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제가 가겠습니다
정글이나 다를 바 없는 공간을 거침없이 달렸다.
엘프들에게 있어 숲은 집이나 마찬가지. 남들이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 나무들도 이정표가 되고 경계선이 된다.
오랫동안 숲에 살며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북부 11번 구역]
-미세하게 찍힌 점이 보이나요?
-11번 구역이라는 뜻입니다!
집중해서 보지 않고서는 알아차릴 수 없는 표식이 달려 있다.
의미를 모른다면 보고도 어떤 뜻인지 알 수 없겠지만.
‘분명 북북 12구역에서 침입자와 교전을 치렀다고 했지.’
거의 다 왔다.
희미하지만 탄내가 느껴진다. 단백질이 탔을 때 올라오는 역한 냄새도 섞여 있고.
나도 폭발에는 일가견이 있어서 이쪽 냄새에는 민감한 편.
- 스스스스
바람이 분다.
냄새가 한층 짙어진다.
꿈틀. 미간을 찌푸렸다. 묘하게 찌르는 듯한 악취. 이거 설마.
“다들 숨 조심해서 쉬어요, 독입니다.”
“예?”
갑작스러운 말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레인저가 표정을 굳힌다.
한 박자 느리게 냄새를 맡은 모양.
“코와 입을 막아!”
“조심해서 움직여. 어떤 종류인지 모른다.”
목에 두르고 있던 천을 올려 코를 가린 레인저들이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탈모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신나게 숨을 들이켜고 있고, 냥펀은 해독 아티팩트로 보이는 마스크를 착용했다.
으적. 핥짝이는 독 기운을 물리쳐 주는 약초를 입에 물었다.
다들 폼으로 탑을 오른 게 아니다. 알게 모르게 다양한 대비책을 익히고 사용하고 있지.
나야 뭐.
[독 내성 (S) Lv.10]
내성으로 버티면 되는 거고.
신성력도 넘쳐나는 만큼 어지간한 독으로는 아무런 대미지도 입지 않는다.
“그에에.”
덕춘이도 마찬가지. 카오스 속성이라 그런가, 독이나 다른 상태 이상에는 거의 면역이나 다를 바 없다.
재앙의 규칙도 무시하는데 뭘.
- 카아아아앙!
- 채앵!
냄새 다음은 소음.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비록 레인저 부대가 전멸했지만 보고를 하기 위해 탈출한 이들은 있었고, 우리가 있던 곳까지 오기 전에 근처에 있던 레인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거다.
보아하니 고전하고 있는 거 같지만.
“죽었습니다.”
“시신은 나중에 수습해. 서두르는 게 더 큰 피해를 줄이는 길이니까.”
복부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나무에 기대 있는 시신이 하나.
폭발에 휘말렸는지 팔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 시신이 하나.
주인을 알 수 없는 신체 일부가 바닥을 굴러다녔고, 푸르게 자라던 나뭇잎은 이슬 대신 핏방울을 떨구고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더럽게 싸우는데.’
손속에 자비가 없을 수 있다.
폭발이 일어난 만큼 시신이 많이 훼손됐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일부러 바로 안 죽였어.’
상처를 보니 그렇다. 전투 불능에 빠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정도의 공격이 여러 번 들어간 흔적이 있다.
처음에는 확인 사살인가 싶었지만 아니다. 확인 사살을 하려고 팔다리를 찌르지는 않으니까.
아마도 침입자들이 노리는 건.
“부상자를 만들어 인력을 소모시키려는 거야.”
“동감.”
내 말에 탈모맨이 고개를 끄덕인다.
죽으면 어쩔 수 없지만 부상자가 생기면 챙겨야 하니까.
특임대로 활동했던 탈모맨이라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거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저기예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던 레인저가 한쪽을 가리켰다.
부상당한 엘프 4명이 쓰러져 있다. 당장 죽지는 않았으나 그대로 놔둔다면 과다출혈로 죽든 쇼크사로 죽든 할 게 분명했다.
그들을 내버려 둔 채 도주하고 있는 침입자가 6명. 놈들도 무사할 수는 없었는지 움직임이 살짝 부자연스럽다.
각자의 부상을 움켜잡고 뛰는 놈들.
“너희 둘이 남아서 한 명은 치료, 한 명은 경계. 나머지는 놈들을 쫓는다.”
“알겠습니다!”
“네!”
우리가 따라온 레인저의 대장이 빠르게 지시를 내린다.
