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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383화 (383/740)

383화 이세계 스킬

창고 밖. 작업을 끝마치고 나왔다.

말 그대로 필요한 건 피뿐이었던 거 같다. 시체는 따로 모아 태워 버렸으니.

용무를 끝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뭐가 더 남은 거 같다.

시체를 가지고 왔던 타격대 대원들은 먼저 떠났다. 가지고 왔던 짐 대부분은 드루이드 마을에 주는 보급품이었던 건지 짐을 놔두고 곧장 엘프 마을로 돌아간다고 했다.

남은 건 나와 멤버들, 장로인 메디와 파르갈.

휘카는 대원들을 이끌고 갔다.

“마경을 더 만들겠다 했소?”

“예. 침입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점점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건 물론이고 저희 쪽 피해도 상당합니다.”

“그건 알지. 최근 들어 작업을 많이 했으니까.”

이게 본론인 거 같다. 마경을 추가로 만드는 것.

드루이드가 있는 서쪽 숲처럼 바꾸겠다는 건가.

“비틀린 숲이 만들어진 후 이곳을 통과한 침입자는 아직까지 한 명도 없죠. 인간들의 왕국도 감히 넘어올 생각을 못 하고요.”

“그쪽 사람들을 본 지도 오래됐소. 10년 좀 넘은 거 같군. 우리도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잠깐만…….

“10년이요?”

“아, 자네들은 나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낯설겠군.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지만 태어난 왕국은 모두 사라졌을걸세.”

애초에 이쪽 사람이 아니니까 왕국이 사라졌든 제국이 사라졌든 관심 없다.

10년이라는 시간에 관심이 있지.

“멸망의 과도기에 넘어선 지 얼마나 됐습니까?”

“글세, 학자마다 그 시기를 다르게 봐서 명확한 건 없네만 대략 25년에서 30년은 됐겠지.”

“서쪽에 살아남은 인간들이 만든 왕국이 세워진 게 15년 전쯤이었죠.”

“히든 가든이 만들어진 것도 그때이지.”

멸망의 과도기로 접어든 지 길면 30년.

냥펀을 바라봤다. 녀석이라면 알 거다. 멸망에 접어들고 나서 30년이 지난 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지.

‘제2 천계도 그 난리가 나는 데 20년밖에 안 걸렸지.’

20년이 길다면 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는 데 걸렸다고 생각하면 결코 길지 않다.

이곳은 무려 30년가량이 지난 상태. 밖과 단절된 지는 15년이 넘었다.

숲 밖으로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개판이 되어 있을 건 분명했다.

이제야 침입자들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지가 와닿았다. 나라도 그러겠다.

옛날이야기에 입이 트인 걸까, 파르갈이 몇 가지 정보를 더 내놓았다.

“예전 기준이기는 하네만 안전지대라고 불리던 지역이 몇 개 있었지. 서쪽의 인간 왕국, 북부에 있는 영원 호수.”

“그것도 20년이 넘은 이야기네요. 히든 가든이 만들어진 이후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니.”

“우리가 힘을 쓸 수 있는 곳은 숲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오, 허허.”

수명이 길어서 그런가 이 양반들은 그냥 웃으면서 말하네.

인간으로 치면 20대가 50살이 될까 말까 할 정도의 시간인데.

“아무튼, 메디. 세계숲 외곽을 마경화 하자는 건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르오. 만드는 데만 많은 희생을 요구할 테니 말이오.”

“상처가 썩으면 고통을 감내해서라도 도려내야죠.”

메디의 눈이 번뜩인다.

평소에는 얌전한 성격인데 이럴 때 보면 또 강단 있다.

메디가 왔다는 건 사실상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났다는 것.

파르갈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기에 턱을 쓸어내렸고.

“마경의 핵심은 크리쳐와 괴목. 메디도 잘 알 테지요? 괴목은 아무 데서나 자라지 않소. 중심이 되는 주괴목이 필요하지. 주괴목을 만들려면…….”

“드루이드가 희생되어야 하고요.”

“우리의 희생을 생각해 달란 뜻이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용이 괴상해진다.

그냥 정령 깃든 나무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런 환경을 만들려면 드루이드를 괴목으로 만들어야 한단다.

그만큼 세계수와 삶의 터전을 지키는 데 진심이라는 거겠지만.

