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76층
시야가 바뀌었다.
전송 대기실에 있던 것이 착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당연하게.
내가 떨어진 곳은 세계숲. 마경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아직 정도가 약해 별다른 문제는 안 되는 것 같지만 또 모르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주변을 살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풀숲을 헤치고 멤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근처로 떨어진 모양. 표정 자체는 좋지 않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흘러갈 줄이야.”
“그르겡. 이건 몰랐넹.”
“지금 기죽을 거 없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히든 가든을 도우면 되는 거잖아?”
짜증이 오른 핥짝이와 시무룩해진 냥펀.
둘을 달래듯 탈모맨이 외쳤다. 녀석 말이 맞다. 지나간 일은 지나갔으니 넘겨 버리고 현재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맞았으니까.
이미 상황은 다 드러났다.
멸망의 거의 확정되었고, 인류를 포함한 대다수 생존자들은 NPC가 되어 탑으로 들어갔고, 일부만 세계에 남았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말이다.
[76층]
[과거의 기억이 생성됩니다.]
따끔한 두통이 인다. 세 번째 챕터로 넘어오며 진행된 기억이 생겨난다.
머리를 문지르면서 집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챕터Ⅱ가 종료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서쪽 마을에서 숭배자 무리가 탑으로 올라가고 남은 이들의 공격을 뚫고 탈출.
괴목과 크리쳐가 광폭화된 시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서쪽을 피해 북쪽으로 진입했다.
시간으로 따진다면 대략.
“그 일이 있고 2주 정도 흘렀군.”
“엄청 오래 지나지는 않았어.”
“왜냐, 오래 지냈으면 멸망했거든!”
냥펀 말이 맞네. 오래 지났으면 망했지 뭐. 지금도 실시간으로 망해 가는 중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투의 여파 때문인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을 정도로 울창했던 숲이 나무가 줄었다.
허공에 떠오른 홀로그램.
[멸망화 지수- 97/100]
97이라. 멸망화 지수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쌓이지만은 않는다.
숫자가 올랐다가 내리기도 하니까. 상황에 맞춰 변화한다는 거겠지.
물론 지금은 되돌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지만.
다른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히든 가든으로 들어가는 것이 먼저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이번 챕터는…….
‘제2 천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갈 거야.’
정확히 말하면 멸망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걸 목표로 했을 거였으면 첫 번째 챕터부터 세상을 변화시켜야 했다. 게다가 이제 와서 가능한지도 알 수 없고.
76층으로 전송되며 얼핏 봤던 그것을 되짚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우선은 히든 가든에 합류하는 것이 먼저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제는 이 세계의 주인은 엘프와 드루이드니까.
모두가 떠나간 세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움직이자. 중앙에는 사람들이 없을 거야. 세계수부터 미쳐 날뛰고 있다면 그쪽이 가장 위험하니까.”
“서쪽은 당연히 아닐 거고. 북쪽은 우리가 들어왔는데 못 봤으니까.”
“동쪽 아니면 남쪽이네. 시계 방향으로 돌자.”
빠르게 이동 방향을 정했다.
드루이드는 어느 정도 내성이 있는 것 같다만 엘프는 숲과 동기화되는 성질이 강해서 마경화된 곳에서 살기 힘들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곳 위주로 돌아다니다 보면 찾을 수 있겠지.
조금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타이밍.
“크르르르르르.”
우리를 반기는 손님이 나타났다.
비정상적으로 커지고 비틀린 몸. 극한의 재생력으로 집어삼킨 무기와 생물까지 덩치를 불리는 데 써 버리는 존재.
크리쳐.
광폭화됐기 때문일까. 내게 다가오는 녀석의 모습은 기억 속의 크리쳐와 비교하더라도 더 끔찍한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난 녀석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땡칠이?”
“크하아아앙!”
드루이드 마을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마주쳤던 녀석이다.
내 말에 화답하듯 땡칠이가 달려들었다.
붉게 물든 눈동자에는 고통이 가득하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다.
정령을 희생시켜 만든 수호자. 객관적인 시점에서는 괴물.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자처했으나 결말은 좋지 않았다. 결국에는 이렇게 될 테니까.
입을 꾹 다물고 검을 꺼냈다.
[영혼 찢기 (S) Lv.10]
[검강劍罡]
-찌이이익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녀석을 스치며 검을 휘둘렀다.
길게 뻗어 나간 검강이 매끄럽게 목을 잘라 내었고, 영혼 찢기가 재생 능력을 없앴다.
아무리 크리쳐라도 영혼이 찢긴 상처를 회복하는 건 불가능.
