신이 들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신경계가 맛이 갔는지 숨조차 제대로 쉬고 있지 않았다.
거품인지 침일지 모르는 것이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몇 초가 지난 건지 몇 시간이 지난 건지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막연한 불안감에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으나 악착같이 참았다.
‘이런 걸 견디고 있었다는 건가.’
수십 년, 어쩌면 그 이상을?
그동안 세계수를 비롯한 크리쳐, 괴목들은 어떤 짐을 짊어지고 있던 것인가.
애초에 정령은 밝고 순수한 존재. 차이는 있겠지만 자연에 동화되어 있는 영체에 가까웠으나…….
‘이곳에서는 그러지 못했지.’
괴목과 크리쳐에 빙의하고 적을 죽이고 피를 흡수했으니까.
초식 동물한테 고기를 먹이는 거나 마찬가지. 종족 정체성을 부정한 거다.
그 중심이 되는 게 세계수고.
원래라면 이러지 말아야 했다. 이런 환경이 되기 전에 스스로 씨앗이 되어 본인을 보호해야 했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당장 세계수가 사라지면 엘프와 드루이드가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던 거야.’
그래서 견딘 거다. 견디고 견뎌 결국에 무너질 때까지.
[비틀린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뿌드드득
-까드드드!
정신에 이어 몸까지 비틀리기 시작한다.
뼈와 근육이 제멋대로 돌아가며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진다.
펠라인 세트로는 막을 수 없는 내부의 변화. 신경을 찌르는 통증에 몸이 들썩거리고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진다.
부러진 뼈가 근육을 찢고 미쳐 제자리를 되찾기도 전에 자라나 몸이 괴상하게 부푼다.
신경과 인대, 피부, 관절이 순서를 생각하지 않고 생겨났다.
발작하며 몸부림쳐도 마찬가지.
빌어먹을 재생력이 나한테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증거.
[펠라인 세트를 해제합니다!]
날아갈 것 같은 정신을 붙잡으며 장비를 해제했다.
조여 오던 압박감이 사라지며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푸슈슈슈슉!
비틀려 짜진 다리에서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급속도로 자라난 치아에 기존에 있던 것들이 빠졌다. 숨통을 옥죄는 것을 씹어 삼켰다.
크리쳐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거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몸이 구겨지고 압축되어 사람을 닮은 그 무언가의 형상이 되어간다.
-야! 너… 찮아? 정신……!
-주, 죽는… 아!
-…냐고! 제대로… 아? 뭐라……!
희미하게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먹먹한 귓가로 흘러내리는 게 진물인지 피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몸을 웅크린 채 나 자신을 잃지 않도록 정신을 다잡는 게 고작.
스킬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나.
모르겠다. 확인할 겨를이 없다.
느껴지는 거라고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심장과 가늘지만 이어지고 있는 숨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알 수 있는 눈의 정령의 손길.
【함께 견딜 필요 없다. 이건 내 업보니라.】
하이누와는 다른 목소리였지만 분위기는 비슷하다.
입술을 깨물어 찢었다. 어차피 재생하는 몸. 정신을 차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뜯을 거다.
얼얼한 입을 비틀었다. 하도 몸이 괴상해져 입이 가로로 열리는지 세로로 열리는지 모르겠다.
“시끄, 러워. 그냥 도와준다, 할 때… 받아.”
붙잡을 수 있을 때 붙잡으라고.
패기롭게 말하기는 했지만 슬슬 한계인 게 느껴진다.
멀어지는 의식. 신체의 통제권도 거의 다 잃었다. 의지대로 몸이 움직이기도, 더 이상 말을 하는 것도 힘들다.
너무 자신만만했던 걸까.
내가 이러는 게 도움은 되고 있는 게 맞을까.
어둑해진 시야. 하얗게 빛나는 눈의 정령이 보였다.
이것은 환상인가 현실인가.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그래도 좀 커졌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던 눈의 정령의 모습이 보다 선명해지고 원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것.
만약 이대로 더 버틸 수 있다면 세계수를 정상화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거 같다만.
‘이제 더는…….’
미약하게나마 잡고 있던 정신마저 날아가려는 찰나.
-파하아아아앗!
강인한 생명력과 함께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엘프 장로, 메디가 스스로를 공물로 바칩니다.]
[눈의 정령의 아이가 눈의 정령에 회귀합니다.]
익숙한 기운.
‘메디……!’
메디의 생명력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함께 느껴진다.
-눈의 정령의 화관이면 세계수에 좋은 양분이 될 수 있어요.
-세계수는 눈의 정령이니까요. 비슷한 기운을 가진 거라면 도움이 되거든요.
처음 히든 가든에 넘어와 메디에게 화관을 건넸을 때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고.
【아아, 나의 아이야!】
-우우우우우우웅!
급속도로 존재감을 키운 눈의 정령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눈부신 광채.
비틀리고 엉켜 있던 모습이 풀리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갔고, 생명력으로 들어온 메디의 정신이 뒤섞였다.
알 수는 없으나 아름답다고 생각한 그 순간.
[눈의 정령과 메디가 결합됩니다.]
[하이 엘프의 탄생!]
