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때가 되다
검사를 향해 달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잇몸을 보이며 웃은 녀석이 검을 내질렀다.
덕춘이가 놈의 공격을 막아 내기는 했지만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때는 어디까지나 덕춘이를 몬스터쯤으로 여기고 한 공격이었으니까.
첫 합이라 그런가. 정직하게 들어오는 일격.
뜻하는 바는 하나.
정면으로 실력을 느껴 보겠다는 것.
순수하게 실력으로, 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고 대면하는 일 합.
검사의 입장에서는 악수였고.
-카아아아앙!
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쪽 세계로 넘어온 후로 검을 제대로 쓰는 놈을 본 적이 없어서.
오면서 본 놈의 흔적을 보고 흥미를 느끼기도 했고.
2미터에 달하는 검을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힘이 대단하다. 그렇다고 투박한 느낌도 아니고 뭐랄까…….
“무겁고 날카롭네.”
“너도 제법이구나.”
손을 타고 흐르는 진동. 그 떨림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제대로 된 공격은 하는 것도, 받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인사는 이 정도면 됐고.
-촤악
발폭을 넓게 잡았다. 이어서 횡 베기.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놈 또한 가볍게 검을 비틀어 막아 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 검신이 길어 다루기 까다로울 텐데도 이 정도라… 예상은 했지만 숙련도가 높다.
다짜고짜 들어오는 연공에 놈이 입꼬리를 올렸다.
“성격이 급한 친구로군.”
“내 개구리 건드는 놈들을 별로 안 좋아해서.”
따지고 보면 덕춘이가 때려잡은 사람이 더 많은 거 같지만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일단은 주인인데 책임을 져야지, 그치?
난 어깨에 올라탄 덕춘이를 바라봤고.
“궤?”
“아냐, 하던 거 해.”
코를 후비적거리는 덕춘이를 흘낏 보고 다시 놈에게 집중했다.
적당히 농담을 나누며 검을 나누고 있지만 긴장감은 놓지 않았다.
놈의 행동과 표정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숨겨진 한 수가 있는 건 물론이고, 아직 진심을 다해 싸우고 있지 않은 거 같아서.
시야를 넓게 잡자 전투를 이어 나가는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이 보인다.
상대하고 있는 건 궁수. 손짓만으로 화살을 쏘아 대는 녀석이었으며, 더 눈여겨볼 게 있다면.
“하하! 그쪽은 아니라고?”
은신과 함께 분신술까지 쓰고 있다.
놈과 똑같이 생긴 분신이 화살을 쏘아 댄다.
놀랍게도 분신이 쏘는 화살 모두 실체를 가지고 날아온다는 것.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을 상대하는 느낌. 어느 쪽이 본체인지도 파악하기 힘들다.
나한테는 아니지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를 노려!”
정보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본체의 위치를 알렸다.
이미 멤버들은 내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정보를 읽는다는 걸 눈치챈 상태.
망설임 없이 내 외침에 따라 움직였고.
“이런, 눈이 좋은 놈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한순간에 분신이 사라지며 놈에게 흡수됐다.
저것도 잠깐이다. 곧장 은신으로 눈을 가린 후에 다시 나타났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계속 본체를 알려 주고 싶었지만.
“넌 나한테 신경을 써야지!”
-쿠구구구구궁!
내 앞에 있는 녀석이 가만있지 않았다.
일도양단의 기세로 들어온 검격.
빙글, 몸을 돌리며 회피했다.
대놓고 들어오는 공격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만만한 거라면 모를까 놈이 자신이 있는 분야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오로라 빔 (S) Lv.10]
-찌유우우우우웅!
빠르게 처리하고 애들을 돕는 게 맞았으니까.
갑작스러운 스킬의 사용. 날렵하게 무게 중심을 바꾸며 자리를 피한 녀석이 얼굴을 구긴다.
“검사인 줄 알았더니 잡기술을 쓰는구나.”
“한쪽만 고집하다가는 죽기 딱 좋지. 인생은 실전이거든.”
이기는 데 따질 게 뭐가 있다. 쓸 수 있는 건 다 쓰는 거지.
-콰아아아앙!
