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92화 (392/740)

392화 세계수로

갑작스레 회의실에 난입한 건 둘째치고 다짜고짜 세계수를 없애자는 말에 한순간 정적이 일었다.

세계숲이 무엇인가. 이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신성한 존재이지 않은가. 상징적인 의미를 떠나더라도 삶의 터전이 되는 동시에 실제로 종족의 뿌리기도 했다.

다르게 말하면…….

“그게 무슨 말인가!”

“아무리 자네라도 인간인 건 어쩔 수 없다는 건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세계수를 없애면 우리는 어디서 살아갈 것이며, 어머니를 죽인 패륜아가 되겠지!”

이들이 절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는 뜻이었다.

안다. 알고 있다. 가끔은 이성을 넘어 맹신적인 뭔가가 있고, 합리를 거스른 판단을 할 때가 있으니까.

가족과 친구, 연인 등등. 본인보다 남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본 적이 더러 있었다.

그게 옳으니 그르니 할 생각은 없다. 어느 쪽이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들에게 있어서는 지금이 그렇다는 건데.

안타깝게도 난 이 세계의 주민이 아니다. 어떻게든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결말을 맞이하고 싶을 뿐이지.

후우. 작게 숨을 내쉬고 책상에 손을 얹고 몸을 기울였다.

“다시 말씀드리죠. 탑의 메시지를 받았을 겁니다. 선택지를 줬겠죠. 이곳에 남을지 탑으로 들어갈지. 여러분이 다 아는 NPC가 될지 여부를요.”

뻥 뚫린 천장을 가리켰다.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멸망화 지수. 늘어나지도 않았지만 줄지도 않았다.

얼마나 더 그럴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많을 거 같지는 않다.

“저 망할 멸망화 지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100점이 됐을 때 멸망으로 처리될 건 분명하고,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수도 있고 세계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어요.”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짐작할 뿐이지.

약간의 과장도 섞여 있다. 멸망화 지수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탑의 기준에서다.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라.

물론 탑의 기준이 가장 객관적일 수도 있을 수도 있다만…….

‘탑은 폐기 처분을 하지 않아.’

도전에 따른 성과. 그에 따른 보상을 줄지언정 실패했다고 도전자를 죽여 버리지는 않는다.

이게 뭔 소린가 싶을 수도 있다. 등반하다 죽은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

정확히 말하면 이거다.

도전하는 비용으로 목숨을 내거는 거지 도전에 실패했다고 반드시 죽지는 않는다는 말.

애초에 선택지가 삶과 죽음밖에 없는 이분법적인 곳이 탑이었다면 상위층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해할 수 없고 짐작하기 힘들지만 탑에도 나름의 법칙과 기준이 있다.

‘NPC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도 있고 아예 탑에 들어간 적도 없는 사람도 있어.’

이런 상황에서 탑이 세계를 터트린다?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동안 겪어 온 탑은 그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어쩌면 탑의 실체를 마주하며 의지를 엿보았기 때문에 떠오른 생각일지도 모른다.

예상하건대 멸망화 지수가 100점을 넘긴다 하더라도 세계가 터지는 일은 없을 거다.

근거가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멸망화 지수는 점수가 낮아지기도 했었어.’

아주 잠깐이지만 점수가 줄었다가 다시 늘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100점을 넘어섰다가 다시 줄어들 수도 있다는 거 아닐까?

다만 뭐가 됐든 세계수는 없애야 한다. 이대로는 전멸일 테니까.

“솔직해집시다. 여러분, 위에 올라갈 생각 한 번도 안 했어요?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 압니까?”

대놓고 물었다. 전송 대기실에서 봤던 여러 장면. 그중에는 생존자들이 떠드는 것도 있었으니까.

탑으로 올라가야 한다. 살아남을 방법은 그거밖에 없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그럴 경우 세계수는 물론이고 남아 있을 사람 모두를 버리고 가야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죽는 건 매한가지다.

바로 올라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

“크흠. 살 사람은 사는 게 맞지.”

“아직 우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네. 방법이 있을 거야.”

속 편한 소리 한다. 방법 찾다가 끝나게 생겼구만.

“세계숲은 세계수의 영역이죠. 마경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크리쳐가 광폭화된 원인이 세계수라는 건 여러분이 더 잘 알 겁니다. 정령이 여러분을 떠났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세계수는 영역 전체에 뿌리를 내린다. 숲에서 죽은 이들이 흘린 피를 마신 건 뻔한 일.

정령 또한 계속되는 정신적 고통에 엘프와 드루이드와의 관계를 끊었다.

봐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메디 옆에는 정령들이 놀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챕터Ⅱ. 정령을 잃은 세대의 의미가 이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가혹한 법. 얼굴이 벌게진 엘프 한 명이 소리를 지른다.

“그래! 알아! 안다고! 알면 뭐가 달라져? 터놓고 말하지. 우린 갇혔어.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마경화된 숲 때문에 중심부에는 가지도 못해!”

“드루이드들이 그나마 가능성 있지만 서쪽 숲에 있던 탓에 대부분이 당했지. 남은 인원이 몇 없어.”

그럴 줄 알았다. 멍청이도 아니고 이들이라고 모를까.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할 수 없고 하기도 싫으니까 이런 거지.

그래서 말한 거다.

“저희가 가겠습니다.”

나와 멤버들이 직접 움직인다.

숲의 영향도 받지 않고 세계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으니.

거기에 하나 더.

76층으로 넘어오기 전, 권능을 통해 본 게 있었다.

-눈의 정령이 서서히 광폭화됩니다.

-눈의 정령이 자아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아직 세계수가 완전히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건 세계수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세계수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 압니까?”

