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74층 클리어
처음 써 보는 이세계 스킬. 검강.
검을 휘두른 방향이 깨끗해졌다.
호기롭게 소리치던 이의 목이 날아갔고, 그를 따라 흉흉한 눈빛을 내뿜던 이들의 역시 머리가 날아갔다.
한 번의 검격으로 이루어 냈다고 믿기 힘든 풍경.
-촤아아아아
그러나 잘린 목에서 쏟아지는 피는 이게 현실이라 말하고 있었다.
한 박자 늦게 머리를 잃은 몸이 바닥에 쓰러졌고.
“지금이다, 반격해!”
“저놈들을 무찔러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인저와 기동 타격대가 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이없게 우두머리를 잃은 탓일까, 놈들의 기세가 죽었지만 정신 놓고 있으면 진짜 죽는다는 현실에 악을 쓰고 저항해 왔다.
눈썹을 올렸다.
처음 써 보는 이세계 스킬.
손끝에 남은 감각이 색다르다.
간질거리면서도 호쾌한, 섬세함을 넘어 당연히 그러하다는 확신이 담긴 일격이라고 해야 하나.
작게 머리를 흔들었다.
“무한정으로 쓰기는 힘들겠다.”
방금 써 보고 확신했다.
검강은 내부의 기운을 이용하는 스킬. 무협으로 따지면 내공이고, 헌터로 따지면 마력.
거기에 일정 수준 이상 검에 대한 이해도와 검술 실력이 있어야 했으며, 칼날을 만든다는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했다.
마력과 심력 모두 소모된다는 말.
그나마 나는 남들보다 월등히 마력이 많은 데다가 정신 보호 스킬도 있는 만큼 크게 문제가 될 거 같지는 않다.
게다가…….
“이거 마력 아니어도 될 거 같지?”
“그에에.”
스킬 설명에도 나와 있듯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면 발동 조건을 만족하는 거 같다.
시험 삼아 신성력을 불어 넣자.
-우우우우웅
아까와 달리 새하얀 검강이 치솟았다.
이전에는 러브 앤 피스로 신성력을 불어 넣었어야 했는데 이제는 무기에 한정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좋지. 익숙해지기만 하면 징조 없이 바로 발현시킬 수 있는데.
상대의 특성에 따라 그에 맞는 기운을 집어넣을 수도 있고.
“좋네.”
입꼬리가 올라간다. 카르카 녀석 서비스치고 좋은 걸 줬네.
이세계 스킬 특성상 등급도 없고 레벨도 없다. 따로 성장시킬 필요도 없다는 것.
이번 기회에 익숙해져야겠다. 앞으로도 사용할 일이 많을 테니.
“크르르르르.”
“그래그래. 내가 잠깐 쉬었지? 계속하자고.”
목덜미를 쓸어 주며 땡칠이를 달랬다.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크리쳐까지 된 존재. 눈앞의 적들을 도륙하지 않고는 못 배길 테니까.
타이밍도 좋지. 나도 놈들한테 볼일이 있는데.
비록 땡칠이와는 정신이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녀석이 놈들을 물어뜯을 때 난 광선을 내뿜으며 검을 휘둘렀고, 우리를 피해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푸슉!
-파아아악!
레인저가 쏜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원거리 지원이 들어오니 훨씬 싸우기 편하다.
그뿐일까.
“저쪽에도 있어요, 이블아이.”
“부탁드립니다.”
내 정체를 알아챈 이들이 적극적으로 협력해 왔다.
레인저와 달리 검을 들고 있는 기동 타격대.
푸른색이던 옷은 붉게 물들었고 얼굴에도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먼저 적들의 위치를 파악해 소규모 교전을 치르고 내게 알려 주고 있다.
-콰앙!
땡칠이가 망설임 없이 발을 박찬다.
우리의 속도에 맞춰 달리는 기동 타격대원들.
아까보다 숫자가 줄었다. 놈들에게 당한 건가. 3명은 적어졌는데, 지금 있는 이들도 상처가 제법 있고.
“강한 놈이 섞여 있어요. 붙잡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식으로 싸우길래요?”
“단단해요.”
활이 안 통한다는 이야기다.
그럼 곤란하지. 기동 타격대를 제외하면 엘프 대부분이 활로 공격하는데.
침입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엘프를 상대할 방법을 다 연구했을 거다.
자신이 있으니까 이렇게 대대적인 공격을 한 걸 거고.
“저기군. 뒤에서 지원해 줘요.”
“네.”
옆에서 달리던 대원들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괜히 옆에서 통하지도 않는 공격을 해 봤자 방해가 될 뿐이니까.
“아하하하하! 발악해 보아라!”
