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임무를 받다
숙소 마당을 개조해 만들어진 연병장.
레인저와 타격대원들이 훈련을 한다. 교관은 말할 것도 없이 탈모맨.
“거기 2번! 발 뒤로 더 뺍니다. 5번은 아웃사이드 태클할 때 상대 발 안쪽에 팔 제대로 넣고요.”
역시 인간 병기.
타격이면 타격, 그래플링이면 그래플링. 나이프 파이팅부터 간단한 호신술까지.
도대체 특임대에서는 뭘 가르치는 걸까. 어디 종합격투기 체육관이라도 되는 건가. 보통 총 쏘고 그러지 않나?
뭐가 됐든 능력은 확실했다. 의외로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기도 하고.
엘프뿐만 아니라 드루이드 전사들도 찾아와 교육을 듣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야 씨, 이거 힘드네.”
“핥짝앙, 너 너무 커. 팔이 안 닿아.”
“아냐, 할 수 있어. 하려고 하면 다 돼!”
“…키는 안 커지는걸?”
핥짝이와 냥펀도 뒹굴고 있었고, 나 역시 드루이드 전사와 여러 기술을 주고받고 있었다.
드루이드 특유의 나무줄기같이 억센 근육.
피지컬이 대단해서 상대하는 맛이 있다.
나도 탑에 들어올 걸 대비해서 여러 체육관을 다녀 배운 게 있는데 이 녀석은 처음인데도 제법이다.
“다들 여기까지. 복습하시고 짝궁이랑 합도 맞혀 봐요, 알겠죠?”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지 탈모맨이 훈련을 종료한다.
오랜만에 실전이 아닌 훈련을 하니 기분이 색다르다. 실전도 좋지만 이렇게 차근차근 체득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파트너가 되어 준 드루이드와 인사를 나누고 약간의 휴식을 취한 다음, 핥짝이의 훈련 차례였다.
녀석이 담당한 교과는 기본 체력 단련.
잊고 있었지만 핥짝이 역시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다. 듣자 하니 양궁도 잠깐 했었다나.
“휴식 시간 지났다! 다들 일어서!”
탈모맨과는 다른 의미에서 스파르타 교육.
체계화된 훈련은 숲속에서 뛰어다니는 엘프와 드루이드라 할지라도 고역이었다.
나도 마찬가지. 초인이나 다를 바 없는 체력을 지니고 있건만…….
‘사람을 어떻게 조져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데?’
핥짝이는 훈련 강도를 높여 어떻게든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운동은 정신력 싸움! 승리하고자 하는 신념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특히 이곳은 전장이나 마찬가지. 포기하는 순간 죽는다고 생각해!”
“오오, 지당한 말씀. 군인 정신이 대단합니다!”
“군인은 콱 씨! 탈모는 대가리 박고 있어.”
“난 탈모 아니니까 안 해도… 이렇게 박으면 될까요?”
눈빛 한 번에 얌전히 머리를 박는 녀석.
그러게 왜 까부냐.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가뜩이나 제2 천계에서 나 때문에 입대해서 화난 애한테.
“공블, 아이. 나 죽을 거 같아. 살려, 줘.”
“넌 장신구 먼저 빼는 게 생명에 이롭지 않을까? 혼자 중량 치고 있는 거 같은데.”
“안, 돼. 내 생명을 지켜 주는 소중한 아이들이라구.”
지금은 네 목숨줄을 빼앗는 거 같다만.
바들바들 떨면서도 어떻게든 훈련을 따라오는 냥펀.
그래도 아이돌로 활동한 경력이 있어서 그런가 독기가 있다. 그쪽도 어지간한 오기로는 안 된다던데, 춤추면서 노래도 해야 하니 체력도 기본 이상일 거고.
몸에 주렁주렁 매단 장신구만 아니었어도 좀 편했을 거다. 절반이 금이잖아. 납보다 무겁다는 금.
알아서 잘하겠지. 쓰러지면 그때 생명수를 먹이든 하면 될 거다. 덕춘이가 핥아 줘도 되고.
“으어어어.”
“아고오오.”
“악독한, 인간들.”
“이건 사실 고문이 아닐까요?”
곡소리가 울려 퍼진다. 차라리 우리만 하면 뭐라 하겠는데 핥짝이 본인도 같이하고 있어서 할 말이 없다.
기피 훈련 1순위로 기초 체력 훈련이 자리 잡는 순간이었고.
“잠시, 자리 좀 만들어 주세요.”
