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85화 (385/740)

385화 75층

세상이 멀어진다. 암전하는 공간. 시야가 멀어지며 전장의 열기도 흐려진다.

전투로 달아오른 몸만이 방금까지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뿐.

“이렇게 끝이 나네.”

“그엑.”

아무래도 대규모 침습이 이번 시나리오의 시발점인 거 같다.

그럴 거 같기는 하더라. 최근 침입자가 많아졌다는 말도 있었고, 드루이드와 힘을 합치려는 움직임도 있었으니까.

무사히 챕터가 끝난 거 보니까 멤버들도 침입자들을 잘 막아 낸 게 아닐까.

결과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세계수가 점령당하지는 않을 거다. 그랬다면 시나리오 이름이 이렇지는 않았겠지.

전송 대기실.

준비된 1인 소파에 앉아 빠르게 흘러가는 영상을 바라봤다.

세계숲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투. 엘프와 드루이드도 여럿 죽어 나갔고, 크리쳐 또한 무차별적인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게다가.

“와 씨, 서쪽으로도 들어오고 있었구나?”

드루이드의 마을이 있는 비틀린 숲에도 침입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쪽은 모르고 있었는데.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침입자들이 비틀린 숲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

내가 크리쳐들을 이끌고 가기는 했지만 모든 크리쳐를 데리고 간 건 아니다.

숲이 얼마나 넓은데 전부 데려갈까.

“괴목도 장난 없네.”

크리쳐도 크리쳐지만 정령이 깃든 괴목들도 강력했다.

스스로 움직여 숲의 모양을 바꾸는 건 물론이고, 뻗어 나온 덩굴과 뿌리로 침입자를 속박, 그대로 찢어 버렸다.

엄청난 괴력. 거대한 몸을 휘둘러 그대로 깔아뭉개기까지.

거기에 얼핏 들었던 주괴목은 한술 더 떴으니…….

“저거 주술이지? 마법인가?”

“그에에.”

드루이드를 심어 만들었다는 주괴목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주와 마법을 난발했다.

이러니까 그동안 침입자들이 비틀린 숲으로 안 들어왔지.

놈들도 여긴 아니다 싶었는지 후퇴했다.

-촤르르르륵

다시금 화면이 전환된다.

날이 밝고 지고, 달이 뜨고 가라앉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전투가 한두 번 일어난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침입자들 역시 총공세를 가하는지 나 때는 보지 못했던 마법 병기들도 등장.

골렘과 전차, 어떻게 길들였는지 알 수 없는 몬스터를 탄 라이더들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스스

이번에는 장로들의 모습.

엘프뿐만 아니라 드루이드 쪽 장로들도 한곳에 모였다. 그만큼 이번 일이 충격적이었다는 거겠지.

익숙한 얼굴도 보인다.

메디와 파르갈.

장로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비를 서고 있는 이들 중에도 아는 이도 있었으니.

기동 타격대장인 휘카와 잠깐 같이 싸웠던 레인저 대장 미피.

살아 있었구나. 하긴 둘 실력 정도면 살아남을 만하지.

소리는 들리지 않아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를 모르겠지만 표정이 나쁜 게 좋은 이야기는 아닌 거 같다.

시체를 수습하는 이들과 주술을 부리는 이들. 정령을 꼭 끌어 아는 이들.

아마 내 생각이 맞다면.

“마경을 만들기로 결정했나 보군.”

픽.

화면이 꺼졌다.

어두워진 공간.

[챕터Ⅰ- 눈의 정령의 아이들 클리어]

[세계수에 도달한 침입자 없음.]

[혼돈 수치 +6점]

원래는 침입자가 중심부까지 도달했던 걸까.

피해는 있지만 어떻게든 막아 낸 거 같다.

혼돈 수치도 얻었고.

[75층에 진입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 * *

익숙한 부유감을 느끼며 눈을 감은 것도 잠시.

“야야! 다들 멀쩡했구나!”

“살아 있었냐구!”

“그럼 죽겠냐? 쟤가? 내가 볼 땐 수치사하기 전까진 안 죽어.”

멤버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수치사는 너무한 거 아니냐. 이왕 죽는다면 좀 더 멀쩡한 이유로 죽고 싶다.

우리가 있는 곳은 엘프 마을에서 내준 숙소.

장소 자체는 바뀐 게 없는데.

“뭐가 좀 많다?”

먹을 거라든지 꽃장식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늘었다.

“과일 맛있드라, 먹을랭? 너 먹으라고 두리안 남겨둠.”