덩치가 제법 커다란 녀석이 호탕하게 웃으며 엘프들을 도발하고 있다.
온몸을 감싼 두툼한 갑주. 순간 골렘인 줄 알았을 정도다.
단순한 장비는 아닌 거 같고.
[철갑 (S) Lv.10]
[S급 권능, 수호자가 의지를 불태웁니다.]
스킬과 권능이 함께 섞여 있는 거 같다.
그를 따르는 부하들 역시 중장비로 무장한 상태. 타워 실드까지 가지고 왔다.
체력도 좋아. 정글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저런 무장을 하다니.
진군하다 탈진이나 안 할까 모르겠다.
내가 걱정할 건 아니지만.
“크하아아아앙!”
땡칠이가 포효하며 돌진했다.
놈들이 방어구로 도배했다지만 단순 물리력으로는 땡칠이가 앞선다.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육중한 무게.
-콰드드득!
몸으로 깔아뭉개다시피 방패병을 들이박았다.
그들 또한 창과 검을 내질러 저항했으나.
-치이이익
-꾸드드득
비틀린 크리쳐의 앞에서는 소용없었다.
갈라진 근육이 뒤엉키며 재생한다. 몸에 꽂힌 창을 집어삼키며 증식한 살과 근육이 부풀고.
“크하아아아앙!”
이내 방패까지 몸에 집어넣어 더욱 덩치를 불린 땡칠이가 쇳덩이 채로 적을 집어삼켰다.
몸이 이상할 정도로 크고 꼬여 있다 했더니만 이런 식으로 커진 거였나.
칼이 박히면 아프다고 뒹굴기 마련인데 크리쳐들은 어떤 식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던 건지…….
“덕춘아, 보여 주자.”
“그에엑.”
놈들에게 화살은 안 통할지 몰라도 다른 건 통할 거다.
예로 들어.
“퉷!”
-치이이이익!
“으아아아! 젠장, 타들어 간다!”
“갑옷 안에 들어가지 않게 막아!”
“끄으으윽.”
덕춘이가 뱉은 산성침이 갑옷 안으로 들어가 놈들의 몸을 녹였다.
아무리 잘 만든 갑옷이라도 빈틈이 아예 없을 수는 없는 법.
열심히 팔다리를 휘저어 보지만 비상식적으로 두껍게 만든 갑옷은 가동 범위를 제약했고 결국에는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팔이 닿았어도 갑옷을 벗을 수는 없었겠지.
‘독한 놈들, 갑옷 이음새를 용접해 버렸어.’
갑옷을 벗지 못하도록. 죽더라도 하나의 장애물이 되도록.
사생결단을 내러 왔다는 건가. 세계수를 장악할 때까지 갑옷을 벗지 않겠다는 거다.
본인의 의지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지만.
-푸국
검을 찔러 넣어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의 숨통을 끊어 줬다.
“허허, 재밌는 개구리로고. 과연 비틀린 숲에서 온 괴물들이라는 건가.”
“덕춘이는 영물이다, 자식아.”
누구보고 괴물이라는 거야.
말보다는 행동으로.
검강을 두른 채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아앙!
어마어마한 절삭력을 지닌 검강이었으나 놈도 만만치 않았다.
골렘이나 다를 바 없는 갑주로 검을 막아 낸 녀석이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브레힐이다. 설마 귀쟁이 놈들한테 붙은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군. 동족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부끄럼도 없는 녀석이구나.”
“언제부터 사람끼리 사이좋게 지냈다고. 전쟁 나면 서로 죽이기 바쁜 게 사람인데.”
“하하하하! 그것도 맞지! 상황이 이러지 않았다면!”
-파앙!
신나게 웃은 브레힐이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반발력에 튕겨 나가는 검.
정신 나간 녀석. 저 덩치와 무게로 이 정도 속도를 낸다?
괴력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스킬과 권능의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쉽게 볼 놈은 아니다.
힐끗, 놈의 팔뚝을 살피니 갈려 나갔던 갑주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
자체 수복도 되는군.
물론 그냥 되는 건 아닐 거다. 마력을 쓰든 하겠지.
“으랴차!”
-콰아아앙!
앞으로 어깨를 내민 녀석이 말 같지도 않은 속도로 몸통박치기를 해 왔다.
차징.
“크하아앙!”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땡칠이가 밀려났다.
이어 놈이 등에 메고 있던 워해머를 들어 바닥을 내려쳤으니.
-쿠과과과과광!
대지가 폭발하듯 들썩였다.
파편이 비수가 되어 사방을 찌른다.
저런 식으로 하면 아군도 공격 범위에 들겠지만.
-티디디딩!
-태애앵!
그의 부하들도 단단히 방어구를 갖춘 상태.