어딜 갔다 왔는지 입술을 깨문 휘카가 다가와 핥짝이에게 속닥였다.
미간을 찌푸리는 녀석.
“다들 여기까지. 냥펀, 공블, 탈모 따라와. 일 생겼어.”
핥짝이의 훈련 종료 소식에 다들 환호하며 주저앉는다.
나와 멤버들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이동해야 했지만.
* * *
연병장을 빠져나와 숙소로 들어갔다. 미리 와 있었는지 미피가 서류를 세팅해 놨다.
땀을 훔치고 소파에 앉았다.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문을 잠근 휘카가 사일런스 스킬을 사용했다.
“무슨 일이길래 다들 표정이 안 좋아요?”
“후우, 이걸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내 물음에 휘카가 미간을 문질렀다.
모르긴 몰라도 좋은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우선 보고서 먼저 보시죠.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 따로 운영 중인 관측반에서 올린 보고입니다.”
서류를 넘겼다. 글만 있는 건 아니고 사진도 같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사망자? 최근인데?’
임무 중에 사망한 이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원이 아니더라도 신원 불명의 신체 일부가 있기도 했고.
엘프뿐만이 아니다. 드루이드 쪽에서 보내 온 보고도 있다. 양쪽 모두 시신이 발견됐다는 것.
서류를 후반부에는 최근 실종된 인원 목록이 나와 있었고, 몇 명은 옆에 사망 체크가 되어 있다.
“최근 실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확인 중이었습니다. 결과는 보다시피고요.”
“처음에는 살아남은 침입자들이 벌인 소행인 줄 알았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내가 봐도 그건 아닌 거 같다.
무기에 당한 상처가 아니다. 차라리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했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
무거운 뭔가에 짓눌리거나 졸린 흔적이 있다. 이건 타박상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리거나 베인 상처가 없다. 어디 풀이나 나뭇가지에 쓸린 생채기라면 모를까.
‘둔기나 로프를 사용했을 수도 있긴 한데. 10명 모두가 그렇게 당했다고 보기에는 좀 그렇지?’
굳이 둔기를 고집할 필요가 없으니까. 무기가 없어 돌을 사용했다 치자. 그걸로 레인저를 잡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기는 한데 어떻게 됐다 쳐도…….
‘왜 무기를 안 가져갔을까?’
돌멩이보다는 나을 텐데. 내용에 의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식량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아무리 숲에 침투하기 위해 훈련받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엘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숲에서 식량을 조달하기가 쉬울까?
“모두 숲 외각 쪽에서 벌어진 일들이에요. 저희는 외부에서 침입자들이 들어와 기습을 한 뒤 빠져나갔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외곽은 마경화됐잖아요.”
“맞아요. 하지만 비틀린 숲만큼은 아니죠.”
그것도 맞다. 비틀린 숲은 규모부터가 다르니까. 서식하고 있는 크리쳐도 훨씬 많고.
새로 만든 곳에서 크리쳐가 있기는 한데, 뚫으려고 작정하면 어떻게든 뚫지 않을까?
비틀린 숲도 결국에는 포기했지만 초입부는 돌파했었다.
멤버들도 머리를 긁적이며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일종의 보복인가?”
“그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어요.”
핥짝이의 말에 미피가 고개를 끄덕인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하다. 침입자 입장에서 히든 가든은 인류의 적이자 악이니까.
오케이, 대충 전후 사정은 알겠다.
중요한 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이유.
보아하니 아직 공식적으로 밝히지는 않은 거 같은데.
알렸다면 훈련을 받는 중에 건너 건너 들었을 거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만 계속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안 그래도 아직 세계숲 복구 및 체계 정리가 끝나지 않았어요.”
“요청할 게 있습니다.”
지금부터가 본론.
“엘프와 드루이드는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죠.”
“숲 밖에서는 전체적인 능력치가 떨어져요.”
그건 안다. 그래서 어지간한 엘프들은 비틀린 숲에 들어가지도 못하니까.
그나마 드루이드는 영향을 덜 받는 거 같았지만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세계숲 밖으로 나가 상황을 살펴 주실 수 있나요?”
“외형적으로도 저희보다는 자유로울 거라는 것이 위의 판단입니다.”
말하면서도 민망한지 미피가 시선을 피한다. 대놓고 인류를 뒤통수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따지고 보면 저번 침입을 막은 시점에서 배반자로 낙인찍혔지만 말이지.
휘카와 미피의 눈이 마주치더니 품에서 뭔가를 꺼낸다.
“단순히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에 마땅한 보답을 할 거예요.”
