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서쪽 왕국
탐색을 이어 나갔다. 세계숲의 경계선부터 꽤 떨어진 거리까지 거점지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쯤 되면 숨바꼭질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다 어디 숨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나마 사람의 흔적이 있는 곳은 간혹 발견되었지만.
“여기도 꽝이야.”
“포스터 발견.”
“음, 떠난 지 제법 된 듯? 여기 백골 있다.”
어디까지나 흔적일 뿐 사람은 없었다. 시체가 백골화되었다면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것.
물론 기온도 높고 습한 면도 있어 빠르게 부패가 일어난 걸지도 모르겠지만.
뼈가 흩어지지 않았다. 몬스터가 건들지 않았다는 뜻.
‘생각해 보면 그렇게 몬스터가 많지는 않았어.’
멸망에 접어들고 있는 세계라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몬스터가 얼굴을 들이미는 건 아니지만 그걸 염두에 두더라도 좀 적은 느낌이다.
떠나기 전 일대에 있는 몬스터를 완전히 정리해 버린 모양.
거점지로 사용했던 곳이니 안전을 위해서라도 토벌을 진행했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는데…….
“그동안 지나쳐 온 곳 모두 전투 흔적이 비슷하지 않아?”
“겹치는 부분이 좀 많드라.”
내 물음에 핥짝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단순히 사용한 무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냉병기를 사용하면 종류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베고 찌르고 뭉개고. 이런 거야 그냥 그러려니 한다만.
‘바닥까지 같이 갈라 버렸단 말이지.’
몇 가지 특색이 남아 있다.
땅째로 베어 버린 흔적이 첫 번째. 일도양단의 기세로 검을 내리쳤는지 수십 미터 길이의 검상이 땅에 남아 있다.
다음으로는 부식액.
건물과 몬스터를 그대로 녹여 버린 흔적이 있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다. 안개 형태인지 독액 형태인지, 아니면 슬라임같이 젤 형태인지.
그 밖에도 개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특색 있는 전투 흔적이 몇 개 있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거점지를 따라 이동한 사람들이 토벌을 한 거야.”
이런 결론이 나왔다.
일단의 무리가 우리처럼 거점지를 순회했고 그 길목에 있는 몬스터를 쓸어 버렸다.
가능한 일인가. 세계숲은 최후의 보루 중 하나. 이곳을 탐하는 사람들과 사람들을 물어뜯기 위해 몰려든 몬스터.
에이션트와 고대종. 몬스터 웨이브와 재앙.
혼돈의 파편이 있던 정황은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실력자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이도다.
정확한 수준을 파악하기는 힘들었으나 대략적인 비교는 가능하다.
나와 멤버들이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되니까.
우리가 근방에 있는 몬스터를 전멸시키며 이동할 수 있는가.
‘할 수는 있겠어.’
특별한 규칙을 지닌 재앙이 나타난다면 조금 고전할지 모르겠으나 결국에는 해결할 거다.
덕춘이도 있고, 나 역시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어 재앙의 규칙에 저항할 수 있으니.
에이션트나 퍼스트 몬스터도 상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못 잡을 거 같지는 않았다.
톡톡. 손가락을 두들겼다.
‘어쩌면 우리랑 비슷한 수준일지도 모르겠는데.’
더 강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기는 해야 하겠지만.
일단은 우리와 동급 정도로 생각해 둬야겠다.
90층대를 오른 인물들. 킬더레스나 알리오스, 릴카가 움직였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싸울 필요도 없으니까.
적어도 그 정도 급은 안 될 거다.
“얘들앙, 아무래도 그거 같지 않아? 포스터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경로가 겹치잖아. 이쪽 가능성이 커 보여.”
냥펀과 핥짝이의 말에 동의한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자리를 비우고 주변을 순찰하고 온 탈모맨도 입술을 삐죽이더니 인정한다.
“이동 흔적이 있어. 무리로 움직인 거 같은데. 정확한 인원은 모르겠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다음 거점지가 있을 곳이라 추측되는 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오솔길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이 걸어 다녀 생긴 길. 그게 남아 있다는 건 그들이 이동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마경화된 식물들의 번식력을 생각하면 금세 길이 풀로 뒤덮였을 거다.
구원의 길로 향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동할 길을 뚫은 정체불명의 실력자.