빙글 돌아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머리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목이 잘리며 재생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비정상적으로 커졌던 머리가 쪼그라든다.
속에 박혀 있던 칼날과 돌덩이가 떨어지고, 증식되었던 근육과 가죽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내 손에 들린 것은 까만 눈망울을 가진 강아지의 머리.
이게 원래의 모습이었겠지.
왤까. 혀를 살짝 내민 채 날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웃는 거 같기도 했다.
[크리쳐에 종속되었던 정령이 빠져나갑니다.]
[풀의 중급 정령이 고마움을 느낍니다.]
[정령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얼핏 반투명한 뭔가가 보였다 사라진다.
생명을 잃은 녀석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안으로 향했다.
“고생 그만할 때가 됐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세계수는 피에 물들었고, 세계숲에 침입할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화륵
몸에 불을 둘렀다.
“정리하면서 가자.”
우리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 굉음이 울려 퍼졌다.
괴목과 크리쳐가 쓰러지는 공간.
희뿌연 뭔가가 하늘로 날아가 흩어졌다.
* * *
세계숲 동부를 훑고 남부로 이동했다.
동부 역시 마경화가 진행 중. 일대 대부분이 마경화되었다.
일반적인 식생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넘쳤던 공간은 마궁과 마찬가지 되었으니, 생명력을 탐하는 존재만이 가득했다.
“상태가 심하네. 이렇게 될 정도로 문제가 있던 걸까.”
“그동안 이렇게 될 기미는 안 보였었는데.”
탈모맨과 핥짝이의 말대로 징조는 딱히 없었다.
드루이드 장로가 지나가듯이 광폭화에 대해 말한 적은 있었지만 자세한 건 알지 못했으니까.
그들이라고 위험성을 몰랐을까. 알고 있었을 거다. 알고 있음에도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 테고.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정령이 깃든 크리쳐와 괴목 자체는 그리 많지 않아.’
광폭화된 이들의 영향으로 일대가 마경화된 것뿐이다.
그 증거로 핵심이 되는 크리쳐와 주괴목을 없앤 곳은 천천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예전의 숲으로 바뀌겠다만 당장은 힘들 거다.
-쿠구구궁
-카아아아앙!
저 멀리 전투 소음이 들린다.
아무래도 제대로 방향을 잡은 거 같다. 크리쳐끼리 싸울 리는 없으니 히든 가든의 생존자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봐야지.
이 주변은 지나쳐 온 곳에 비하면 마경화가 덜하기도 했고.
-파아앗!
-타악!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크리쳐의 울부짖음. 거대한 몸을 흔드는 괴목.
그 사이로 보이는 익숙한 얼굴.
“휘카!”
“오셨군요!”
세계숲에서 처음 마주쳤던 엘프, 기동 타격대장 휘카였다.
옆에는 그녀가 이끄는 대원들이 크리쳐를 상대하고 있었고 부상을 입고 뒤로 빠진 몇몇 인원도 보였다.
[파이어 밤 (S) Lv.10]
-콰아아아앙!
폭발을 일으켰다.
괴목을 상대할 때는 아무래도 불이나 폭발이 효과적이라.
먼저 길을 막고 있는 괴목을 불 싸지른 후 손을 내뻗었다.
[데몬 스피어 (S) Lv.10]
-콰가가가각!
마기로 이루어진 창이 크리쳐의 몸을 꿰뚫는다.
챕터가 바뀌고 숲을 통과하며 스킬 레벨이 오른 상황.
예전보다 강력한 일격에 몸 일부가 사라진 크리쳐가 으르렁거린다.
부글부글 끓듯이 재생되는 몸. 상대한다면 가능한 빠르게. 굳이 더 오래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해 주는 게 도리.
[프로즌 브레이크 (S) Lv.10]
-꽈드드드득
-쩌어어어억!
그대로 얼려 버린 뒤 산산조각 냈다.
아무리 재생력이 좋더라도 잘게 쪼개지면 어쩔 수 없으니까.
오면서 느낀 게 있는데, 크리쳐도 그렇고 괴목도 그렇고 공격은 할지언정 의외로 순순히 죽으려 한다.
미쳐 버렸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게 내 의견이었으나.
“크르르르르!”
“키햐아아악!”
아무래도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았다.
엘프를 공격하고 있는 놈들은 본인들이 다치든 말든 맹렬히 공세를 이어 나가고 있으니까.
본인들을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한 복수인가.
따지고 보면 서로의 동의가 있기는 했겠지만 이용당하는 느낌도 있을 수 있다.
