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세계수에 닿다
메디의 외침에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의 말마따나 세계수가 보였다.
내 기억 속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 거대한 크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저렇게 변했을 줄이야.’
우뚝 솟았어야 할 기둥은 이리저리 꼬인 채 구부러졌으며, 단단하지만 따뜻한 느낌이었던 껍질은 음침하게 죽어 있었다.
피를 머금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짙은 혈향이 느껴졌고 색마저 붉게 물들었으니…….
“아, 이 무슨 끔찍한……!”
엘프인 메디에게는 꽤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세상에 있는 저주란 저주는 모두 받은 것 같은 불길함이 가득했지.
주변을 가득 메운 괴목들과 함께 있으니 한층 더 위험해 보였다.
‘저렇게 비틀렸으니 위에서 못 찾았지.’
작게 혀를 찼다.
맨 처음 세계수로 향하려 할 때만 하더라도 하늘을 통해 가려 했다.
상공은 숲의 영역이 아닌 만큼 엘프의 길 안내를 받을 수는 없겠지만 거대한 세계수의 특성상 위에서 본다면 위치를 특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정작 괴목들의 방해를 뚫고 위로 올라가 봤자 보이는 거라고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숲뿐이었다.
비틀어진 세계숲은 괴목 사이에 숨어 있었고.
그보다.
-카아아아악!
“놈들이 거칠어졌는데?”
“공블아이! 얘네 한 방에 안 죽어! 치사해!”
중심부에 접어든 만큼 놈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육체적으로도 더 강인했으나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공격을 해 왔고, 질긴 몸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괴목 역시 마찬가지. 몇몇 객체는 주술까지 사용했다.
달라붙는 놈들에게 냥펀이 비명을 질렀고, 핥짝이는 빽빽하게 들어찬 놈들 때문에 압축 구슬을 사용하기 껄끄러워하고 있었다.
탈모맨 역시 보이는 것마다 때려 부수고 있었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량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안으로 파고들어야 해.’
촤악! 거대한 몸집으로 날 깔아뭉개려는 크리쳐의 배를 갈랐다.
피가 튀어 오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쏟아져 내린다.
[독 내성(S) Lv.10]
썩은 피에 독까지 섞여 있는 액체. 고약한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도마뱀 형태의 크리쳐가 빠르게 몸을 틀더니 꼬리를 휘둘렀고.
-빠가가가각!
주변의 괴목까지 부수며 날 덮쳤다.
[중량 팔찌(C)]
[강철의 의지(S) Lv.10]
[강체强體(S) Lv.10]
[물리 공격 내성(S) Lv.10]
마력을 한껏 불어 넣어 무게를 늘리는 동시에 방어 스킬을 활성화했다.
땅에 다리가 파고든다. 갑옷이 눌리는 감촉에 공격받은 팔이 부러질 듯 아프다.
막강한 물리력은 어지간한 스킬보다 강력한 법.
[검강]
-서걱
절삭만으로는 꼬리를 자를 수 없어 검강을 섞어 내질렀다.
쇳덩이도 반으로 갈라 버리는 게 검강일 터인데.
“확실히 질겨졌군.”
너덜너덜해졌을지언정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끝부분에서는 거의 뜯다시피 했을 정도. 말도 안 되는 재생력으로 잘리는 순간에도 꼬리를 이어 붙였다.
-툭
-콰가가가각!
제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꼬리가 망가졌다고 판단했는지 놈이 망설임 없이 꼬리를 자른다.
의지를 가졌는지 꿈틀거리며 사방을 헤집는 꼬리.
그사이 새로운 꼬리가 자라나는 건 덤이었고.
-파아아앗!
땅속에서 솟아난 괴목의 뿌리가 그물처럼 덮쳐 왔다.
지체 없이 파이어 밤.
붉은 홍염이 뿌리를 불살랐으나 숯이 되어 타들어 감에도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재생력은 괴목에게도 적용되는지 새살이 돋듯 섬유질의 외피가 상처를 뒤덮는다.
[오로라 빔(S) Lv.10]
정면으로 빔을 쐈다. 한쪽에 화력을 집중해 뿌리 자체를 날려 버려 틈을 만들고 슬라이딩.
콰가가가강!
간발의 차로 뿌리 그물을 벗어날 수 있었다.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창처럼 뻗어 오는 나뭇가지.
압축된 스프링이 튕기듯 찔러 오는 공격을 피해 어스 월과 프로즌 브레이크를 사용했고.
“크라라라라락!”