세계숲을 차지하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했던 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들이 모이는 곳은 서쪽 왕국.
모든 해답은 그쪽에 있다는 거겠지.
지도를 살폈다.
‘지형이 변한 걸 감안하더라도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어.’
서두른다면 그보다 빠르게 도착할 것이고.
이들의 목적이 알 수 없는 상황. 빠르게 움직여서 나쁠 건 없었다.
* * *
서쪽 왕국. 정식 명칭이 따로 있는 거 같았지만 히든 가든에서는 그냥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애초에 예전부터 존재하던 곳이 아니었다. 그저 멸망한 왕국에 생존자들이 몰려 왕국이라 불리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보초라던가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유령 도시. 반파된 건물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을 뿐.
사람들이 사는 곳은 안으로 더 들어가야 나올 거 같다.
진짜 사람이 사는지도 의문이지만.
“이 정도면 거의 사막인데.”
“지도에는 평원이라고 적혀 있지만 말이지.”
“그걸 아직도 믿냐!”
사막. 그 말이 맞다. 모래로 이루어져 있는 건 아니지만 황무지나 다를 바 없으니까.
혹독한 환경인 건 몬스터에게도 마찬가지인지 곳곳에 놈들의 뼈가 굴러다니고 있다.
이런 곳에 정착하다니. 이쪽 세계 인류도 어지간히 상황이 안 좋았던 모양.
분명 어떤 메리트가 있으니 이곳에 터를 잡았을 텐데.
-슥
혹시나 뭐가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며 걷는 와중 핥짝이가 손을 들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인기척을 죽였다.
벽에 바짝 붙어 모습을 가린 채 핥짝이가 보고 있는 방향을 살폈으니.
“후욱. 후. 몇 명 안 남았어. 조금만 더 잡으면 돼.”
천으로 머리와 상체를 덮은 남자가 검을 쥔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잡으면 된다라, 무슨 뜻일까.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포스터를 가지고 있군.’
그의 품에 구원의 길 포스터가 있다는 것.
꿰매 버린 건지 옷에 붙여 놨다. 마치 자신이 이걸 보고 왔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검에는 열기에 말라붙은 피딱지가 앉아 있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방증이었고.
“죽어어어어!”
“이, 이익!”
반쯤 기운 담벼락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자가 남자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배틀 로얄이라도 하는 건가.”
“여기 인간 왕국이라며, 저래도 돼?”
“치안 개판인 거야 뭐. 그럴 수 있지.”
놈에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속닥이는 멤버들.
남자를 죽인 녀석이 낄낄거리며 목에 박힌 검을 뽑았다.
확인 사살을 할 필요도 없이 즉사.
“깔끔하게 찔렀네.”
“그에에.”
실력 차가 커서 그런가 반쯤 즐기고 있는 거 같다. 그러니 기습하면서 소리까지 질러 주지.
실제로 움직임이 좋기도 했고.
“저 녀석 일단 잡을까?”
“그래야 할 듯.”
어디 보자. 직접 나서는 것도 좋기는 한데 주변에 또 누가 있을지 모른다.
서로를 죽이는 상황, 놈이 긴장감을 놓을 리도 없고.
“덕춘아, 쟤 이길 수 있겠냐?”
“궥.”
고민 한번 안 하고 옹골찬 주먹을 쥐는 녀석.
오케이. 우리 킹갓 개구리를 믿고.
“덕춘이가 저놈 처리할 동안 우리는 둘러싸자. 어떤 놈들이 있을지 모르잖아.”
“오케이.”
“난 왼쪽으로 간다.”
“오른쪽 갈게.”
탈모맨이 이곳에 남고, 핥짝이가 왼쪽, 난 냥펀과 같이 오른쪽으로 이동하다 맨 끝으로 향했다.
사방을 차지했으니 혹시 모를 상황이 벌어져도 대응할 수 있을 터.
“뭐야 이건?”
“그에에.”
죽은 남자의 품을 뒤지던 이가 폴짝폴짝 뛰어오는 덕춘이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린다.
얼굴에 드러나는 의문. 개구리가 살 환경이 아니라는 건 본인이 더 잘 알 터.
“개구리도 먹을 만하지.”
씁. 입가를 훔친 녀석이 단검을 돌리더니 그대로 집어 던졌다.
평범한 개구리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테지만 덕춘이가 누군가.
-텁
“어?”
