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93화 (393/740)

393화 피로 물든 세계수

숲으로 진입하자 끈적한 공기가 몸에 달라붙는다.

환경 자체가 바뀌어 버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적대적인 기운이 가득했으며 괴상하게 자라난 식물들이 발목을 잡았다.

거대한 생물이 되어 우리를 주시하는 기분.

게다가.

-그르르르르

뿌리를 다리 삼아 이동하는 식물 때문에 지형이 수시로 바뀌었다.

이 정도면 움직이는 미로나 마찬가지. 일반인 아니, 숲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라도 길을 찾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었으나.

“왼쪽으로 돌아가죠. 우측에 크리쳐가 있는 것 같아요.”

“동의하네. 그들의 기운이 느껴지는군.”

엘프 장로인 메디는 이곳에서도 정확히 길을 찾아내고 있었다.

종족 특성인지 아니면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탐색 능력도 수준급이라 피할 수 있는 위협은 피해 가고 있다. 크리쳐와 괴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파르갈 장로 또한 조언을 해 주고 있고.

아직까지는 순탄하다, 순탄하기는 한데.

“세계수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어요. 이전에 있던 루트는 전부 사라졌으니까요.”

“최대한 서두르는 수밖에 없다는 거군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만큼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비단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계수가 언제까지 이성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단 말이지.’

세계수에게 남은 시간도 고려해야 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은밀히 이동하던 그때.

“크하아아앙!”

“크리쳐입니다!”

영악하게 흙바닥에 숨어 있던 크리쳐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복에 기습까지. 어째서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가 당했는지 알 만하다.

-서걱!

메디가 검을 내지른다. 더 이상 정령을 쓸 수는 없었지만 그녀 역시 한때는 기동 타격대원으로 활동했었다고 했다.

피지컬 자체도 뛰어난 편인 만큼 꽤나 날카로운 일격이었고.

“마무리하죠.”

-촤아아악!

나 역시 앞으로 달려들어 놈의 목을 그었다.

매끄럽게 들어간 검. 내부에 뭉쳐진 근육과 이물질의 저항감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하늘로 치솟은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손끝에 남은 감각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세계수에 가까워질수록 크리쳐가 강력해지고 있다. 단번에 목을 가르기는 했지만 다음에 만날 녀석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다.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강한 놈이 중앙에 몰려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해방된 정령이 기뻐합니다.]

[정령과의 친화도가 상승합니다.]

이번에도 같은 메시지. 입술을 다물며 시선을 돌렸다.

가능한 마찰 없이 세계수로 향하려 했던 만큼 파이어 밤은 사용하지 않았다. 굉음에 크리쳐와 괴목이 몰려들 테니까.

물론 전투를 시작한 시점에서 완전히 놈들의 눈을 속일 수는 없겠지만.

“피 냄새가 퍼질 겁니다. 속도를 더 올려야겠어요.”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는 크리쳐의 사체를 뒤로한 채 앞으로 달렸다.

-우우우우우!

-그르르르륵!

벌써 냄새를 맡은 건가. 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람도 불지 않건만 저절로 흔들리는 나뭇가지. 수시로 바뀌는 지형, 불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크리쳐의 울음.

어디까지 왔을까. 현재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는 답답함이 밀려왔으나.

“세계수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어요. 그렇게 멀지 않았을 거예요.”

“장로님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느껴져요.”

“지금까지 왔던 거리보다 짧아요.”

엘프들의 감각에 의하면 그리 멀지도 않은 모양.

새벽부터 지금까지 강행군을 이어 오고 있다. 가뜩이나 넓은 숲을 괴물들을 피해 이동하고 있었으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무리하면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다는 거군요!”

-콰앙!

괴목이 휘두른 가지를 몸통 박치기로 밀어낸 탈모맨이 외쳤다.

변형되어 나뭇가지가 거대한 망치처럼 바뀐 괴목.

-촤르르르륵!

이어 채찍과도 같은 뿌리가 솟아올라 우리를 붙잡으려 한다.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뿌리를 쳐 내는 동시에 발목을 묶으려는 것을 피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는 까다로움.

시야가 좁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당할 게 뻔했으나.

“멈추어라!”

쿵!

파르갈 장로의 주술에 날뛰던 뿌리가 일시적으로 굳었다.

경직된 뿌리는 자르기 좋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 법.

쾌속으로 휘두른 검에 수십 조각이 되어 날아갔고.

“특제 잡초제거제! 나무까지 죽는닷!”