“세계수의 이파리입니다. 얻기 힘든 물건이지요.”
휘카가 내민 것은 세계수의 이파리.
“그 자체로 영험한 효과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양한 물약과 최상급 영약의 재료기도 하고, 그대로 섭취해도 스텟이 상승해요.”
“원하신다면 히든 가든의 비법으로 영약을 만들거나 필요한 것으로 가공해 드리죠. 거기에 하나 더.”
꿀꺽 침을 삼킨 휘카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세계수를 마주할 기회를 드릴까 합니다. 메디 장로님과 파르갈 장로님이 강력히 주장해서 얻어 낸 귀한 기회예요.”
“자격이 없다면 엘프라 하더라도 들어갈 수 없어요. 인간이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고요.”
“잠깐 질문.”
손을 들었다.
세계수가 이들에게 있어 귀한 건 알겠다. 이파리도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물건이고.
그런데 세계수를 보는 건 그다지 메리트가 없지 않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이미 세계수를 눈앞에서 보다 못해 키워 냈는데?
“세계수를 보면 어떤 장점이 있죠? 이쪽에 대해서는 저희는 아는 게 없어서요.”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죠! 세계수는 눈의 정령과 하나.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니까요.”
아, 그렇구나.
이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한테는 아니라서.
반응이 미적지근한 탓인지 미피가 눈치를 살피고는 속닥였다.
“신목의 축복과 더불어 자격이 있는 자들이 처음 방문했을 때 선물을 줍니다.”
진작에 그렇게 말을 하시지.
멤버들의 표정이 밝아진다. 특히 냥펀. 세속적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일을 하면 그에 마땅한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지.
봉사 활동이라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지 않은가.
‘잠깐만, 내가 세계수 퀘스트 깼을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설마 퀘스트 보상으로 퉁친 건가. 괜히 억울하네.
좋다. 엘프들이 있는 세계까지 왔는데 뭐라도 하나 얻어가야지.
‘사실 한 번쯤은 세계수를 가까이에서 봐 보고 싶었고 말이야.’
이번 시나리오 이름부터가 피로 물든 세계수 아니던가.
확인은 한번 해 봐야겠다. 그래야 멸망이 가속되는 사건을 막지.
난 오케이고, 다른 녀석들은 어떨까?
“세계수의 선물이라… 나 할래!”
“그러지 뭐.”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만 하세요!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가슴을 탕탕 치는 탈모맨.
한결같아서 참 좋아.
아무튼 의견은 통일된 거 같으니…….
“구체적인 임무와 일정, 바깥 정보. 필요한 장비들을 준비해 주시죠.”
“네! 미리 준비해 뒀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둘 다 표정이 밝아졌다.
준비도 다 해 놨었구나.
“이건 오래되기는 했지만 바깥 지도고, 인간들의 왕국이 있는 위치. 예전에 파악해 뒀던 인간들의 거점지도 표시해 놨고요. 히든 가든을 싹 뒤져서 인간들이 쓰는 화폐도 모아 왔어요.”
“지금 입고 있는 건 눈에 띄어서 저쪽 양식에 맞게 옷을 재단했어요. 사이즈 괜찮죠? 눈썰미 있다는 말은 종종 들었는데.”
이때다 싶었는지 준비한 물품을 설명하는 휘카와 미피.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다.
귀에서 피날 거 같아.
장장 2시간에 걸쳐 이어진 설명이 끝나고.
“그, 혹시 나가서 신기한 게 있으면 챙겨와 주실 수 있나요? 아무래도 히든 가든은 폐쇄된 곳이라 새로운 게 없어서.”
“인간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아! 여러분은 빼고요. 흠흠. 신기한 걸 많이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세계가 멸망해도 사람 사는 건 비슷한 거 같다.
눈 반짝이는 것 봐라. 하기야 생존만 생각하고 살면 사람이 병든다. 새로운 것도 좀 겪고 해야지.
“걱정 마시죠. 뭐라도 챙겨 올 테니.”
“아, 지금 하시는 건 극비라 나가는 길은 따로 준비해 뒀어요.”
휘카가 뒷문으로 안내했다.
오솔길 사이로 드루이드 한 명이 대기 중이었다.
그를 따라 이동.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를 피해 외곽으로 나왔다.
“전 여기까지입니다. 몸 성히 돌아오세요.”
안내자가 배웅해 준다.
현재 위치는 북쪽 숲.
히든 가든에서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는 조심스럽게 숲 밖으로 빠져나왔고.
“하이고.”
잠시 멈춰 얼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