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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379화 (379/740)

379화 히든 가든

이걸 어쩐다. 난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메디를 바라봤다.

장로라고 불릴 정도면 낮은 지위는 아닐 터. 그런 자가 이렇게 대놓고 화관을 탐낸다라.

내 기준으로는 경우가 없었지만 또 모르지. 엘프를 직접 마주한 건 처음이라.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게 그들의 문화와 성격에는 맞는 걸 수도 있다.

살짝 엿보자.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 츠즈즈즈즈즈

[메디]

-엘프와 드루이드의 연합체, 히든 가든의 장로.

-엘프입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며 축적한 지식과 힘은 얕볼 게 아니죠.

-익숙한 향기에 호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초조합니다.

눈을 가늘게 떴다.

히든 가든?

들어 본 곳이다. 예전, 헬다잉 키친에서 들었던 집단 중 하나.

어디에 있나 했더니만 이곳에 있던 건가.

생각해 보니 힌트는 있었다.

‘릴카가 70층대에 올라가면 하이 엘프도 볼 수 있다고 했었잖아.’

이 사람은 하이 엘프가 아니지만.

장로도 일반 엘프인 걸 보면 하이 엘프는 이쪽 세계에서도 드문 게 아닐까.

아니면 제2 천계의 왕족들처럼 특별 취급받는 이들이라던가.

잘은 모르겠다. 이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해서.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정보는 초조하다는 것.

‘화관이 이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면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외부인인데 살려서 데리고 왔다고.

처음 경계했던 것을 생각하면 꽤 부드러운 대우였다.

무기를 가져가기는 했지만 각성자는 무기가 없어도 위험한 존재.

탈모맨은 애초에 맨몸으로 싸우고, 핥짝이의 경우에는 근접전을 치를 때 대부분 압축과 해제를 사용한다.

무기만 가져간 건 대충 구색만 갖췄다는 뜻.

우호적으로 나오는 이들에게 굳이 어렵게 갈 필요는 없겠지.

“화관이야 원한다면 선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내 말에 화색이 도는 메디와 휘카.

“그래도 이유는 듣고 싶군요. 우리는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우연히 숲을 헤매다가 휘카를 만나 온 거죠.”

대충 이쪽 상황이 어떤지 모른다는 뜻이다.

단서가 필요하다. 이쪽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멸망이 가속될 건지.

지금 가지고 있는 정보라고는 전체 시나리오 이름과 챕터 제목뿐.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안다.

눈의 정령의 아이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다른 누구도 아닌 눈의 정령 여왕을 직접 마주했었으니까.

‘엘프와 드루이드.’

눈의 정령은 두 종족의 근원이 되는 존재다.

적어도 첫 번째 챕터는 두 종족을 중심으로 이어질 거라는 것.

“외부인이라… 어디서 온 건지는 정확히 알 수 없군요. 피난민이라고 하기에는 무장 상태가 좋고, 탈영병이라고 보기에는 옷차림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이들도 우리에 대해 모르는 건 마찬가지.

적당히 둘러 대자. 결국에는 이곳도 멸망한 세계인 건 마찬가지니까.

“따로 소속은 없습니다. 그저 뜻이 맞는 사람끼리 뭉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죠.”

“떠돌이군요.”

납득했다는 듯 메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가벼운 걸 보니 탑을 올랐던 이들이고요, 어느 정도 눈치채기는 했습니다.”

그녀의 눈이 냥펀에게 향한다.

지금도 온갖 아티팩트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탑에서 한탕 하고 나온 사람의 모습.

‘그러고 보니 정작 냥펀한테는 큰 관심이 없군.’

나쁜 마음을 먹었거나 욕심이 있었다면 대화고 나발이고 냥펀 먼저 노렸을 거다.

냥펀 본인은 부정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보물 고블… 아니, 걸어 다니는 보물 상자나 다를 바 없으니까.

휘카도 그렇고 메디도 그렇고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

좋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신분에 대해 정리하고 가는 편이 낫겠다.