“…어, 고맙다.”

냥펀이 건넨 두리안을 집었다. 내가 아는 두리안이랑 생김새가 좀 다르긴 한데 냄새는 그게 맞다.

그냥 먹기 싫어서 남겨 둔 거 같은데.

“그에에.”

슬며시 덕춘이한테 넘기다가 맞을 거 같아서 도로 테이블에 올려놨다.

창문 밖을 바라보니 이쪽에도 사람들이 제법 돌아다닌다. 외곽 지역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집 근처에 있는 이들 모두 레인저나 기동 타격대라는 거?

보니까 마당도 다 엎어 놨네. 이게 마당이냐, 연병장이지.

[75층 진입]

[과거의 기억이 생성됩니다.]

찌릿.

두통이 찾아왔다. 챕터가 진행되며 흐른 시간만큼의 기억이 생성된 것.

내가 하지 않은 기억이 만들어진다는 건 여러 번 겪어도 낯설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좀 있는 거 같고.

‘대략 1년 좀 넘게 지난 건가?’

생각보다 많이 지났네. 저번 전투 끝나고 얼마 안 되는 시점에 떨어질 줄 알았더니만.

기억에 의하면 우린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제법 괜찮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일종의 영웅이라고 해야 하나. 거기에 원치는 않았지만 또 다른 이명이 생겨났으니.

“어이. 비틀린 숲의 망령 씨 아니야, 이거?”

“역시 공블아이야. 숨만 쉬어도 별명이 생겨!”

“크리쳐와 함께 나타나는 무지개 망령!”

“하지 마라.”

“흐즈므르.”

“에베베베.”

침입자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돌았는지 비틀린 숲의 망령이라는 이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아니, 여기 이상한 애들이 가득한데 왜 나한테만 이러냐고.

타이즈 학살가 탈모맨, 헬맷 팔척귀, 걸어 다니는 금광. 뭐 이런 것도 생길 수 있잖아.

됐다. 내가 크리쳐를 몰고 다녀서 그런 거지 뭐.

덕분에 침입자들을 무사히 물리쳤으니 좋게 생각하자.

“이번에 피해가 심하긴 했나 봐.”

“어, 파괴된 숲이 많아서 살 곳도 좀 줄었고.”

“인구도 줄어서 얼추 맞는 거 같기도 하구.”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던 만큼 피해도 막심했다.

세계수는 지켰으나 비틀린 숲을 제외한 숲의 5분의 1이 날아갔다고 해야 하나. 인구도 10퍼센트 이상 줄었다.

경각심이 커진 건 당연했고, 기어이 일을 저질렀으니.

“세계숲 외곽을 전부 마경화시킬 줄은 몰랐는데.”

“그럴 만하기는 해. 그때 같은 일이 또 일어나면 훨씬 큰 타격을 입을 테니까.”

사망자 대부분이 전투 인력. 보안에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마경의 능력이 증명됐으니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 이해는 된다.

죽은 사람이 많아서 마경을 만들 피도 충분했을 테고.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소리치자 휘카와 미피가 들어왔다.

그녀들 역시 공을 세운 건 매한가지. 지금은 각각 기동 타격대와 레인저의 최고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교육하러 가시죠.”

“이론 교육은 마쳤고, 대련과 전술 훈련만 하면 될 거예요.”

그동안 식객 느낌이던 우리에게도 역할이 주어졌다.

엘프 전사들을 훈련시키는 것.

이들도 깨달은 거다. 그동안 고착화된 전술과 전투 보직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는 걸.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 모두 훌륭했지만 카운터가 명확했으니까.

그때 만났던 중갑부대만 해도 그렇다.

“저한테 맡겨만 주세요! 하하!”

“부탁드릴게요.”

“다들 기대가 큽니다.”

벌떡 일어선 탈모맨이 친한 척을 한다. 예전에는 부담스러워했을 둘도 웃으며 받아 줬다.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전투 교육에 있어서는 탈모맨이 제격이라 고마운 마음도 있는 거 같다.

우리들은 경험적으로 전투 지식을 쌓은 데 반해 탈모맨은 특임대에서 활동하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으니까.

하는 짓은 얼빵해도 이쪽으로는 전문가다.

“어디 보자. 전술 전략은 산개, 합류, 기동, 타격순으로 연습하고 그다음은 그래플링 능력을 키우죠.”

“그래플링이요?”