[강철의 의지 (S) Lv.10]
[강체 (S) Lv.10]
[달라붙기 (AAA) Lv.2]
“고집은 확실할 때 부려.”
발밑에 폭발을 일으켜 급속도로 접근. 놈의 검을 움켜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놈의 칼날이 틀어박히려 했지만 버텨 냈고, 그대로 프로즌 브레이크.
-꽈드드드득!
검째로 얼려 버렸다.
냉기를 피해 놈이 검을 놓는 것을 유도한 것이었으나.
“어딜!”
-콰악!
그대로 날 밀어 차며 검을 빼낸다.
그 와중에 칼날을 비틀어 검을 잡은 내 손가락을 잘라버리려는 시도까지.
당해 줄 생각이 없어 검을 놓았다.
아쉽네. 조금만 늦었으면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여유롭던 놈의 얼굴에 진지함이 서렸으니.
“그냥 해서는 안 되는 놈이군.”
빨리도 알아차린다. 본인 실력에 자신이 있어서 그런가.
내가 생각해도 못된 심보인 거 같기는 하다만…….
“난 너같이 자신만만한 놈들을 보면 열불이 나더라.”
왜 자꾸 남을 깔보고 무시하는지 말이야.
겪을 거 다 겪고,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은 건 마찬가진데.
나보다 먼저 탑에 불려왔을 수 있다.
나보다 더한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걸어온 길이 더 쉬웠다는 건 아니거든.”
나 역시 악착같이 도전해서 상위층까지 올라섰다.
놈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날 만만하게 볼 정도는 아닐 터.
빠르게 끝내자. 이들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전투는 벌어졌고, 놈들 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카앙
빠르게 내지른 검.
반대 손에는 파이어 밤.
-콰아아아앙!
전신을 덮쳐오는 폭발을 피하기 위해 놈이 거리를 벌린다.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어차피 홍염이 치솟으며 시야가 어지러워지는 건 당연.
눈치 보고 있을 거다. 스킬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 시야를 가린 후 원거리 공격을 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검강劍罡]
[영혼 찢기 (S) Lv.10]
[절삭(S) Lv.10]
이번에는 아니지만.
-푸화아아악!
거센 불길을 뚫고 놈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신에 둘린 푸른 마나의 칼날. 마력을 집어삼킨 검강이 일순간 길게 늘어났고.
-사악
원래라면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넘어 놈의 목을 베어 냈다.
육체와 영혼 모두를 끓어 버리는 일격.
놈의 눈이 목을 향해 움직이는 듯했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를 잃은 몸이 무너져 내렸다.
“기대했던 거에 비해 별로네.”
좀 더 강할 줄 알았는데.
이쪽은 정리됐고, 궁수도 곧 정리되지 않을까. 은신에 분신, 투명한 공격까지 하는 놈이지만 그걸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는 놈이다.
봐라.
-콱. 콰각.
“아오, 따갑다고!”
“괴, 괴물 같은 자식!”
놈이 쏘아 댄 화살에 맞은 탈모맨이 몸을 털어 내고 있지 않은가.
튼튼한 거로 치면 나보다 튼튼한 게 탈모맨이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방어구도 없이 쫄쫄이 입고 다니지.
아무리 상대가 날고 기어도 공격이 통하지 않으면 무용지물.
그나마 도망치고 모습을 숨기는 것으로 여태 버티고 있었지만.
-빠악!
“카흑!”
내가 합류한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돌멩이를 던져 머리를 맞췄다. 충격을 받으면 은신이 풀리는 건지 모습을 드러낸 녀석.
“공블아이, 나이스!”
기회를 놓치지 않은 핥짝이가 빠르게 놈에게 접근했고 그대로 스파이크 내리치듯 놈의 머리통을 갈겼으니.
-털썩
뇌진탕이라도 왔는지 풀썩 쓰러진다.
코피까지 나네. 저거 위험한 거 아닌가. 잘하면 죽겠는데.
우리를 공격한 만큼 죽어도 싸지만.
그보다…….
‘둘 다 엄청 강하지는 않아. 숭배자로 쳐도 기껏해야 브론즈? 실버는 되지 않을 거 같은데.’
