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82화 (382/740)

382화 괴목

히든 가든. 엘프와 함께 집단을 이루는 종족이 드루이드다.

서로 성향도 다르고 멸망한 세계에 적응한 방법도 달라 직접적인 교류는 많지 않은 거 같지만 세계숲에서 함께 살아가는 건 분명한 사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비틀린 숲의 이미지가 워낙 살벌해서. 뭐, 어디까지나 초반에만 그랬지만.

“헥헥헥헥.”

“태우고 오느라 고생했다, 땡칠아.”

“컹!”

머리를 쓰다듬자 좋다고 짖는 녀석.

조만간 배도 까지 않을까.

더 가관인 것은…….

“끼이이! 끽!”

“우우우우우!”

“크르르르르라!”

부럽다고 성을 내는 다른 크리쳐들.

이동하는 중에 한두 마리씩 따라오더니만 지금은 이십 마리가 넘게 몰렸다.

칭호 효과가 대단하기는 해.

겉모습은 이렇지만 내부에는 정령이 들어가 있다. 정령이라는 것이 워낙 살갑게 다가오는 탓도 있고.

문제는…….

“얘들아, 비좁다. 좀 가라.”

우르르 몰려온 탓에 드루이드의 마을에 비상이 걸렸다는 것.

나 같아도 이러면 경계부터 하겠다.

비틀린 크리쳐는 숲을 보호하는 존재. 드루이드 역시 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던데 그래도 신경은 쓰이겠지.

당장 앞에 있는 드루이드 전사도 무기를 겨누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

“크리쳐들이 한곳에 모이는 경우는 잘 없는데.”

“엘프들이야 그렇다 치자고 정령과 가까우니까. 하지만 인간은 아니잖아.”

“허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만.”

뭘 어떻게 해.

그냥 놀러 온 것도 아니고 우리도 용무가 있어서 온 거다.

서로 할 일 하면 그만이라는 것.

나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여기서부터는 메디가 나서야지.

눈짓을 하자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메디가 헛기침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아, 메디. 온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오.”

장로가 직접 온 만큼 드루이드 무리에서도 직책이 있는 자가 나섰다.

척 보기에도 남들과 다른 옷차림.

뭐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망토를 두르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마법사? 주술사에 좀 더 가까워 보이는 이미지다.

“파르갈 장로님도 잘 계셨나요?”

“허허, 늙은이야 매일 똑같지.”

나무껍질이 갈라지듯 주름이 파인 파르갈이 허허 웃는다.

성격 좋아 보이네. 식물의 특성이 섞인 게 드루이드라 그런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다.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많겠지. 엘프도 그렇지만 드루이드도 수명이 상당히 길다고 하니까.

‘생각해 보면 다 수명이 기네.’

천족도 그렇고 마족도 그렇고, 드워프도 인간보다는 훨씬 오래 산다.

사람도 각성하면 노화가 느려진다는 연구가 있기는 한데, 세상이 개판 된 지 10년 좀 지난 상태라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수명이 뭐가 중요할까.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지.

나도 제법 떳떳하고 괜찮은 삶을…….

‘산 거 같은데 왜 입 밖으로 말하기가 힘들지.’

머리를 스쳐 지가는 닉네임과 쁘찡 연합, 무지개 용사.

시선을 돌리자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이 보인다.

그냥 입 다물고 있자.

“크리쳐들이 이렇게 모인 건 오랜만이네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군. 광폭화되지도 않았고, 오히려 기뻐 보이는군.”

인자하게 웃은 파르갈이 땡칠이에게 다가가 목을 긁어 줬다.

싫지 않은지 꼬리를 흔드는 녀석.

이때다 싶어 권능을 발휘했다.

[파르갈]

-히든 가든의 일축, 드루이드의 장로 중 한 명입니다.

-아주 오래 살았습니다.

-뛰어난 정령사이자 주술사.

-맨 처음, 비틀린 크리쳐를 만들었습니다.

땡칠이를 보는 시선이 묘하다.

반가우면서도 미안한 느낌.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다.

“이런, 내가 손님을 놔두고 한눈을 팔았군. 들어오시게, 그쪽도.”

파르갈과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프들도 수레를 끌고 마을 안으로 진입했고.

“아우우우우!”