“…그 정도면 불량품 아니야?”

“나도 몰랑!”

-치이이이익!

냥펀은 어디서 산 건지 모를 거대 스프레이를 사방에 뿌렸다.

사람한테는 무해한 거 같다만 식물에게는 치명적이었고.

“그그그극!”

괴목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화상을 입은 듯 말려 들어가는 뿌리. 이때다 싶은 걸까.

“올가미를 챙겨 오길 잘했네.”

핥짝이가 괴목의 기둥에 올가미를 걸었고 그대로 압축.

-꾸드드득

-콰직!

기둥째로 끊어 버렸다.

사람 서너 명이 둘러싸아야 안을 정도의 두께건만 압축에는 버틸 수 없는 모양.

부러진 이후에도 발악하듯 나뭇가지와 뿌리를 휘둘렀지만 이미 우리는 자리를 빠져나온 이후였다.

“이런, 위치가 발각됐어요.”

감각을 끌어올린 메디의 경고.

아무래도 이번 전투에서 놈들의 시선을 끈 거 같다.

중앙에 가까워지며 크리쳐와 괴목의 밀집도가 올라가서 그런 듯한데.

“이렇게 된 이상 강행 돌파를 해야 할 거 같네요.”

“동의하네. 메디, 할 수 있겠나?”

“해야 한다면 해야겠죠.”

지금까지 별다른 전투 없이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다.

마력은 충분했고, 이 정도 행군으로 체력이 떨어질 만큼 만만한 사람들도 아니다.

“휘카, 미피. 저랑 같이 선두에 서죠.”

“알겠습니다.”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갈 수 있는 방향으로 가면 되겠죠.”

세계숲을 보다 확실히 느낄 수 있고, 기동력이 좋은 엘프들이 선두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적들과 마주치는 걸 고려하지 않는 최단 코스.

여태까지 이동했던 속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드루이드의 저력을 보이거라!”

“알겠습니다!”

“엘프를 보호해!”

그들이 방해받지 않도록 파르갈을 포함한 드루이드 전사들이 몸으로 적들을 막았다.

특유의 강인함으로 크리쳐와 육탄전을 벌이는 모습에 자극받았는지 탈모맨도 달려들었고.

“그래! 이게 난 더 취향에 맞더라고!”

“그렇겠지, 무식한 놈아!”

-콰아아앙!

시원하게 모습을 드러낸 크리쳐를 걷어찬 탈모맨을 타박하는 핥짝이.

그러는 본인도 이쪽이 더 취향에 맞는 거 같다. 멤버들마다 성향이 다르기는 하지만 핥짝이 역시 굳이 숨을 필요가 없으면 화려하게 날뛰는 쪽이니.

“난 이런 거 싫다구!”

냥펀은 예외. 기본적으로 안전을 우선시하는 녀석이라.

그렇다고 순하게 나오는 건 아니지만.

[골드 익스플로젼 (S) Lv.10]

[칭호, 돈지랄이 번쩍입니다!]

-콰과과과과광!

가장 안전한 방법은 위협을 없애는 것. 사방으로 뿌린 금화가 터져 나가며 일대를 휩쓴다.

조건만 맞으면 제일 화력이 센 게 냥펀이다. 그러기 위해 들어가는 재화와 재료가 많아서 그렇지.

돈을 물 쓰듯… 아니지, 폭탄처럼 쓴 덕에 덤벼들던 놈들 모두 주춤한 상황.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으로 진입하자 공기가 바뀌었다.

-사아아아아

[변형 중인 세계숲의 중심부에 진입했습니다.]

[페널티가 더욱 강화됩니다.]

[크리쳐와 괴목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세계수의 비틀린 축복이 내려집니다.]

“크읍!”

“으으, 윽!”

공기 자체가 무겁고 눅눅해진 기분.

끈적한 기운이 몸에 달라붙고 이전까지와는 달리 명확한 시선과 살기가 느껴졌다.

왜냐.

“피해요! 여기부터 전부 괴목이에요!”

-콰앙!

-콰가가가각!

중심부에 있는 모든 식물이 괴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동안 상대했던 놈들은 모두 중심부에 밀린 약한 객체들. 난이도가 수직 상승했다.

“더,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 돼!”

정신적인 디버프가 강화되며 정신을 놔 버린 엘프 레인저 한 명이 자리를 이탈했다.

환각을 보는지 엉뚱한 곳으로 활을 쏜 이가 숲 사이로 몸을 던졌고.