그동안 마주친 놈들로 기준을 잡아도 그렇다.
브론즈 급만 돼도 나름 강한 편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을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좀 애매하다.
이들은 보조 전력 정도고 진짜 강한 놈은 따로 있다는 뜻.
아무래도 저놈이 그게 아닐까.
하늘을 날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녀석.
느껴지는 기세 역시 아까 놈들과는 다르다. 보다 차분하고 동시에 무게감이 있었으니까.
“흐음.”
놈과 시선이 마주친다.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 펄럭이는 로브. 얼굴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 덕에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젊은 거 같다만.
“네놈이구나. 이야기는 들었다. 제2 천계에서 꽤 날뛰었다지?”
“…탑 숭배자.”
제2 천계에 대해 말을 했다는 건 놈이 탑 숭배자라는 뜻.
그게 아니면 나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너를 비롯해 옆에 있는 놈들까지 특히 주의하라 하더군. 보아하니 실력이 나쁘지는 않아. 저놈들도 쓸 만했거든.”
평가하듯 중얼거린 놈이 쓰러져 있는 검사와 궁수를 바라본다.
안타깝다든가 분노한다든가 하는 특별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라면 네놈들을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지만 지금은 그다지 의미가 없지. 그보다는 내 임무에 충실한 것이 먼저라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곳에서 말이지.”
숭배자에게 이곳에서의 사람들은 다시 리셋 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내 주변으로 멤버들이 모인다.
대화를 통해 놈이 탑 숭배자인 게 드러난 이상 가만 놔둘 수는 없다.
“아, 너무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어. 너희와 싸울 생각은 없거든.”
“어쩌지? 나는 있는데.”
[어스 월 (B) Lv.2]
-쿠구구궁
-콰아아악!
발밑으로 벽이 솟아오른다.
밀려나는 힘으로 날아가는 동시에 파이어 밤.
-콰과과과광!
추진력을 더하며 방향을 조절했다.
검강을 둘러 늘어난 검날이 놈의 몸을 향해 뻗어 나갔고.
[블링크 (S) Lv.10]
놈은 블링크로 자리를 바꿔 공격을 피해 냈다.
어디로 갔을까.
빠르게 기척을 살폈다. 전방에는 보이지 않으니 가능성이 있는 곳은 뒤 아니면 위아래.
사륵. 놈의 로브가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위다.
-카아아아앙!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검을 그었다.
쇳소리와 함께 반발력으 느껴진다. 쉴드인가.
후웅. 반격하지 않고 놈이 더 높이 떠오른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건 진실인 모양.
난 놈에게 권능을 사용했다.
[히메니아]
-탑 숭배자입니다.
-실버 등급. 서열이 높습니다.
실버 등급이라고 다 같은 수준은 아니라 이건가.
하긴 제2 천계에서 만났던 놈들도 실력이 제각각이기는 했다.
“네놈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부터가 이번 시나리오는 평탄하게 흘러갔다는 것을 의미하지. 따로 내가 손 쓸 필요가 없어.”
“무슨 소리냐.”
흙벽에 착지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는 건가. 왜?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만 퇴장해야 하지.”
알 수 없는 말을 이어 나가는 녀석.
퇴장? 때가 돼? 의문스러운 것도 잠시.
-구궁. 구구구궁
진동이 울렸다.
저 멀리,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몇 명이나 될까.
“야, 이거 일 꼬인 거 아니야?”
“100명은 넘어 보이는데. 골치 아프게 됐네.”
“괜찮아. 한 사람당 25명만 제치면 된다고.”
“그것참 위로가 되는걸? 탈모 자식아!”
대략 100명은 되는 거 같다.
저놈들을 전부 상대해야 하는 건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상대한 놈들 수준만 되더라도 고생 꽤 할 거 같은데.
심지어 실버 등급인 놈도 있다. 저 무리 중에도 더 있을지 모르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긴장감을 올리는 타이밍.
“구원의 길로 온 자. 탑으로 가자. 멸망할 세계를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거다!”
놈이 큰 목소리로 외쳤고.
-파아아아앗
하늘 위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내용을 담은 홀로그램이.
[세계가 멸망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멸망화 지수- 9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