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포스터
세계숲의 외곽. 세계숲의 경계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세계숲에서 벗어났습니다.]
[마경의 영향에서 벗어납니다.]
친절하게도 알려 주니까.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도 이 부근을 기점으로 정찰을 한다.
밖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안에서 보면 경계를 기점으로 공간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세계수의 가호를 받아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장치.
그곳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의 임무가 시작되는 것이고, 세계숲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엘프와 드루이드는 세계숲을 벗어나지 않으니까.
휘카와 미피가 준비해 준 지도에 의하면 이쪽 길에 옛날에 만들어진 도로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그곳을 통해 가다 보면 인간들의 거점지 중 하나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도로가 어디 있다는 거야?”
“흔적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냥펀과 핥짝이의 물음. 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
내가 봐도 없다. 탈모맨도 목을 뺀 채 두리번거렸지만 도로는 무슨, 풀과 나무만 한가득이다.
혹시나 싶어 바닥을 쓸어 봤지만…….
“그냥 흙바닥이야.”
도로를 만들 때 쓰였을 돌이나 기타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마경에 비하면 평범한, 세계숲과 비교하면 아담한 나무들만 가득할 뿐.
세계숲을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드라마틱하게 환경이 변하지는 않는다. 어찌 됐든 숲의 연장선이니까.
“길 잘못 알려 준 거 아니야?”
“그건 아닐걸. 세계숲 내부는 맞게 이동했거든.”
특임대 출신이라 그런가 지도 보는 데 일가견이 있는 탈모맨이 한 말이니 믿어도 될 거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이 너무 지났어.”
“예전에는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없다는 거징.”
이거다.
도로? 있었을 거다. 예전에는.
세계숲이 외부와 단절된 지 수십 년이 지났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방치됐더라도 도로의 흔적은 남아 있었을 거다.
어디 동네 오솔길이면 모를까, 도로라고 불릴 정도면 지반을 다지고 자갈을 깔고 아스팔트를 부었든 돌을 깔든 했을 테니.
문제는 이곳은 평범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
멸망에 접어들고 있는 곳이고, 심지어 세계숲을 차지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투가 이루어진 곳이다.
사람에 의해서건 몬스터에 의해서건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에 의해서든 도로가 박살 났을 거라는 말.
“일단 움직이자. 다른 곳에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지.”
“조심해. 여기부터는 몬스터랑 재앙도 나타날 테니까.”
세계수의 영역에서 벗어난 순간, 언제 어디서든 게이트가 터질 수 있다.
숲에도 몬스터들이 살아갈지 모르고.
슥. 규칙성 없이 자라난 풀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중간중간 변질됐다. 게이트가 터지고 그 영향으로 생태계가 변한 곳. 우리는 그곳을 마경이라 부른다.
이미 이쪽은 마경이 돼 가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건데.’
성공적으로 게이트를 막아 냈다면 마경화가 진행되지도 않았을 거다.
이건 제2 천계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크르르르르
“벌써 손님이 찾아왔네.”
“가랏, 탈모맨! 해치워!”
“탈모오오오!”
핥짝이의 지시에 탈모맨이 기세 좋게 달려간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그도 그럴 것이.
“서열 정리 펀치!”
-콰아아아앙!
이 멤버로 움직이는 이상 어지간한 몬스터는 위협 축에도 못 껴서.
봐라. 괜히 냄새를 맡고 다가왔던 빅마우스 프로그의 머리통이 그대로 깨지지 않았나.
그래도 4성급에서는 제법 강한 놈이라고 불리는 놈인데.
‘이제는 4성급은 우습지만 말이지.’
탑에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고블린한테 칼 맞고 죽었는데. 냥펀도 코볼트한테 당했었고.
화각룡 비늘 뜯어 보겠다고 난리를 쳤던 적도 있었다.
새삼 많이 강해졌다고 느끼는 찰나.
“어? 공블블, 이거 그거 아니야?”
손에 묻은 체액을 털어 내던 탈모맨이 뭔가를 주웠다.
검은색 구슬.
방금 잡은 개구리한테서 나온 건 아니고,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것인데.
“고대의 정수?”
내가 아는 물건이다.
이전,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았을 때 마주쳤던 고대 몬스터들.
그놈들을 잡았을 때 나왔던 거다. 나도 몇 개 가지고 있다.
“에이션트 몬스터가 있었다는 거 아닌가.”