땡칠이가 하울링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모였던 크리쳐가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지면서 아쉬운 듯 뒤돌아보기에 손을 작게 흔들어 줬다.

이래서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나, 은근 정드네.

그 모습이 흥미로웠던 걸까. 파르갈이 옆으로 다가왔다.

“크리쳐들이 자네를 많이 따르는군.”

“그러게요. 애들이 생김새는 저래도 착해요.”

“허허. 그런가? 보통은 외부인을 보자마자 물어뜯네만, 파르갈이라 하네.”

“이블아입니다.”

악수를 나누었다.

드루이드 역시 세계수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호감도가 올라간 상태다.

몇몇 드루이드들도 나한테 흥미가 있는지 쳐다본다.

하긴 등장 임팩트가 강하기는 했지.

“엘프들의 마을에 인간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네만 진짜일지는 몰랐군.”

“드문 일인 거 같긴 하던데요. 저희 말고는 없어서.”

“드문 게 아니라 전례가 없었지. 특히나 세계가 이렇게 되고 나서부터는 말이야.”

“몰랐네요. 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요.”

적당히 둘러 댔다. 이제 막 탑에서 나온 것으로 설정을 잡았으니까.

어쩐지 엘프 마을에 있을 때 동네 꼬마들이 구경하러 온다 했다.

멸망에 접어들며 세계숲은 완전히 폐쇄적인 구조로 바뀌었다.

외부인들이 세계수를 노리는 이상 함부로 들일 수는 없으니까.

아마 어린아이들 중에는 사람을 직접 보지 못한 경우도 있을 거다.

침입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애들 보여 줄 만한 건 아니지.’

피투성이에 팔다리 하나씩은 날아갔는데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있나.

레인저들도 그걸 의식했는지 거주지역이 아닌 다른 길로 침입자를 데려가 심문했다.

그나저나 심문은 제대로 끝났는지 모르겠다. 따로 이야기를 들은 게 없어서.

기회가 될 때 메디에게 물어봐야겠다.

“이 언니 엄청 커!”

“반짝거려!”

“아저씨 이상해!”

드루이드 마을에도 아이들이 있는지 은근슬쩍 다가와 멤버들과 어울린다.

“읏차, 비행기다.”

“와! 와아!”

핥짝이는 아예 아이들을 들어 올리며 놀아 주는 중.

저렇게 드니까 높이 살벌하네. 애들이 담력도 좋아. 눈높이 생각하면 거의 3미터 위로 올라간 건데 좋다고 까르르거린다.

냥펀이야 망토를 잡아당기는 애들에게 둘러싸여 어찌할 줄 모르고 있고.

“자, 따라 해 봐. 오. 빠.”

“아저씨!”

“이상한 사람!”

“풀때기!”

“…아니.”

탈모맨은 뭐, 대충 잘 놀고 있다.

저래 보여도 애들한테 인기는 제일 많다.

한참 호기심 많은 나이니까. 보기 드문 쫄쫄이에 관심 가질 만도 하지.

“얘들아, 나중에 오거라. 지금은 바빠서 같이 어울릴 수가 없거든.”

“히잉.”

“자자, 장로님 곤란하게 하지 말고.”

파르갈의 말에 다른 드루이드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빠진다.

좀 급한 것이 서둘러 떼어 내는 느낌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엘프들은 똑같이 굳은 표정으로 수레를 지키고 있었다.

출발할 때부터 신경 쓰였다.

다들 짐을 한가득 들고 있으면서도 수레에는 짐을 올리지 않았으니.

천으로 가려져 있었으나 대충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짐작했다.

나름 조치를 취한 거 같기는 하다만 각성자의 예민한 후각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멤버들도 어느 정도 눈치챘을 거다. 구태여 말하지 않았을 뿐.

-끼이이익

수레가 쇳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마을 안쪽으로. 거주지를 지나 행정 구역을 통과하고 이내 마을 끝부분. 비틀린 숲으로 다시 진입했다.

-후우우웅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마경의 장막을 통과했습니다.]

[인지 능력이 저하됩니다.]

[귀소 본능이 발현됩니다.]

.

.

.

몇 가지 디버프가 중첩되었다.

실질적으로 몸에 타격을 주는 종류는 아니고 착각? 혼란을 주는 기능 같다.