“내가 독단으로 정할 문제는 아니오. 동의를 얻어야 하고 지원자도 찾아야 하니까.”

“진행된다면 정령은 우리가 준비할 생각입니다. 모든 짊을 떠넘길 수는 없으니까요.”

“부디 상황을 지켜보며 현명한 선택을 하길 빌겠소. 가능한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테니…….”

-삐이이이이익!

파르갈이 말을 마치기도 전,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렸다.

들려온 방향은 엘프들이 있는 곳. 얼마 전에도 들었던 소리다.

-삑! 삐이이익! 삑!

게다가 이어서 메시지를 담은 듯한 피리 소리가 함께 들렸으니.

“지원 요청이로군.”

“침입자들이 또!”

“먼저 가시게. 난 전사들을 이끌고 따라갈 터이니!”

아무래도 이번에는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메디가 가장 먼저 날렵하게 달려나갔다. 우리도 따라가기는 해야 하는데…….

“저희는 드루이드랑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냥 가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있어서.

내 외침에 메디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이고 숲으로 사라졌다.

“따라가지 않고 우리랑?”

“아, 가긴 갈 건데 이왕이면 전력 증강해서 가는 게 낫잖아요.”

파르갈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너?”

눈치 빠른 핥짝이는 대충 알아차린 거 같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대대적인 침투.

근래에 없었던 규모의 침입자가 몰려왔다.

그동안 안으로 들어온 이들이 여럿 있었지만 기껏해야 대여섯 명 정도.

엘프들의 눈을 피해 숲 내부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었다. 최근에 잡았던 놈들도 마찬가지.

세계숲은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 규모도 방대했으니 개척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물며 숲을 지키는 레인저가 수시로 돌아다니니 오죽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왼쪽! 게릴라전을 유도하고 있어!”

“인간 주제에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방심하지 마. 2개 조로 나뉘어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엘프와 드루이드의 입장에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 몰라도 인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많은 시간이 흘렀다.

숲 중간 지대까지 들어온 게 고작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콰직!

나무 위로 올라가 적들을 살피던 레인저의 머리에 도끼가 날아와 박혔다.

그대로 사망.

“렌!”

죽은 레인저가 땅에 떨어지고, 동료들의 시선이 흐트러지는 순간 매복해 있던 침입자들이 기습을 했다.

수명이 긴 만큼 서로에 대한 유대감도 깊은 이들. 동료의 죽음에 유독 많이 흔들리는 것을 이용한 수법이었고.

“죽여! 죽이지 못할 거면 팔다리라도 날려!”

“가능한 입을 열어 놔라. 그래야 녀석들이 혼란스러워질 테니.”

-푸욱!

-촤아아아악!

침입자들은 망설임 없이 무기를 휘둘렀다.

그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화살.

공격당한 이들이 지르는 비명.

얼굴 가득 다급함과 긴장감, 초조함이 가득했으며…….

“그만하고 달려! 달리라고!”

“긴장 놓지 마라.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 생각해.”

“뒷일은 뒤에 맡겨.”

확인 사살을 하지도 않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따로 목적이 있는 거 같은데.

-두두두두두두두두!

-크르르르!

-구구구구구궁!

그게 뭐든 이루지는 못할 거다.

내가 왔으니까.

“뭐, 뭐야!”

“저건?”

“제기랄 도망쳐! 이런 말은 없었잖아!”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

어지럽게 찍히는 발자국.

난 작게 혀를 찼다.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그에에에.”

어쩔 수 없다. 죽은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나름 신경 써서 온 거라.

“그치, 땡칠아?”

“크하아아앙!”

날 태운 땡칠이가 크게 울부짖었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공블아이! 이거 맞아? 맞냐구!”

“왜? 난 재밌는데!”

“나쁘지 않네. 이게 그건가, 비스트 라이더?”

냥펀과 탈모맨, 핥짝이 역시 각기 다른 크리쳐를 타고 질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거부하더니 나의 부탁과 덕춘이의 서열 정리로 인해 우리를 태워 주게 됐다.

그 뒤로 몰려온 크리쳐가 수십 마리.

엘프들을 돕기 위해 몰려온 드루이드 전사도 상당하다.

다만 대규모 침입이라는 말에 걸맞게 다양한 구역에서 침입자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콰아아아악!