그거야 이들 사이의 문제니 뭐라 할 건 없지만 당장은 엘프들은 도와 줘야 할 타이밍.
“이쪽은 내가 맡을겡!”
냥펀이 전방에 있는 크리쳐를 향해 금화를 튕겼다.
황금빛 폭발하며 크리쳐를 휩쓸었고, 틈을 놓치지 않고 들어간 핥짝이가 압축 구슬을 쥔 채 안에 꽂아 넣었다.
[해제 (S) Lv.10]
-푸화아아악!
일순간 팽창하며 터져 버리는 구슬. 크리쳐 역시 다를 바 없었고 탈모맨은.
“흐압!”
“끼이이이익!”
고릴라 같이 생긴 크리쳐와 정면으로 힘 대결을 했다.
덩치만 보면 탈모맨이 훨씬 작다만 근력으로 따진다면…….
“으럇차!”
“끼에에엑!”
탈모맨의 압승이다. 저 덩치를 날려 버린 탈모맨이 주먹에 신성력을 담는다.
[정의의 일격 (S) Lv.10]
-쿠과아아아앙!
직격당한 크리쳐는 말할 것도 없고, 부채꼴로 퍼져 나간 충격파에 일대가 뒤집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대를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요.”
“하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그럼요. 그럼요!”
휘카의 말에 탈모맨이 바로 반응한다.
부상을 입은 자들은 대원들이 챙겼다.
“갑자기 일이 이렇게 돼서 여러분에게도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뭐,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죠.”
탑 숭배자들이 단체로 NPC가 되는 걸 지켜봤으니.
자세한 건 가서 이야기를 들어 봐야겠다.
“지금 히든 가든을 이끌고 있는 건 누구죠?”
“메디 장로님이랑 파르갈 장로님이요. 다른 분들은 사고를 당하셔서.”
세계수가 미쳤을 때 당했다는 뜻이다.
그래도 장로가 둘이나 살아 있다니 다행. 그것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가죠. 밖에서 있던 일도 알려 드려야 하니.”
“그러죠. 임시로 대피한 곳이라 변변치는 않지만 밖에 보다는 나을 거예요.”
휘카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괜히 근처에서 싸우고 있던 게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막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많지는 않네요.”
“세계수 주변에 있던 이들은 거의 다 당했고, 외곽 쪽에서 순찰을 돌던 레인저와 타격대도 여럿 죽었어요. 드루이드 마을은 괴멸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요.”
그럴 거 같다. 서쪽 숲은 전부터 크리쳐랑 괴목이 많았으니까.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대략 600명 정도.
누군가는 많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글쎄. 기존에는 수천 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져 있던 게 히든 가든이라.
“오오! 살아오셨군요!”
피난촌이나 다를 바 없는 곳, 부상자를 돌보던 인물이 우리를 반긴다. 미피. 레인저 대장.
둘 다 실력이 있다 보니 무사히 살아남은 모양.
“미피, 장로님들은요?”
“지금 다른 마을 사람들이랑 모여서 회의 중이에요.”
“마침 잘됐군요. 밖에서 있던 일을 보고해야 했는데.”
회의가 이루어지는 곳은 안쪽에 있었다.
천막도 아니다. 지붕도 없고 그냥 찢어진 천을 이어 붙여 벽만 세워 둔 곳이었으니까.
그만큼 사정이 안 좋다는 것이었다.
권능으로 통해 보이는 정보.
[사일러스 (S) Lv.10]
그나마 스킬로 방음은 하고 있는 모양.
영역 안으로 들어서자 장로와 다른 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도 떠나야 합니다! 더는 안 돼요!”
“무슨 수로요? 조금만 나가도 어지럽고 환각을 봐요.”
“드루이드들이 앞장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 크리쳐를 마주치면 가장 먼저 죽을 거고 뒤따라오던 엘프들은 몰살이겠죠.”
“이, 이렇게 된 이상 탑으로 들어가는 건…….”
“자격이 없는 자들은 모두 죽이자 이건가요!”
평소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는 목소리들.
얼마나 정신이 없는지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다.
저들도 답을 대충 알고 있을 거다. 아는데도 그럴 수 없어 다른 말을 해 대는 거겠지.
-짜악
손뼉을 쳤다.
일순간 모여드는 시선.
“바깥 탐방을 마치고 왔습니다. 인류는 떠났고 남은 건 여러분뿐입니다. 여러분도 오래지 않아 그렇게 되겠죠.”
세상이 망했노라, 죽든지 NPC가 되든지 할 거다. 담담히 팩트를 말했다.
나를 보는 이들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섞인다.
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봤다.
“세계수, 없앱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