뭔가를 숨기고 싶을 때, 침입자들이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되돌아가게 만들기 위한 장치.

지금 같은 경우에는 침입자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이겠지만.

원래라면 우리도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겠지만 메디의 요청을 받은 만큼 문제없었다.

“살짝 어지러울지도 모르겠군. 이걸 코에 바르면 좀 나을 거야.”

봐라. 파르갈도 우리를 배려해 디버프를 중화하는 약을 건네지 않는가.

멤버들도 그렇고 엘프 대원들도 그렇고 약을 바르니 표정이 좀 풀린다.

나야 정신 보호 등급이 워낙 높아 상관은 없다만 주니까 발라야지. 상큼한 오렌지 향이 나는 게 나쁘지 않다.

-끼익

수레가 멈추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

눈을 가늘게 떴다. 우리를 기다리는 건 죽은 나무로 만든 목제 건물.

얼기설기 만들어 구색만 갖추었다. 안에서 하는 일을 가리는 것 외에는 용도가 없어 보일 지경이었고.

‘익숙한 냄새야.’

그곳에서 나는 냄새는 내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제2 천계에 진입했을 때 가장 먼저 있던 곳은 빈민가, 그 안에 위치한 푸줏간이었으니까.

수레가 들어갈 수 있도록 크게 제작한 문이 열리고 내부가 드러났다.

천장에 달린 고리, 아래에 깔린 방수포와 양동이.

“미리 말하지 않아 죄송하지만 지금부터 보는 건 다른 곳에 말해 주지 말아 주세요.”

메디가 양해의 말을 구하고는 휘카에게 신호를 보낸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대원들과 함께 수레의 천을 벗겨 냈으니.

“전부 죽었군요.”

나와 멤버들이 잡는 데 도움을 줬던 침입자들의 시체가 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거 같다. 그래서 이동을 서둘렀던 건가.

놀라지는 않았다.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

담담한 반응에 작게 안도한 메디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휘카를 비롯한 타격대원들이 작업을 계속했다.

거꾸로 매달린 시체를 타고 흐른 핏방울이 양동이로 떨어졌다.

“침입자는 확실히 처리하는 게 방침이에요. 우리의 안위가 걸린 문제니까요. 이들이 한 짓도 있고요.”

“뭘 하려는 거죠?”

침입자를 죽이는 건 상관없다. 남을 죽였으면 지들도 죽을 각오는 해야지. 딱히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다만 중요한 건 그다음의 일.

인류애가 뛰어난다거나 그러지는 않지만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이들의 목적에 따라 앞으로의 행동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무래도 그건데.

“식인을 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말아요. 필요한 건 피니까요.”

다행히 내가 생각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만 그럴 거였으면 이곳으로 데려오지도 않았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야겠다. 왜 사람의 피가 필요한 건지. 아무 피나 상관없는 건지. 대체 피를 어디에 쓰는 건지.

‘설마 우리를 비상용으로 데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일단 우리도 사람이라서.

그보다 굳이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뭘까.

의문 어린 시선을 마주한 메디가 입술을 깨물었고.

“이건 내가 말해 주는 게 좋겠군.”

그녀를 대신해 파르갈이 나섰다.

“비틀린 숲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마경이지. 엘프는 북부와 동부, 남부 일부를 수호하고 드루이드는 서쪽과 남부 일부를 보호해.”

영역이 다른 만큼 지키는 위치도 나뉘는 모양.

“서부에는 인간들의 왕국과 몬스터들의 영역이 있다네. 사실 가장 위험한 곳이야.”

“그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게 마경이고요.”

“마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네. 생명력이 담긴 피가. 과도한 생명력과 정령의 결합. 세계수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뒤엉킨 곳. 그게 비틀린 숲이니까.”

-스스스스스

-스아아아아아

파르갈의 말에 동의한다는 것일까.

얼기설기 엮어 만든 창고 틈으로 괴목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괴목이 아니다. 크리쳐와 같이 정령이 깃든 나무지.

피를 먹고 생명력을 갈취한 정령이 고통에 몸을 비틀었고, 그에 맞춰 돌아간 나무는 부러지고 재생하길 반복했다.

“탑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했나.”

뒷문을 연 파르갈이 괴목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멸망에 접어든 세계는 많은 게 바뀌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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