-콰직!

검을 휘둘러 침입자의 몸을 두 동강 냈다.

땡칠이 역시 아가리로 놈들을 물어뜯었고.

“이쪽은 내가 맡을 게! 다른 쪽 도와줘!”

“오케이!”

“난 동쪽!”

“동남 쪽으로 갈게.”

내 외침에 멤버들이 방향을 틀었다.

이쯤에서 흩어지는 게 좋다. 도움이 필요한 곳은 많으니까.

것보다.

“땡칠이가 커서 그런가, 검으로 하니까 짧네.”

말을 타고 있으면 모를까 괴수나 다를 바 없는 사이즈의 땡칠이를 타고 검을 휘두르자니 이쑤시개로 찌르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뭐…….

“상황에 맞춰서 하는 수밖에.”

저 멀리 도망치는 놈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오로라 빔 (S) Lv.10]

-찌유우우우웅!

단말마 비명과 함께 허벅지에 관통상을 당한 녀석.

살짝 아쉽다. 기동력에 자신 있던 놈인지 어떻게든 정통으로 맞는 건 피해 내서.

그래도 뭐, 저 정도면 충분하다.

“키하아아악!”

“케르르르륵!”

두 다리가 멀쩡하지 않은 이상 크리쳐를 따돌리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마 멀쩡했어도 잡혔을 거다.

“저, 저리 가! 으아아아!”

뼈와 살이 씹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다음은 어디냐. 어차피 적은 많다.

지금도 사방에서 비명과 고함, 폭발음이 들리고 있으니까.

“가자.”

“크릉!”

툭, 목덜미를 두드리자 땡칠이가 빠르게 내달린다.

늑대가 베이스라 그런가 냄새도 잘 맞고 움직임도 빠르고.

쏜살같이 내달린다. 다른 레인저들이 흠칫 놀랄 정도.

커다란 덩치로 어지럽게 자라난 나무를 피해 잘도 움직이다.

비틀린 숲에 비하면 이곳은 편하다는 거겠지.

“저기 지원군이다!”

“크리쳐? 드루이드가 도우러 왔다!”

“아닌데, 저건 인간 아니야?”

“그렇긴 한데.”

한창 싸우던 이들의 의문 섞인 목소리.

그럴 시간에 적이라도 한 명 더 없애지.

됐다. 보아하니 밀리고 있는 거 같은데 반가울 수도 있지.

차분한 눈으로 전장을 살폈다.

내가 있는 곳은 숲 외곽에 가까운 곳.

‘아까 놈들이랑은 분위기가 다르군.’

맨 처음 상대한 놈들이 가벼운 복장으로 파고드는 데 집중했다면 이놈들은 중무장 상태다.

선두로 진입한 이들이 혼란을 일으킬 때를 노려 확실히 진격하겠다는 거지.

나름 자신 있는지 크리쳐를 보고도 표정 하나 안 변한다.

“1조 레인저 처치. 나머지는 나를 따른다. 저놈 먼저 죽여. 크리쳐 위에 탄 놈이 우두머리다.”

“알겠습니다!”

“예!”

대장으로 보이는 거한의 지시에 침입자들이 산개한다.

영광이네. 날 우두머리로 다 봐주고.

나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줘야겠지?

-스릉

검을 수평으로 들었다.

땡칠이의 덩치 때문에 놈에게 닿을 리 없는 검이었지만.

-우우우우우웅!

이렇게 하면 말이 달라지지.

마력이 팔을 타고 검으로 향한다.

거세게 요동치며 혼돈검이 울었고.

-파아아아아앗!

이내 마력이 구체화되어 검을 뒤덮었다.

쭉 뻗어 자라난 마력의 검날이 2미터가량.

차원 상점에서 업보 청산을 살 때 카르카에게 서비스로 받은 이세계 스킬북.

그걸로 배운 스킬이 바로.

[검강]

-확고한 의지와 신념은 쇠보다 단단하리라.

-베고자 하는 마음은 무엇보다 날카로우리라.

-내부의 기운으로 만든 칼날을 덧씌우라.

마력을 담아 푸르게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당연히 그렇게 되리라는 운명처럼.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빛납니다!]

-푸슉

-촤아아아아아악!

허공 위로 수많은 머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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