“네. 사실 탑에서 나온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드물지만 없는 경우는 아니죠. 탑의 초대를 받는 자는 없어진 지 꽤 되었지만 지금도 종종 탑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슬쩍 멤버들을 바라봤다.

다들 눈치가 있는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나오니까 세상 개판이구. 또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구. 으응, 그럼!”

“어디 갈 데도 없어서 왔다 갔다 했지, 뭐.”

“하하하하. 이곳에 온 것이 운명이 아닐까요. 드레스 코드도 같은 초록색인 것이 말이죠.”

크로마키 쫄쫄이도 초록색은 맞지.

이런 식으로 공통점을 찾아내 어필하다니, 탈모맨도 보통이 아니다.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

다행히 크게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요란한 옷차림 덕분이기도 하다. 멸망에 접어든 세계에서 이런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과도한 관심은 독이 되기 마련이다.

“정착할 곳이 없다라… 좋아요. 왜 화관이 필요하냐고 물으셨죠?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라면 말해도 흠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눈의 정령의 향기가 느껴지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슬며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켠 메리가 입을 열었다.

* * *

“이곳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키가 큰 엘프 전사가 방을 안내해 줬다.

남자라서 그런가 탈모맨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지만 별수 있나. 처음 만났던 휘카는 본인 업무로 돌아갔고, 장로인 메디는 바쁜 몸인데.

한 사람당 방 하나. 무기도 돌려받았다.

방 크기는 크지 않았지만 지내는 데 불편하지는 않을 거 같다. 노숙보다는 백배 나으니까.

“화관 하나에 정착지를 얻은 거면 싸게 먹힌 거지.”

“그에에.”

단출하지만 깨끗한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며 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결과, 나와 멤버들은 이곳에 자리 잡기로 했다.

제2 천계를 겪으며 알지 않았던가.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녀 봤자 되는 건 없다는 걸.

중요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게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엘프들과 함께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고. 심지어 내게 우호적이다.

듣자 하니, 엘프는 외부인을 그리 반기는 종족이 아니다. 폐쇄적인 경향이 강했지.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그럼에도 살짝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드루이드가 안 보여.’

히든 가든은 엘프와 드루이드가 모여 만든 집단. 엘프만 있을 리가 없다.

걸리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다.

애초에 탑에서 집단이라고 불린다는 건 나름 역할이 있다는 거다.

프램버그가 물건을 생산하고, 갈매기가 우체국 역할을 하는 것처럼.

대림원도 채집과 사냥을 통해 식자재를 공급하지 않았던가.

‘상위층은 본인이 NPC라는 자각이 없단 말이지.’

탑 숭배자들은 예외다. 그렇다면 히든 가든이 숭배자들로 이루어진 곳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권능으로 살핀 결과, 지금까지 마주친 엘프 모두 숭배자가 아니었으니까.

헬다잉 키친에서도 언급을 했다는 건 분명 교류가 있었다는 건데.

침대에 벌러덩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군.”

적어도 74층은 내가 알고 있는 히든 가든이 아니다.

초기 형태. 혹은 이제 막 생성된 시기라고 봐야겠지. 제2 천계의 레지스탕스처럼.

이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다. 시나리오를 진행하다 보면 알게 될 일이니까.

중요한 건 다른 쪽.

“세계수라.”

히든 가든 중앙에 자라난 거대한 나무.

눈의 정령 여왕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봤던 세계수와 같은 모양이었다.

메디를 통해 들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세계수가 없으면 엘프와 드루이드는 쇠약해진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손을 남기기도 힘들어진다고 한다.

멸망에 접어들며 세계가 개판이 된 상태. 세계수의 영향력이 미치는 이곳이 그나마 사람 살 수 있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본능적으로 세계수에 이끌려 온 엘프와 드루이드가 뭉쳐 만든 게 히든 가든이고.

“문제는 인구가 몰리면서 생태계가 못 버틴다는 거지.”

세계수가 있는 곳은 생명력이 넘쳐난다.

