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74층
대기실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시간을 넉넉하게 줘서 충분히 쉴 수 있었다. 컨디션 조절은 물론이고, 납품해야 할 장비와 포션도 제작 완료.
내가 쓸 것들도 만들어 챙겨 놨다. 이세계 스킬도 익혔고 말이지.
필살기로 사용할 업보 청산. 이세계 스킬은 특이하게 레벨도 등급도 없다. 익히면 쓸 수 있다는 것.
그만큼 조건이 까다롭고 페널티가 분명하기는 한데 나야 상관없으니까.
그 밖에도 몇 가지 시도를 해 봤다.
[곧 74층에 진입합니다.]
“벌써 때가 됐나.”
“그에에.”
쉴 만큼 쉬었다.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아직 올라가야 할 층이 많다.
이번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하얀 나무와 하얀뿔의 경우에는 이전 층부터 암시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딱히 없어서.
몇 가지 예상되는 게 있기는 하다.
일단 70층대는 멸망 중인 세계가 테마. 이번에도 멸망의 과도기를 넘어선 세계가 펼쳐지겠지.
[대기 시간 종료]
[74층에 진입합니다.]
- 우우우우우웅!
전송 마법진이 생성됐다.
하얗게 번지는 빛. 난 익숙하게 눈을 감았고, 어디론가로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약간의 흔들림이 끝나고 눈을 떴을 땐.
[74층]
[74-76층 아르카 대륙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유형에 따라 시작이 달라집니다.]
[당신은 숲에 진입한 자입니다.]
숲속에 있었다.
* * *
까마득히 높게 자라난 나무들.
이끼가 달라붙고 넝쿨이 매달린 곳. 묘하게 습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은 공기.
내가 있던 대기실도 나무가 많았지만 이곳에서 더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정글이라고 해야 하나. 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존에 가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는 내가 선택하는 게 없네.”
“그에에.”
아무래도 이곳은 진형을 선택하는 게 아닌 거 같다.
제2 천계에 있을 때는 일시적이지만 천족으로 취급됐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런 것도 없으니까.
각 세계에 맞춰 유동적으로 변하는 거 같다.
제2 천계에는 천족만 있지 사람은 없었다. 다르게 말하면 이쪽 세게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쪽에 있는 사람들도 이세계인 아닌가?”
“궤엑.”
어찌 됐든 세계가 다르기는 하니까. NPC들도 마찬가지고.
뭐, 차원 상점에서 말하는 이세계는 탑이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말하는 거 같지만.
일단은 움직이자. 여기는 또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까.
지금이야 야생 그대로의 모습이지만 멸망 중인 세계라는 건 변함없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말. 운이 나쁘면 에이션트 몬스터나 내가 모르는 종류의 재앙, 최악의 경우 혼돈의 파편과 마주칠 수도 있다.
- 촤악
검으로 시야를 가리는 풀과 넝쿨을 자르며 나아갔다.
처음 보는 종류의 생물들이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친다.
지구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곳의 토종 생명체라고 봐야겠지.
똑같이 생긴 나무에 이정표로 삼을 뭔가가 없어서 그런지 방향 감각이 사라질 거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목적지로 삼은 곳도 없어서.
그렇게 한참을 움직였을까.
“냥펀!”
“흐엑!”
꼬물거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냥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며 뛰어오른다. 하여간 겁은 많아 가지고.
“이, 이이! 망할 공블아이! 죽어! 죽어!”
“악! 왜 때리냐, 내가 뭘 했다고!”
“날 놀래켜 암살하려 하다니. 혼자 죽을 순 없다! 반드시 네 정체를, 읍읍!”
“어허, 그건 아니지.”
일단 녀석의 입을 막았다.
어디서 날 사회에서 매장하려고.
아. 아. 발꿈치로 밟지 말자. 치사하게.
약간의 다툼이 있었으나 만나서 다행이다.
“너도 숲에 진입한 자로 됐어?”
“그런 듯?”
어느 정도 진정한 냥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냥펀이 같은 상황이라면 다른 녀석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개성이 남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성향 자체는 얼추 통한다고 생각해서.
과연 내 생각이 맞은 걸까.
- 부스럭
숨길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인기척을 내며 누군가가 다가왔고.
“아하하하! 다들 여기 있었구나!”
“야야, 조용히 좀 해라. 아주 여기가 네 안방이지?”
“어디 있는지 티 내야 애들이 찾아오기라도 하잖아.”
“그러다 몬스터나 이상한 놈들이 오면? 생각이 머리카락만큼 짧… 아, 없지. 미안.”
“있잖아! 여기 있잖아!”
여전히 해맑은 탈모맨과 구박하는 핥짝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떨어진 모양. 그러니까 이렇게 다 모였지.
스타트부터 전부 모였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이만한 정예 멤버면 어지간한 위험도 통과할 수 있지.
그럼 그럼. 난 그렇게 확신했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선 순간.
- 촤자자자자작!
“겁도 없이 우리의 영역에 들어오다니.”
“무슨 목적으로 온 것이냐, 침입자여.”
“납득하지 못할 이유를 댄다면 끝이 좋지 않을 것이다.”
“무기를 버리고 손 올려. 고슴도치 되기 싫으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후드를 뒤집어쓴 이들이 나무 위에서 활을 겨누었다.