“레슬링 같은 거요. 이게 또, 무기 없을 때는 잘 써먹는 거라. 보니까 레인저 상대로 근접 유도하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레슬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할게요.”

신나서 떠들어 대는 탈모맨.

항상 응원한다, 파이팅.

나는 측은한 눈빛으로 탈모맨을 바라봤고, 냥펀과 핥짝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게흐으.”

덕춘이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세계숲 외곽.

대규모 침입이 발생한 지 1년. 수많은 일이 있었고 복구 사업도 어느 정도 끝난 타이밍.

숲의 구역을 새로 구축하고 수색 경로도 다시 설정하는 등, 레인저의 임무는 많았다.

게다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잔당들을 처치하기까지.

외곽을 마경화한 이후로 잔당을 제외한 추가적인 침입자는 없었지만, 당시의 트라우마는 강력했고 레인저들은 긴장감을 놓지 않았다.

“동부 8번 구역까지 측정 완료했어요.”

“아, 저쪽까지군요. 확실히 예전보다 구역이 줄었네요.”

“공간은 줄었지만 활동 범위는 비슷할 거예요. 인원이 줄다 보니 아무래도.”

레인저 부대도 새롭게 개편된 상황.

5명이 짝을 이루어 숲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죠.”

“으아, 좀 살겠네요.”

업무가 많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든 건 당연.

휴식 제안에 경계를 서는 이들을 제외한 인원들이 자리에 앉았다.

순차적으로 교대하며 쉬려는 요량.

거의 눕다시피 앉은 레인저 한 명이 허리춤에 매단 가방을 열었다.

주먹밥과 물, 과일을 말려 설탕을 뿌린 과자도 함께 나왔다.

다른 엘프들의 눈이 반짝인다.

힘이 빠질 때 달콤한 것만큼 반가운 게 없는 법.

“히히. 따로 챙겨왔어요. 같이 먹어요.”

“잘 먹을게요!”

“으음! 달다. 고마워요. 들키면 안 되니까 전 한 바퀴 돌고 올게요.”

경계를 서는 이들에게도 하나씩 입에 넣어 주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이런 사소한 행복이야말로 험난한 인생의 활력소가 아닐까.

그녀의 호의에 경계를 서던 레인저 한 명도 망을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임무 중 간식을 먹으며 놀다 걸리면 징계를 먹을 수 있어서.

조금은 편해진 이들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폐쇄된 곳인 만큼 놀거리는 한정되어 있다. 이럴 때 할 거라고는 온갖 소문을 가지고 떠드는 것이 전부.

누구와 누가 만난다는 이야기부터, 최근 드루이드 마을과 교류가 늘어나며 생긴 에피소드, 거주 지역에 사는 인간들에 대한 것까지.

한참을 웃다 서먹해지는 타이밍, 과자를 꺼냈던 레인저가 슬며시 몸을 기울였다.

자신도 모르게 집중하는 이들.

“그거 알아요? 최근에 실종자들 생기고 있는 거?”

“실종이라면… 어? 저도 들어 본 거 같아요.”

“아직 공식적으로 말은 없던 거 같던데요. 소문 아닌가요?”

1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실종자를 모두 찾지 못했다.

지금도 많지는 않지만, 당시 사라졌던 이들이 돌아오기도 했고.

어디에 깔렸거나 부상을 입어 회복을 하다 늦게 합류한 이들도 있었다.

마경이 만들어지며 숲이 변화해 길을 잃은 이도 있었고.

과자를 꺼낸 레인저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소문 아니에요. 멜리 알죠? 얼굴을 봤을 거예요. 귀에 점 3개 있는 애.”

“아, 알아요. 예전에 채집할 때 봤어요.”

“그 친구는 기동 타격대 소속 아닌가요?”

“맞아요. 제가 사는 곳 근처에 사는 애라 종종 인사하고 그랬는데 4일 전부터 보이지 않아요.”

“어디 출동한 건 아니고요? 기동 타격 내에서도 일이 많잖아요.”

“우리도 집에 못 돌아간 지 일주일은 됐고요.”

“맞아요. 진짜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씻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워낙 밖에 있는 시간이 많은 게 레인저와 타격대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진지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었으니.

“최근 죽어서 발견됐어요. 드루이드 마을로 보내진 걸 본 친구가 있어요.”

“설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레인저 한 명이 몸을 뒤로 빼는 찰나.

“저기, 아무래도 그만 일어나야 할 거 같네요.”

망을 본다고 자리에서 벗어났던 레인저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한 손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다리를 든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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