“그럴 리가. 에이션트랑 퍼스트 몬스터는 게이트 밖으로 못 나가.”
팁 메시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니 확실하다.
그렇다는 건.
“여기 있던 사람들이 에이션트 몬스터가 있는 게이트를 클리어했다는 거네.”
“그 사람들이 흘렸거나 죽어서 떨궜거나 둘 중 하나겠군.”
바깥사람 중에서도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을 능력을 가진 이들이 있다는 뜻이다.
고대 몬스터인 만큼 강력한 건 물론이고, 퍼스트 몬스터는 6성을 넘어 8성급 몬스터까지 있다.
일반적인 몬스터랑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말.
‘에이션트 몬스터가 나타났다면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어.’
제2 천계에서 겪었던 몬스터 웨이브도 그게 원인이었으니까.
몬스터 웨이브라면 도로가 박살 난 것도 이해된다. 도로만 문제가 아니라 밖에 있었다는 거점지 자체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곳의 정보가 부족하다.
몬스터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은 조심해야 하는 법. 상황에 따라서는 몬스터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진입했다. 나무가 점차 사라지며 숲이 끝나가는 것을 알렸다.
-후우우웅
조금은 건조한 바람.
항시 습기를 머금고 있던 숲과는 대조적이다. 바닥을 뒤덮던 잡초도 모습을 감추었고.
“모래군.”
흙에는 모래가 섞여 있었다.
손으로 파 보자 안쪽에도 모래가 느껴졌다. 토양 성질 자체가 바뀌었다는 뜻.
“이거 좀 짠데?”
“핥짝앙, 탈모맨 흙 파 먹엉.”
“지지.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야.”
나만 의구심을 가진 게 아닌지 탈모맨도 토양을 살폈다.
침을 뱉는 것이 맛까지 본 모양. 짠맛에 모래라.
설마 바다?
에이, 말도 안 되지. 숲에서 나가자마자 바다가 있을 리가 있나.
담수도 아니고 염분 섞인 곳에서 나무가 이렇게 자라나는 건 말이 안 된다.
물론 이 세계 나무는 염분에 강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비린내는 안 느껴져.”
“파도 소리도 안 들리고 말이지.”
다른 몇 가지 정보가 이곳이 바다가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고.
“야야, 저거 뭐냐. 호수?”
뜨문뜨문 이어지는 나무 사이를 지나 숲을 벗어나자 드넓게 펼쳐진 호수가 펼쳐졌다.
얼핏 바다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규모였으나 호수가 분명했다.
다른 것도 아닌 권능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였으니.
[재앙, 아쿠아 슬라임의 흔적]
-어항 도시의 아쿠아 슬라임이 죽은 곳입니다.
-암염巖鹽지대를 뒤덮어 염분 가득한 호수가 되었습니다.
-아쿠아 슬라임의 영향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호수의 물은 썩지도, 줄지도 않을 것입니다.
“재앙이 죽은 곳이라는군. 암염 캐는 곳에 커다란 슬라임이 죽었다나 봐.”
“이 정도 사이즈의 호수를 만들려면 얼마나 큰 괴물이었던 거야.”
핥짝이가 질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게나 말이다. 이명부터가 어항 도시 아닌가. 도시 하나 정도는 집어삼킬 정도는 됐겠지.
‘에이션트 몬스터에 재앙.’
세계수 근처에 별의별 놈들이 다 나타났었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잡은 거 같다만 일대에 터를 잡기는 힘들었을 터.
언제 전투를 치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규모 전투였던 건 틀림없다.
왜냐…….
“이야, 지형 자체가 바뀌었네. 이 정도면 호수 근처는 지도가 의미가 없겠는걸.”
우리가 받아 온 지도가 의미를 잃은 정도로 모양이 바뀌었으니까.
저쪽에 산이 있어야 하는데 산은 어디 가고 언덕만 남았으며, 숲길이 이어져야 했을 곳은 호수가 되었다.
머리를 긁적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원래 계획대로면 근처 거점지를 시작으로 서쪽의 인간 왕국까지 잠입해 동태를 살펴야 하는데 스타트부터 꼬였다.
애초에 엘프와 드루이드가 준 정보가 너무 옛날 거다.
숲 밖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건 뭐.
“얘들앙, 이상한 거 발견!”
주변을 수색하던 냥펀이 뭔가를 흔든다.
물가에 있어서 그런가 습기를 먹어 글씨가 흐릿했으나.