기동력을 위해 장비가 가벼운 엘프들만 피해를 입었다.
땡칠이와 주변에 있던 크리쳐들이 몸으로 엘프들을 보호했다.
“하하하하! 어떠냐! 네놈들 따위는 내 몸에 손 하나 못 댄다!”
“브레힐 님을 따르자!”
“쫄릴 거 없다고!”
브레힐의 활약에 기세가 오른 놈들이 소리를 질러 댄다.
전투에서 사기가 높은 쪽이 유리한 게 사실.
자신감을 얻은 놈들이 공격해 온다.
“쏴!”
“틈을 노려!”
레인저들 역시 어떻게든 저지하려 했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풀쩍, 땡칠이 위에서 내려섰다.
“애들 좀 지키고 있어 줘.”
“크헝.”
엘프는 크리쳐한테 맡기도록 하고 난 저놈 모가지나 썰어야겠다.
빙글. 검을 돌렸다.
“준비 많이 했네.”
“이때를 위해 많은 준비가 있었다, 인류의 배반자.”
누구보고 배반자래. 이쪽 세계 사람도 아니구먼.
픽, 웃어 보이며 자세를 잡았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전장의 소리가 한 발자국 멀어지며 눈앞의 녀석에게 신경이 쏠린다.
집중 상태.
놈 또한 워해머를 쥐며 안광을 빛냈고.
-콰앙!
-쿵!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앞으로 손을 뻗었다.
[파이어 밤 (S) Lv.10]
-콰아아아앙!
붉은 화염이 놈을 덮친다.
후웅. 워해머를 휘둘러 불길을 흩어 내는 녀석.
“갑옷을 달궈 익혀 죽이려고? 그따위 수법은 통하지 않아!”
“아, 그래?”
아쉽네.
그런데 그거 아나?
“처음부터 그걸로 끝낼 생각은 없었어.”
[외톨이의 길 (A) Lv.8]
[심연의 눈동자 (AAA) Lv.2]
[집착하는 망령 (S) Lv.1]
은신으로 놈의 눈을 속이며 속박기.
허공이 갈라지며 드러난 눈동자가 놈의 정신을 압박하고 망령이 몸을 옥죈다.
사선으로 지나가며 휘두른 검.
가볍지만 빠르게.
검강을 두르자 순간적으로 검날이 길어졌고.
[영혼 찢기 (S) Lv.10]
-찌이이이익
검이 놈의 갑옷을 통과해 놈의 목을 그었다.
영혼이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풀려 버린 눈.
쿵.
통제를 잃은 두 다리가 무릎을 꿇었고.
-푹
난 갑옷의 빈틈으로 검을 찔러 넣어 확실히 목숨을 끊었다.
방어력이 높으면 뭐 해. 무시하면 그만인데.
“이게, 무슨.”
“브레힐 님?”
대단한 수 싸움도, 박진감 넘치는 전투도 없었다.
한 번의 칼질로 끝나 버린 결투.
허무함을 넘어 인지 부조화를 일으키는 결과에 방패병들의 몸이 굳었고.
“…악령이다. 비틀린 숲의 악령이야!”
“이건 말도 안 돼. 도, 도망쳐!”
이내 혼비백산 도주하려 했지만.
“궤?”
-까아아아앙!
그럴 수는 없었다.
언제 달라붙었는지 방패병의 어깨에 올라간 덕춘이가 그대로 뺨을 때린다.
투구가 우그러지며 목이 돌아간 병사.
이어 나 역시 놈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고.
“지금이다! 도와!”
“활 말고 검으로 찔러라! 돌이라도 내려쳐!”
엘프들 또한 나를 도와 놈들을 제압했다.
크리쳐들도 마찬가지. 몸으로 짓누르고 발로 차고 물어뜯으며 피의 보복을 했다.
몇몇 도주한 놈들이 있는 것 같지만 내버려 뒀다.
저 한두 명 잡으러 가는 것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게 나으니까.
“후우.”
작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일대 나무가 많이 부러져서 그런가 나뭇잎에 가려졌던 하늘이 보인다.
숲 위로 피어오르는 수많은 연기.
탈모맨이랑 냥펀, 핥짝이는 잘하고 있으려나.
보니까 위험한 놈들도 몇 섞여 있는 거 같던데.
잘하겠지. 녀석들을 안 믿으면 누굴 믿을까.
-투둑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잡생각 할 시간에 한 명이라도 더 잡자. 그게 피해를 줄이는 길이다.
“다른 쪽으로 갑시, 아.”
엘프들에게 몸을 돌리는 순간 세상이 암전됐다.
익숙한 광경.
[74층 클리어]
[챕터Ⅰ 종료]
첫 번째 챕터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