“뭐?”

“세계수가 씨앗일 때, 묘목일 때를 본 사람 있나요? 아니, 세계수가 눈의 정령이라는 것만 알지 직접 본 적이 있어요?”

내 물음에 엘프와 드루이드가 얼굴을 찌푸린다.

외부인이 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자그마치 눈의 정령의 아이라고 불리는 종족인데 자존심이 있지.

“세계수는 태초부터 있던 것이야. 눈의 정령은 간혹 만난 자가 있다고 들었어.”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일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거라네. 엘프들이 화관을 쓰고 결혼을 하는 것처럼. 세계가 망하면서 역사 기록 또한 유실되었지만 우리도 긴 삶을 살아온 만큼…….”

“아뇨. 상징이니 전설이니 그런 거 아닙니다. 진짜지.”

변명을 늘어놓는 이의 말을 막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랫동안 세계수를 지킨 이들보다 내가 더 잘 아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전 압니다. 세계수를 없애면서 다시 태어나게 할 방법을.”

이미 해봤으니까.

세계수 퀘스트. 눈의 정령 여왕, 하이누. 그녀와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다.

당장 내가 가지고 있던 화관 역시 그때 얻은 것이었고.

“다, 당신. 화관을 가지고 있었죠.”

“예, 눈의 정령 여왕한테 직접 받은 물건입니다.”

“그게 사실이오?”

“거짓말 아닌가!”

몇몇 믿을 수 없다며 소리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직접 화관을 받은 엘프 장로 메디는 알 거다.

내가 건네준 화관이 평범한 화관이 아니라는 것을.

“떠날 사람은 떠나더라도 남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난 입을 다물었고.

“…정말 할 수 있겠나?”

침묵을 유지하던 드루이드의 장로, 파르갈이 입을 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드루이드의 수장. 실질적으로 세계숲에서 활동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강자.

“자네 말이 맞아.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

[파르갈이 메시지를 공유합니다.]

[당신은 NPC가 될 수 있습니다.]

[업적이 충분합니다!]

[안전지대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강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장로인 것도 있고 처음으로 비틀린 크리쳐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니까.

안전지대에 들어갈 정도의 업적을 쌓았다는 건 탑 안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는 거겠지.

안전지대에 있던 이들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숲이 이렇게 된 데는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네. 말은 안 하지만 자네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그의 말에 엘프들이 입을 다물었다.

필요할 때는 정당하다고 느꼈을지 몰라도 문제가 생기면 남 탓을 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염치를 알기 때문이고.

어쩌면 드루이드의 도움이 없으면 이곳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속사정은 모르겠다. 관심도 없고.

파르갈이 날 응시한다.

“여러모로 도움만 받는군. 가세나. 드루이드는 자네를 도울 테니.”

그가 나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잠시 눈치를 보는 이들.

“저도 같이 가죠. 장로인 이상 모두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메디 역시 손을 들었다.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다른 지원자는 없을까. 조금 더 기다려 봤지만 시선을 피할 뿐이다.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며 사실상 일정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여러분은 남은 이들을 챙겨 주세요. 그 또한 중요한 일이니까요.”

착하기도 하지. 다른 사람들이 부끄럽지 않게 메디가 그들의 역할을 확인해 준다.

하늘을 바라봤다.

[멸망화 지수- 98/100]

그사이 점수가 더 올랐다.

어둑한 하늘. 홀로그램만이 선명하게 비추고.

“지원자가 더 있는지 확인해 볼게요. 새벽에 출발하죠. 시간이 없어요.”

“나도 드루이드를 모으러 가겠네.”

메디와 파르갈이 회의장을 나섰다.

* * *

여명이 밝아 온다.

생존자 캠프 외곽. 세계수를 향해 갈 사람이 모였다.

의외로 지원자는 좀 있던 모양이었지만 마경화된 숲에서 버틸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다 보니 인원 자체는 많지 않았다.

나와 멤버들을 포함해 12명이 전부다.

모든 전력을 끌고 갈 수도 없는 게 누군가는 이곳에 남아 위협에 맞서야 했다. 중간에 크리쳐가 공격해 오면 방어할 수는 있어야 하니까.

‘휘카랑 미피도 같이 가는군.’

둘 실력 정도면 충분히 숲의 영향을 버틸 수 있다.

나와 멤버들이 4명. 장로와 두 엘프가 4명. 드루이드 전사가 3명에 엘프 레인저가 1명.

“숲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길 안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중심부로 갈수록 크리쳐와 괴목이 많아질 걸세. 세계수를 보호하기 위해 한곳으로 모이는 것 같았으니.”

준비는 마쳤다.

“출발합시다.”

“제가 선두를 맡죠.”

숲으로 나아갔다.

피난 캠프에 있던 이들이 고개를 내밀고 우리를 바라본다.

자신을 버린, 혹은 자신이 버린 세계수를 향해 기도를 하는 이들도 있었고 손수건을 흔들며 안녕을 비는 이도 있었다.

-파아앗!

발을 박찼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마경화 지역. 엘프들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크리쳐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파르갈, 여전히 크리쳐와 괴목과는 소통이 안 되나요?”

“안 되네.”

혹시나 싶어서 물었지만 역시나.

두 종족은 정령과 완전히 끊어졌다.

입술을 씹었다. 계획은 있지만 확실히 가능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저 가능성이라도 잡고 움직이는 것일 뿐.

내가 믿는 거라고는.

[칭호, 정령의 친구가 반짝입니다.]

칭호와.

차원 상점, 마일리지 샵에서 산 물건 두 개뿐.

조용히 인벤토리를 열어 마일리지 상품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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