이름이 뭐였더라, 미피라고 했던가. 귀여운 이름과 달리 카리스마가 넘친다.
옳은 선택이다.
“사용하면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포션과 생명수를 건네주고 놈들을 추격했다.
대기실에서 포션을 제작해 두길 잘했지.
- 끼이이이익
- 파아아앙!
달리는 자세 그대로 레인저가 활을 쐈다.
몸이 흔들려 조준하기 쉽지 않을 텐데도 정확히 침입자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
그중에서도 어깨에 부상을 입은 녀석을 노렸다.
팔을 움직이기 힘드니 대응하기 힘들 터.
- 카앙!
“크흡!”
감이 좋은 걸까. 아니면 나름 베테랑이라는 걸까.
놈이 억지로 화살을 튕겨 냈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쏴!”
“몇 명은 죽어도 상관없어! 죽여!”
레인저는 미피 한 명이 아니니까.
숙달된 솜씨로 연달아 활을 쏜다. 나무가 많아 엄폐할 곳이 많았으나 화살은 그 사이로 뻗어 나갔고.
“빌어먹을!”
기어코 뒤처지던 침입자의 등에 화살이 꽂혔다.
상처를 입은 어깨에 화살.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이기 힘들어질 건 분명했고.
“미안하다.”
- 서걱!
옆에 있던 침입자의 동료가 망설임 없이 그의 목을 날렸다.
생포당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걸까. 매정하지만 생존을 생각한다면 옳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면 말이지.”
순간적으로 발밑에 폭발을 일으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거슬리는 나무는 몸으로 부숴 버렸고, 이내 스킬 사정거리 안으로 놈들이 들어오는 걸 확인한 난.
“날 수 있는지 보자고, 핥짝아!”
“오케이!”
핥짝이가 압축 구슬로 스파이크를 날렸다.
- 콰아아아앙!
“젠장! 이건 또 뭐야!”
“닥치고 뛰어!”
맹렬하게 나무를 뚫고 날아가 터지는 구슬.
장애물 때문에 방향이 틀어져 놈들을 직격하지는 못했으나 정신을 흩트리는 건 가능했다.
[오로라 빔 (S) Lv.10]
- 찌유우우우웅!
나 역시 오로라 빔을 사용해 놈들을 압박했다.
직선적인 대신 관통력이 좋은 만큼 좀 더 정확하게 타격할 수 있었다.
머리를 감싸 보호하는 놈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혼이 빠진 그 순간.
[어스 월 (B) Lv.2]
- 쿠화아아아악!
놈들의 발밑에 흙벽을 생성시켰다.
마력을 컨트롤해 각도를 조절.
“이런 미친!”
“으아아아아!”
엄청난 속도로 솟아오른 흙벽에 그대로 튕겨 나간 놈들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맨정신이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거다.
흙벽을 부수든 피하든 했을 테니까.
뭐, 어디까지나 정신이 있었을 때 이야기고.
“날지는 못하나 보네. 하긴. 그랬으면 진작 도망쳤겠지.”
“그물 던져!”
“생포해! 반항하면 팔다리 잘라!”
놈들에게 당한 동료에 대한 복수인가.
포획용 그물을 던진 레인저들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화살을 쏴 버린다.
팔다리를 날려 무장을 해제시켜 버렸고, 이내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은 침입자들이 몸을 비틀었다.
“항복! 항복한다!”
“무기 놨다고, 제기랄.”
잡힐 거 같다고 동료를 죽일 때는 언제고 다 같이 잡히니까 바로 투항한다.
쩝. 됐다. 이들 사이의 의리니 관계니 관심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왜 이 녀석들이 여기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냐는 것.
권능을 발휘했다.
떠오르기 시작하는 정보. 레인저 부대를 전멸시킨 만큼 보통 놈들이 아닐 건 분명하다.
‘확실히 권능이나 스킬은 좋은 게 꽤 있네.’
엄청나게 뛰어난 건 아닌듯하지만. 내게 스킬까지 보인다는 건 나보다 한 수 아래라는 뜻.
몇몇은 칭호까지만 보이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평균을 내보자면.
‘70층대 초중반?’
그 정도 될 거 같다.
따지고 보면 나와 멤버들도 같은 처지기는 한데 실제 전투력은 그 이상이니까 예외로 치자.
보아하니 독과 아티팩트 등 준비를 많이 해 온 거 같다. 그러니까 이 정도 피해를 입혔지.