손끝으로 단검을 받아 낸 덕춘이가 혓바닥으로 단검을 움켜잡았고.
“그에에에!”
“이, 이런 미친 개구리가!”
그대로 놈을 향해 돌진했다.
길게 늘어나는 혓바닥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단검을 휘둘렀고,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녀석이 뒤로 대피했다.
그러다 울컥. 고작 개구리에게 쫄아서 도망쳤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는지 얼굴을 구겼고.
“별게 다 지랄이네!”
덕춘이를 걷어차기 위해 달려들었다.
접근전을 선택하다니… 미리 애도를 표한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발을 옆으로 뛰어 피한 덕춘이가 그대로 놈의 종아리를 벤다.
이어서 점프.
놈과 눈높이가 맞아떨어진 순간.
[뺨치기 (S)]
-짜아아아악!
찰진 소리와 함께 놈의 목이 훽 돌아갔다.
적당히 힘 조절을 했는지 목뼈가 날아가지는 않은 거 같다. 뼈 돌아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니까.
“퉤.”
침을 뱉은 덕춘이가 손을 털더니 녀석의 다리를 끌고 내 쪽으로 온다.
역시 우리 영물님, 믿고 있었다.
바로 그때.
-후우우우웅
-콰아아앙!
허공에 뭔가가 보이는 듯하더니 급속도로 낙하.
추락이나 다를 바 없는 속도로 바닥에 착지한 뭔가가 덕춘이를 가로막았으니.
“이것 참. 별의별 몬스터가 다 있군. 그놈은 우리가 데려가야 하는데 말이야.”
가죽옷을 걸친 남자. 빡빡 민머리에는 긴 상처가 있고 등에는 2미터에 달하는 검이 들려 있다.
길이에 비해 폭이 얇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검과 비교하면 배는 두꺼운 검신.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놈이다. 우리가 봤던 흔적.’
땅째로 갈라 버린 검사.
어디서 보고 있던 거지? 왜 지금 나타난 거고.
그의 눈이 쓰러진 남자에게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탈락시키고 싶기는 한데 규칙은 규칙이니까, 쯧.”
자연스럽게 놈이 벼락같이 쥐고 있던 검을 내질렀다.
목표는 덕춘이.
덕춘이가 방금 잡은 놈을 방패 삼아 내밀었으나.
“워후, 영악한 놈이네 이거?”
또 다른 놈이 난입했다. 건물 옥상에 반쯤 걸터앉은 놈이 화살을 쏘는 시늉을 했고.
-퍼억
실제로 무형의 뭔가에 날아와 덕춘이가 잡은 녀석을 밀쳐 냈다.
살상력은 없지만 위력이 약하지는 않다. 졸지에 맨몸이 되어 버린 덕춘이와 그 위로 떨어지는 검.
[외갑 (S)]
-까아아아아앙!
몸을 단단하게 만든 덕춘이가 놈의 일격을 버텨 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반동으로 검이 떠오른다.
검사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지금이다.
“우리 덕춘이 때리지 마, 나쁜 새끼들아!”
“동물학대범 죽어랏!”
“옳소!”
나를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낸 멤버들.
설마 우리들이 있을지는 몰랐는지 놈들이 안색을 굳혔으나 그것도 잠시.
“새로운 참가자가 왔을 줄은 몰랐군.”
“말로 하는 것보다는 때려 주는 게 진정시키기에 좋겠지?”
자세를 가다듬은 놈들이 등을 맞댄다.
투명한 활을 쏘는 자가 하늘을 향해 활 쏘는 시늉을 하니.
-퍼어어어엉!
신호탄이 터졌다.
역시나 2명이 전부일 리가 없지. 저 멀리 하늘을 날아오는 인형이 보인다.
마법사? 내가 이쪽 세계의 문화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옷차림이 딱 그 느낌이다. 날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튼.
“구원의 길로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와 함께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보자고.”
“물론 쉽지는 않을 거야. 영광스럽게도 우리가 직접 평가를 내려 줄 테니까.”
놈들이 우리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그사이 내게 돌아온 덕춘이. 다행히 크게 다친 부분은 없었지만 등 쪽에 생채기가 남았다.
스읍. 숨을 들이켰다.
“저 검사는 내가 맡을게.”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劍罡]
-파하아아아앗!
마력을 빨아들인 검이 푸르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