“무너진 세상에서 벗어날 자, 구원의 길로 오라?”
통역 스킬로 내용을 읽을 정도는 됐다.
“사이비 홍보물 같은 건가.”
“그나마 최근 거 같은데. 예전 거였으면 여기 없었지. 적어도 나름 종이도 빳빳하고.”
“적어도 재앙을 잡은 후에 뿌려진 물건인 듯.”
혹시나 싶어 주변을 더 살펴보니 냥펀이 주운 포스터와 같은 것들이 여럿 발견되었다.
가장 상태가 좋은 것을 보니 뒤편에는 구원의 길로 가는 방법도 적혀 있다.
포스터에 그려진 약도와 히든 가든에서 받아 온 지도를 비교했다.
“서쪽 왕국이네.”
“방향이 같아.”
어쩐다.
우리의 목적은 바깥세상의 동태를 살피는 것.
나올 때부터 제법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수명이 긴 엘프와 드루이드 기준이라 그런가 짧게 1년 내로 돌아오라고.
물론 1년 동안 밖에서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모를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가뜩이나 우리 세계도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상황인데.
눈을 가늘게 뜨고 포스터를 살폈다.
‘거점지를 시작으로 서쪽 왕국까지 살펴볼 계획이기는 했어.’
이쪽 부근은 이미 마경화가 진행 중이다. 즉, 사람이 살 가능성은 적다.
탈모맨에게 지도를 받아 살폈다.
우리의 위치. 서쪽 왕국. 저번 침입 때 놈들이 들어왔던 포인트 몇 개.
난 멤버들에게 앉으라 손짓했고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우리 위치가 여기. 서쪽 왕국으로 이동하면서 놈들의 거점지가 있다고 파악되는 곳 몇 군데만 확인하자.”
보물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우리가 있는 곳에 동그라미. 이어 히든 가든에서 알려 준 인간들의 거점지도 표시했고.
“지도 신뢰도가 떨어져. 거점지를 다 믿을 수는 없고 저번 침입자들이 들어온 곳이랑 겹치는 곳만.”
슥슥. 동그라미에 세모를 더했다.
거점지 위치와 침입 루트가 겹치는 곳. 상당수의 거점지가 목록에서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남은 곳은 고작해야 4개. 그중에서 서쪽 왕국을 가는 데 걸쳐 있는 건 2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왕국을 향하는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두 군데 확인하고 바로 왕국으로 가서 이 포스터의 정체를 알아보자고. 어쩌면 이게 중요한 정보일지도 모르니까.”
난 동의를 구하기 위해 녀석들을 바라봤고.
“하긴, 이 지도를 믿고 움직이기는 좀 그래.”
“맞는 게 없다구. 뭐가 됐든 가장 정보를 많이 모을 수 있는 곳은 왕국이야.”
핥짝이와 냥펀은 고개를 끄덕였다. 탈모맨은…….
“음, 중간에 새로 생긴 거점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쪽 라인으로 더 살펴보자. 지도상 야영지를 꾸릴 만한 곳이 몇 개 있어. 자세한 건 직접 지형을 봐야 알겠지만.”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짜 줬다.
역시 특임대.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굴러간다. 엘프들과 대화할 때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에에.”
보기 드물게 측은한 눈빛을 보낸 덕춘이가 탈모맨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여튼, 계획은 짰으니 움직일 일만 남았다.
* * *
황량한 공간.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도로는 엉망진창. 곳곳에 불탄 흔적이 남아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 한 남자가 숨을 헐떡였다.
“크흡. 후욱. 후우.”
거세게 뛰는 심장. 팔에 자상을 입어 피가 흘러내렸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가 없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둘러본다.
한때는 번성했을 게 분명한 곳. 파괴되었음에도 웅장함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은 그 혼자였다.
주변으로 쓰러진 이들만 여럿.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본 이가 숫자를 센다.
“…다섯, 여섯. 다, 다 죽었다. 다 죽었다고! 하하하하!”
시체의 숫자를 센 그가 목청껏 웃음을 터트렸다.
눈에 담긴 미약한 광기. 그런 그를 축하하듯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짝짝
“가치를 증명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기척 없이 모습을 드러낸 이가 남자를 향해 다가온다.
가면에 로브를 걸쳐 얼굴과 성별을 알 수 없는 존재.
남자가 순간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시.
“가, 감사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꼬깃꼬깃 접은 포스터를 펼쳐 그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