“이놈들은 손님들과 함께 이송하지. 나머지는 생존자 확보하고 시신 모아 둬.”
“네!”
미피가 우리를 바라본다. 도와 달라는 뜻.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온 거니까.
나름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이. 그것도 침입자와 같은 인간. 그런 우리랑 따로 움직이겠다는 거니까.
“읏차! 하하하! 제가 나설 타이밍이 없었네요. 이거라도 해야죠! 군장보다 가볍네.”
냉큼 양어깨에 한 명씩 들어 올리는 탈모맨.
나와 핥짝이, 냥펀도 한 명씩 어깨에 짊어졌다.
“제가 들어도 되는데.”
“아니에요. 저희 길 모릅니다. 안내해 주셔야죠.”
“그렇다면야.”
머리를 긁적인 미피가 히든 가든으로 향했다.
“이 사람들 얼굴 안 가려도 돼요?”
듣자 하니 지도를 만들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숲에서 지도를 만들 정도면 이쪽으로는 전문가나 다를 바 없다.
히든 가든으로 가는 길을 외울 수도 있다는 말.
싱긋, 뒤돌아본 미피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못 돌아갈 테니까.”
움찔. 어깨에 짊어진 침입자가 미약하게 떠는 것이 느껴졌다.
하기야 이놈들이 죽인 엘프가 몇 명인데. 쉽게 넘어갈 리가 없지.
별말 없이 미피의 뒤를 쫓았다.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나처럼.
툭. 침입자의 머리를 한 대 때려 줬다.
* * *
히든 가든. 장로 회의.
메디를 비롯한 엘프의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달에만 다섯 번째 침입이군요.”
“이번에는 12구역까지 들어왔어요. 점점 깊이 들어옵니다.”
“좋지 않군요.”
이번에 잡힌 침입자는 5명.
그들이 제작한 지도를 확인한 결과, 지도가 꽤 정밀하게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탐색과 측정에 능한 패스파인더가 한 명. 그를 보호하고 레인저를 교란시키는 역할의 전투 인력이 넷. 한 명은 사망.
“우리 쪽 피해만 13명이군요.”
“사망자만 따졌을 때는 그렇죠. 부상자까지 합치면 17명입니다.”
“그중 2명은 사실상 복귀가 불가능한 상태고요.”
세계수를 노리고 침입하는 자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처음에는 숲 초입부도 제대로 뚫지 못하던 자들이 중간지대 근처까지 들어왔으니까.
숲에 적응하는 건 엘프뿐만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엘프를 상대하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안전지대.
탐욕을 넘어 생존이 걸린 문제인 만큼 침입자들은 끈질겼고 포기를 몰랐다.
사실상 숲 밖에 있는 사람들 전체가 연합해서 공략해오는 것과 마찬가지.
“우리 쪽에서 먼저 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방랑자들을 제외하면 몇 군데 인간들의 터가 있지 않던가요. 그곳을 부수면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릅니다.”
장로 몇 명이 의견을 냈다.
방어만 하다가는 언젠가 당할 거라는 불안감.
그럴 바에는 먼저 치는 쪽이 낫지 않겠냐는 뜻이었고 이전에도 몇 번 이야기가 나왔던 주제다.
다만 숲이라는 지리적인 이점과 엘프라는 종족의 종족 특권을 포기해야 했기에 미루었던 것인데.
“확실히 새로운 방법을 찾을 때가 되기는 했지요.”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겁니다! 놈들의 기를 죽일 필요가 있어요!”
최근 증가한 침입자에 몇몇 호전적인 장로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피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들의 최후의 쉼터마저 없애 버린다면 거처를 잃은 자들이 어떤 선택을 할까요? 또 그러는 동안 희생될 이들은 몇 명이고요.”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
서로 최소한의 숨통을 열어 두어야 극단적인 선택이 나오지 않는다는 거다.
나름 일리 있는 말이었지만 모두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
얼굴을 쓸어내린 미피가 지그시 장로들을 바라봤다.
“드루이드의 도움을 받을 때가 된 거 같습니다. 어차피 침입자들도 보내야 하니까요.”
“마경 말입니까.”
“어찌 됐든 우리와 같은 히든 가든의 구성원들이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크흠, 그렇기는 한데.”
드루이드라는 말에 장로들이 침음을 삼켰다.
선뜻 입을 여는 이가 없다.
드르륵. 미피가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잠시 이어진 정적.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