묘목이 눈 깜짝할 새 수 미터의 나무로 자라나고, 열매도 수시로 맺힌다.

풍요로운 곳이라는 거다. 다만 지금은 그 강인한 생명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인구가 늘어난 상태고.

그래서 세계수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 중이라고 했다.

내게 화관을 달라던 이유도 이 때문. 세계수의 시작이 되는 눈의 정령. 그중에서도 여왕이 직접 만든 화관이니 세계수 입장에서는 최고의 영양제라나.

이건 이거고…….

“세계수의 영역에는 재앙이 출몰하지 않는다는 건 또 처음 알았군.”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재앙과 게이트가 없는 곳이라니. 멸망에 접어들고 있는 세계에서 안전지대가 가지는 가치는 얼마나 될까.

그곳에 터를 잡은 이들이야 좋겠다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보고만 있을까?

- 삐이이이이이익!

창문 밖으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렸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다른 멤버들의 얼굴도 보였다.

동시에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 것. 그 모습이 퍽 웃기기도 했지만 상황은 웃기지 않았다.

“침입자다!”

“북부 12구역에서 침입자 발견! 지원 요청!”

“레인저 부대 2개가 전멸했습니다!”

그들의 말마따나 저 멀리, 끝을 알 수 없는 숲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적은 보나 마나 할 것 없이 세계수겠지.

“몬스터 웨이브 다음에는 세계수 디펜스인가.”

느낌은 살짝 다를 거다.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상대할 가능성이 크니까.

타앗.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

이미 히든 가든에 몸을 의탁한 상태. 메디는 날 귀빈으로, 멤버들을 식객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가만히 앉아 밥만 축낼 수는 없다.

직접 일이 생겼을 때 도와달라고도 했었고,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멸망에 접어든 세계에서 뒤늦게 탑에서 나온 사람들. 탑 높은 곳까지 올라갔을 가능성이 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아직 등반 중인 사람들이지만.

“오자마자 몸 풀겠는데?”

탈모맨이 어깨 스트레칭을 한다.

핥짝이는 보물 주머니에서 압축 구슬을 확인하고 있고, 냥펀은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들었다.

“아주 돈쭐을 내주마!”

말 그대로의 의미라 더 무섭다.

지원을 하기 위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합류했다.

아직 우리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지라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의 정령의 냄새가 나는군요.”

“아, 메디 장로님께서 말씀하신 분입니다.”

“왠지 모르게 친근한 기분이 드네요.”

크게 거부감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정령 냄새가 나나? 화관은 줬는데.

아마 정령의 친구 칭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저희도 돕겠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나요?”

“침입자예요. 몰래 들어와 지도를 만들고 있는 걸 확인했고, 사살하려 했으나 실패. 실력이 보통이 아닌 거 같아요.”

“고작 6명이라고 하는데 레인저 부대 2개가 전멸했어요. 예사 놈들이 아닙니다.”

6명이라.

우리가 만났던 이들도 그리 약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전멸이라.

긴장할 필요가 있다. 눈이 마주친 냥펀이 금화 주머니를 하나 더 꺼냈고, 핥짝이는 지리를 외우기 위함인지 엘프들을 뒤쫓으면서도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탈모맨은…….

“아주 위험한 녀석들이군요! 위험하다 싶으면 제 뒤로 숨으십쇼! 몸 하나는 튼튼합니다! 하하하!”

“아, 예.”

“…어, 기억은 해 둘게요.”

텐션이 올라서 레인저한테 말을 걸고 있다.

왜 내가 부끄러울까. 슬며시 탈모맨과 거리를 벌리며 발을 박찼고.

“이게 또 자랑 같아서 말 안 하려 했는데, 제가 사람 상대하는 건 자신 있어서. 요렇게, 조렇게 딱 하면!”

- 찰싹!

“아흑!”

“짜식아, 부담스러워하는 거 안 보이냐. 아오, 그냥. 내가 다 창피하네.”

보다 못한 핥짝이가 탈모맨의 등짝을 때렸고.

레인저들이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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