벽이 생기지 않은 위치에서 또 다른 크리쳐가 아가리를 벌렸다.
사람 팔뚝만 한 사이즈의 송곳니가 빼곡한 괴물. 거대한 터널이 다가오는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다.
“한시도 가만히 안 놔두는구나!”
-치지지직
손에 마력을 뿜어냈다.
허공에 생성된 시커먼 창.
[데몬 스피어(S) Lv.10]
활처럼 몸을 젖혔다가 체중을 실어 창을 날려 보냈다.
파괴적인 힘으로 크리쳐의 아가리를 찢어발기며 머리를 꿰뚫었으니.
-쿠우우웅
그대로 절명하여 앞으로 고꾸라졌다.
크리쳐라고 해도 바탕이 되는 건 생명체. 언데드나 골렘이 아닌 이상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
문제는 이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괴목이 저주를 겁니다.]
[괴목이 흑마법을 사용합니다.]
괴목들의 디버프가 쏟아진다.
권능을 통해 들어오는 저주와 마법의 종류만 수십 가지.
[정신 보호(SSS) Lv.3]
[저주 내성(S) Lv.10]
[마법 무효화(S) Lv.10]
[마법 무효화에 성공합니다!]
[마법 무효화에 실패합니다!]
보호 스킬의 성공과 실패 알림이 정신없이 떠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 공격에는 강한 저항력을 가진 상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해!”
이를 악물며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좌측으로 덤벼드는 크리쳐를 파이어 밤으로 견제.
이어 저주를 뿌려 대는 괴목 앞으로 검을 휘둘렀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발휘됩니다!]
[검강]
[절삭(S) Lv.10]
[홍예참(SS)]
파아아앗!
펠라인 세트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검격을 따라 잔상처럼 따라오는 무지개의 물결.
-쩌저저저적!
아무리 세계수의 가호를 받아 강해진 괴목이라 한들 권능과 스킬로 점철된 일격을 버틸 수는 없었다.
바스러지듯 터져 나가는 괴목. 허공에 흩뿌려지는 뿌리와 가지.
홍예참이 유지되는 동안 최대한 길을 뚫어야 한다.
“공블아이, 할 수 있는 거 맞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 가능성이 있을 뿐이지.”
“없는 것보다는 낫지. 얘들아! 길 뚫어!”
옆에 다가온 핥짝이가 소리쳤다.
세계수를 상대로 계획이 있는 건 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세계수로 보내야 한다는 판단이었고.
“몰라! 알아서 살아나가! 일단 터트린닷!”
핥짝이의 외침에 반응한 냥펀이 칭호 효과를 사용했다.
번쩍이는 황금빛과 함께 생성된 마법진.
[칭호, 화조국의 황금마차가 빛납니다!]
[골드 익스플로젼(S) Lv.10]
[칭호, 돈지랄이 함께합니다!]
마법진을 통해 아티팩트가 쏟아져 나왔고.
[다이넬의 다이얼(AAA)]
-조정된 시간에 맞춰 폭발합니다!
[슬픈 늪의 씨앗(B)]
-일대를 저주 걸린 늪으로 변화시킵니다.
[데몬 아이(S)]
-악마의 눈동자라 불리는 보석.
-조건이 맞으면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합니다.
.
.
.
냥펀이 황금 망토로 몸을 감싸며 웅크리는 타이밍.
-우우우우우웅
-쿠과아아아아아앙!
아티팩트가 작동하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온갖 효과와 폭발이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이대를 집어삼킨다.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공격의 영역에 있는 상태.
“으아아!”
“죽겠네, 진짜!”
멤버들과 메디 역시 알아서 스스로를 보호했다.
충격의 여파에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으나 어떻게든 버티는 데 성공.
방비할 틈 없이 밀도 있게 모여 있던 괴목과 크리쳐는 그대로 냥펀의 공격을 받았다.
재생할 틈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폭발과 디버프에 파편이 되어 날아가는 놈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우리를 중심으로 거대한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고.
“지금이야! 가!”
냥펀이 외쳤다.
한 번에 많은 힘을 써 상태가 좋지는 못했지만 시간만 지나면 회복할 터.
지체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고 그런 나를 막기 위해 다른 놈들이 꾸물거리며 몰려왔다.
“왼쪽은 내가 맡는다, 탈모야!”
“그럼 내가 오른… 탈모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좌우로 나뉘는 핥짝이와 탈모맨.