-콰아아아아아앙!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빛으로 휩싸였고.
[76층 클리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세계가 멀어졌다.
* * *
서서히 암전되는 공간.
몸의 감각이 돌아오며 황폐해졌던 정신도 선명해졌다.
“아.”
끝났구나.
덜덜 떨리는 몸을 내려다봤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비틀렸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 있었다.
육체는 돌아왔으나 경험의 여파는 남아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반쯤 쓰러지듯 소파에 앉았다.
영화관처럼 어두컴컴한 곳 홀로 움직이는 화면.
“메디.”
한계까지 부딪치던 순간 스스로를 공물로 마쳤다.
마지막에 봤던 메시지.
하이 엘프의 탄생.
그러고 보니 히든 가든에 있는 동안 하이 엘프를 본 적이 없었다.
릴카가 70층 너머에서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이지.
“그에에.”
“아, 땡큐.”
옆에 다가와 핥짝거리는 덕춘이와 함께 화면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턱이라도 긁어 주고 싶은데 지금은 그럴 힘이 없다.
바들거리면서도 입꼬리를 올렸다.
“됐구나.”
비틀렸던 세계수가 정상화되면서 사라지더니 한 여인이 되어 돌아왔다.
눈의 정령과 엘프의 융합, 하이 엘프.
그녀의 손에는 세계수의 씨앗이 들려 있었다.
-촤르르르르르
빠르게 흘러가는 화면.
세계수가 사라지며 괴목과 크리쳐가 힘을 잃었으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못했고, 하나의 마물이 되어 숲을 돌아다닌다.
어떤 객체는 숲을 벗어나 밖으로 향했으며, 다른 객체는 숲에 남아 있는 엘프들을 공격했다.
놈들의 공세를 막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촤르르르르르
계속해서 이어지는 화면이 천천히 하늘로 초점을 옮긴다.
흑백으로 희미해지는 화면 속.
[멸망화 지수- 94/100]
조금이지만 낮아진 멸망화 지수가 보였다.
그걸로 영상은 끝.
[챕터Ⅲ- 버린 자와 버림받은…….]
[변화 감지!]
[내용이 변경되었습니다!]
[하이 엘프의 탄생!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챕터 제목이 변경됩니다.]
[챕터Ⅲ- 하이 엘프 클리어!]
명쾌한 효과음과 함께 어두웠던 공간에 조명이 들어왔다.
[놀라운 업적!]
[혼돈 수치 +14점]
[멸망에서 한 발 멀어진 세계에 찬사를!]
[시나리오, 피로 물든 세계수가 종료됩니다.]
이번 시나리오도 끝났다.
제2 천계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후유증은 더 큰 기분.
막바지에 무리해서 그런가. 진짜 이번에는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뭐…….
“기분이 나쁘지는 않네.”
가능성을 엿봤다.
멸망에 접어들고 있는 곳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멸망을 비껴갈 수 있다.
99점까지 올랐던 멸망화 지수가 94점까지 줄어든 것만 봐도 그렇다.
[멸망한 세계의 세계수가 당신에게 선물을 건넵니다.]
“오.”
보상도 준다. 저번에 제2 천계의 의지가 보상을 줬던 거랑 비슷한 건가.
그때는 기본 보상도 줬었는데. 하기야 그때는 뭐, 각 층대의 1층 보상 겸해서 준 거 같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을 붙잡았다. 뭘 줬으려나.
잠깐만…….
“이 씨, 생각해 보니 이번에도 세계수 선물 제대로 못 받았네.”
세계수 부활 퀘스트 때도 퀘스트 보상으로 퉁치더니만 이번에도.
됐다. 상황이 그랬으니까. 나름 부수적으로 얻은 것도 있고.
[정신 보호 (SSS) Lv.10]
확실히 힘들긴 했나 보다. 레벨3에서 10까지 다이렉트로 오른 걸 보니.
나야 땡큐지만.
이건 이거고 보상이나 살피자.
머리를 긁적이며 손에 잡힌 물건을 확인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반지.
안쪽에 글씨가 적혀 있다.
-에르마&메디
에르마와 메디라.
세계수였던 정령의 이름이 에르마인 모양이다.
어디 보자, 옵션이…….
“워우.”
[세계수 반지 (SS)]
-세계수와 하이 엘프가 함께 만든 반지.
-넘쳐나는 생명력!
-일대에 숲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풍족한 수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정령과 엘프, 드루이드의 친화도가 상승합니다.
-모든 식물이 우호적으로 다가옵니다.
.
.
.
SS급 아이템.
전투적인 효과는 없지만 뭐랄까.
“농사지을 때 쓰면 좋겠네.”
척박한 곳을 살리거나 과일이나 곡식을 수확할 때는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 같다.
그 외에 옵션들도 여럿 있고. 식물이 우호적으로 다가온다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받을 건 다 받은 거 같은데.
“왜 아직도 전송 대기실이지?”
시나리오가 끝나면 다음 시나리오 대기실로 이동했던 거 같은데.
의문이 생기는 것도 잠시.
[당신에게 우호적인 집단이 있습니다.]
[히든 스테이지, 히든 가든이 열립니다.]
아무래도 받을 게 더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