“크하아앙!”

그대로 크리쳐에게 물어뜯겼다.

중심지 밖에 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크리쳐.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능력치까지 올라간 괴물이었고.

“세계수는 정면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가야 해요!”

“활이 안 통해요!”

“크읍! 너무 단단해!”

괴목과 크리쳐의 방호력은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다.

힘없이 튕겨 나가는 화살. 자세를 낮춘 미피가 검을 휘둘렀으나.

-차캉!

그대로 검이 부서져 버렸고, 빈틈으로 들어온 괴목의 기둥이 그대로 미피를 날려 버렸다.

절대적인 물리력의 차이.

너무나 가볍게 날아가 버리는 미피를 구하기 위해 휘카가 달려들었으나.

-콰아아아아악!

사방에서 솟아오른 뿌리가 그녀를 저지했다.

저대로 놔두면 사망 확정이다.

[파이어 밤 (S) Lv.10]

-콰아아아아앙!

여기부터는 스킬을 아낄 필요가 없다. 아껴서 통과할 수 있을 수준도 아니고.

괴목이라도 기본은 나무. 불길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했으며, 뿌리가 빠져나가는 틈에 몸을 날린 탈모맨이 짓이겨지기 직전이던 미피를 감싸 안았다.

-콰앙! 쾅!

무차별적으로 내려치는 괴목의 공격을 등으로 받은 탈모맨의 얼굴을 구겼으나.

“으아아아!”

기합과 함께 떨쳐 냈고 메디와 파르갈, 휘카가 둘에게 붙어 도왔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과 살기.

“사아아아아!”

뱀의 형태를 한 크리쳐가 나무 사이를 통과해 아가리를 벌린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액.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독 내성이 발동할 정도의 맹독이었고, 뒤집어쓴다면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뻔했으나.

[드루이드 파르갈이 뿌리를 내립니다!]

-우득

-우드드드득

“아무래도 난 이곳에 남아야 할 거 같군.”

한순간에 거대한 나무로 변한 파르갈이 그들을 보호했다.

괴목과 비교하더라도 거대한 크기. 땅 깊숙이 뿌리를 뻗어 이동할 수는 없었으나 상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가 팔을 한 번 휘두르자.

-콰르르르르릉!

힘을 이기지 못한 괴목이 기둥째 뽑혀 나갔다.

크리쳐들이 경계하며 짖어 댔으며, 괴목들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으로 파르갈을 두드렸다.

“이쪽은 우리가 버티고 있겠네! 안으로 들어가! 메디! 뒷일을 부탁하네!”

“저희는 파르갈 장로님을 돕고 있을게요! 안에서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최대한 이목을 끌 테니 세계수를 부탁드려요!”

제대로 된 공격이 통하지 않는 미피와 휘카가 파르갈과 협동해 버티기에 돌입했고.

“가시죠. 이곳에 올 때부터 살아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드루이드 전사들이 멍하니 선 메디를 끌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입술을 씹는다.

휘카와 미피가 남은 시점에서 세계수로 향하는 길을 정확히 알려 줄 사람은 그녀뿐.

“이쪽이에요.”

마지막으로 그들을 눈에 담은 메디가 전력을 다해 숲 안으로 달린다.

횡으로 들어오는 나뭇가지를 피해 몸을 날리고, 다리를 붙잡는 뿌리를 쳐 냈다.

나 역시 폭발을 일으키는 동시에 어스 월.

뿌리가 엉킨 괴목을 위로 올려 버렸으며, 앞뒤 좌우할 거 없이 덤벼드는 크리쳐를 향해 오로라 빔을 쏘았다.

-쿠구구구구궁!

-콰르르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굉음. 파르갈이 있는 곳도 전투가 한창이다.

몇몇 우리를 무시하고 그쪽을 향해 달려가는 놈들도 있을 정도.

이미 몸은 크리쳐의 피와 괴목의 수액으로 뒤덮인 상황.

중간중간 위험한 상황이 펼쳐질 때는…….

[드루이드 시레이가 뿌리를 내립니다!]

[드루이드 타메룬이 뿌리를 내립니다!]

[드루이드 조지아가 뿌리를 내립니다!]

드루이드 전사들이 몸을 바쳐 시간을 끌었다.

잠시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요동치는 괴목 위로 보이는 메시지.

[멸망화 지수- 99/100]

멸망 확정까지 남은 점수는 고작해야 1점.

“보입니다! 세계수예요!”

우리는 붉게 물든 세계수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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