아까는 거리가 나오지 않아 압축 구슬을 쓰지 못한 핥짝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냥펀 덕에 공간이 생겼으며 공격 범위에 노출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파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구슬.
뿌리를 뱀처럼 뻗어 다가오던 괴목 사이에 구슬이 들어갔고.
[해제(S) Lv.10]
-콰아아아아앙!
팽창과 동시에 폭발.
구슬은 하나가 아니다. 그동안 모아 둔 구슬을 전부 써 버릴 요량인지 무차별적으로 스파이크를 날려 버린다.
우측에서는 탈모맨이 크리쳐과 사투를 벌이는 중.
[칭호, 초인의 길이 함께합니다!]
[칭호, 마왕의 가호가 깃듭니다!]
[SS급 권능, 두 세계의 지배자가 빛납니다!]
몸에 두른 마기와 신성력.
상반되는 기운의 반발력만큼이나 파괴적인 공세는 패도적이었다.
핥짝이와 탈모맨이 양옆을 막아 줬으니 정면에 있는 놈들은.
[아스트랄 레인보우(S)]
-10초간 모든 공격 스킬 데미지 1,000퍼센트 증가.
-10초 후 공격에 사용된 스킬 데미지 10퍼센트로 하락. (1시간 동안 유지)
-하루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뚫는다.
파지지직!
펠라인 세트가 각기 다른 색을 내뿜는다.
끓어오른 능력치.
앞을 향해 달렸다. 이어 안개 질주로 가속.
안개화되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놈들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를 잡기 위해 팔과 가지를 휘둘렀으나 안개화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무적.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고.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망자귀환(S) Lv.10]
모두의 중심 속.
[되갚기(S) Lv.10]
[파이어 밤(S) Lv.10]
[일렉트릭 쇼크(S) Lv.7]
.
.
.
-궁. 궁. 궁. 궁.
-콰르르르르르릉!
전 범위 스킬을 터트렸다.
버프를 둘러 한층 더 강력해진 스킬은 70층대를 초월하는 파괴력을 지닌다.
나를 기점으로 퍼져나가는 파괴의 흐름.
그동안 쌓인 대미지가 증폭되어 놈들을 집어삼켰고 붉은 홍염이 세계를 물들였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괴목과 불똥이 되어 하늘로 치솟는 크리쳐.
뇌전이 퍼지며 비명과 울부짖음은 천둥과 하나 되어 진동한다.
이어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의 폭음에 이명이 머리를 울렸으니.
-사아아아아
세상의 빛이 되돌아오고, 사라졌던 소리가 귀에 들렸을 때.
“뚫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홀로 고고히 서 있는 세계수.
그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지개다리(S)]
-촤아아아아악!
고속으로 전진. 세계수를 향해 나아갔다.
한 번에 전력을 쏟은 탓인가 몸이 발작하며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버텨야 한다.
[아스트랄 레인보우(S)가 종료됩니다.]
[사용된 스킬이 일시적으로 능력치가 하향됩니다.]
이미 쓸 만한 패는 거의 다 써 버린 상황.
입술을 씹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세계수까지 남은 거리, 고작해야 10미터.
난 그곳을 향해 뛰었고.
“드디어 만났네.”
세계수에 닿을 수 있었다.
거칠게 일어난 껍질. 알 수 없는 진액은 피를 닮았으며, 생기 넘쳐야 할 가지는 말라 비틀어져 있다.
쪼그라든 이파리. 굽어 버린 기둥.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미약한 두근거림.
[칭호, 정령의 친구가 빛납니다!]
[세계수, 눈의 정령 여왕이 익숙한 향기에 반응합니다.]
[눈의 정령 여왕, 세실리아가 미약하게 손을 흔듭니다.]
다행이다. 아직 완전히 자아를 잃지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차원상인 자격으로 구매한 마일리지 상품.
비교적 정신 공격에 약한 멤버들이 당했을 때 도움이 될까 싶어 구매했던 아이템.
[함께 감내하는 자]
-대상의 모든 디버프를 공유합니다.
-대상의 모든 디버프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동의해야 합니다.
“지금부터는 같이 견디는 거야.”
망설임 없이 아이템을 사용했다.
엄청난 두통과 함께 뭔가가 느껴졌다.
희미하지만 생동감 있는 존재의 흔적.
그건 분명 눈의 정령의 기운이었고.
[세계수가 당신에게 우호적입니다!]
[세계수와 연결됩니다!]
[당신은 세계수의 고통을 함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콰지지지지짓!
“크하아아아아악!”
밀려드는 격통에 비명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