어림잡아도 수십 명.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다.
애초에 저렇게 나오기 전까지 있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은신 능력은 우리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
퇴로가 있을까 싶어 뒤를 돌아보려던 때.
- 푸슉
발밑에 화살이 박혔다.
움직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난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멤버들을 가리켰다.
“하, 하하. 뭔가 오해가 있는데 보시다시피 저희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잠시 침묵.
오가는 시선.
활을 든 무리가 눈을 깜빡이며 우리 면면을 살핀다.
멤버들도 이게 맞아? 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은갈치. 쫄쫄이. 번쩍번쩍.
“하아.”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말했지만 설득력이 없네.
- 타악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가벼운 움직임.
위장을 위해서인지 초록색으로 물들인 후드를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대충 보더라도 미인. 그것만으로도 시선이 가기 마련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엘프?”
머리카락을 삐져나온 길쭉한 귀였다.
흔히 알려진 엘프의 모습과 같은 모습.
부정하지 않는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능을 발휘했다.
[휘카]
-신목을 지키는 엘프 레인저.
-1기동 타격대의 대장입니다.
-미미한 호감이 있습니다.
호감? 언제 봤다고 나한테 호감이 있어.
“휘카라고 해요.”
“아, 예. 반갑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죠?”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당당한데 당당할 수 없는 기분이랄까.
이놈들이 멀쩡하게만 입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괜히 찔릴 거 없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이곳을 찾아온 건 아니다. 우연히 온 거지.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나쁜 의도로 온 건 아닙니다.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요.”
“그 말을 믿습니다.”
“예?”
왜죠?
아니지. 그럼요. 그렇죠.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무기는 반납해 주셔야겠습니다.”
쿨하게 등을 돌린 휘카가 손짓하자 몇몇 레인저가 내려와 우리의 무기를 챙겼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날 바라본다.
관심을 가져줘서 기쁘기는 한데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게.
‘설마 내가 여기서 제일 이상한 건 아니겠지?’
아니겠지.
묘하게 찝찝한 마음으로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 * *
정글은 복잡했고, 일반인의 감각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각성하며 감각이 예민해진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저 대략적인 이동 경로 정도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마저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우리를 포위하듯 감싸는 포지션으로 이동하는 레인저들.
그들만 있는 게 아닌지 숲을 지나면서 마주친 이들도 짧게 경례를 한다.
생각보다 체계적으로 굴러가는 모양.
“오.”
“저긴가 보네.”
나무가 서서히 줄어드는 공간.
흙을 쌓아 만든 벽이 보였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나무 하나.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보초를 서는 이들이 있었고.
“외부인을 데리고 왔다. 문을 열어라.”
“침입자입니까?”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휘카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보초가 날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문을 열어라!”
구구구궁.
커다란 돌덩이를 통째로 이어붙인 문이 열린다.
저 정도 두께면 어지간한 철벽보다 튼튼할 거 같다.
게다가.
- 우우웅
돌문과 흙벽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적인 처리를 한 모양. 겉보기보다 훨씬 단단할 게 분명했다.
‘대림원이랑 비슷한 느낌이네.’
세세한 디테일은 달랐지만 자연 친화적으로 만들어진 건축 양식인 건 같았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엘프들. 몇몇 호기심 강한 아이들이 기웃거렸고,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아이를 끌고 자리를 피했다.
아무래도 일반 주거 지역인 모양.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금씩 큰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가 향한 곳은…….
“장로님, 외부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인간들이로구나.”
장로라 불리는 이가 있는 곳이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의 여인.
펑퍼짐한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정령?’
정령으로 보이는 것들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물의 정령인 거 같다. 살짝 푸른색의 몸통을 가진 고양이.
권능을 통해 확인해 보니 하급 정령 정도 되는 거 같다.
‘정령은 오랜만에 보네.’
생각해 보니 정령도 탑에서 잘 못 봤다. 인연이 있는 녀석도 있지만. 눈의 정령 여왕도 만났었고, 45층에서는 호수에 빠져 있던 땅의 중급 정령 모빌리딕도 구했었다.
요정인 치히린이랑 같이 다른 곳으로 이동됐는데, 잘 있을지 모르겠다.
“이방인을 죽이지 않고 데려온 이유가 있었군요.”
“예. 친근한 느낌이 듭니다. 화관도 그렇고요.”
“이 아이들도 반기고 있네요.”
장로의 주변에서 놀고 있던 물의 정령이 내 쪽으로 날아와 몸을 비벼 댄다.
코에는 비비지 마라. 숨 못 쉰다.
저리 가라고 손가락을 튕겼지만 그게 재밌는지 오히려 더 달려들며 깔깔거린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칭호, 정령의 친구가 살랑거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칭호가 있어서 그렇다.
그 모습을 인자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장로.
“이곳의 장로, 메디라고 해요. 신목의 그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눈의 정령 여왕의 화관을 쓰신 분.”
이거 때문이었군.
세계수 부활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엘프와 드루이드의 호감도도 올랐다.
이들이 우호적으로 나온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
통성명부터 하자.
“반가워요.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탈모맨이라고 불러 주십쇼!”
냉큼 소리치는 녀석.
이 녀석 여기 들어올 때부터 들떠 있다.
많이 외롭구나. 내가 나가면 꼭 10년 내로 소개팅시켜 줄게.
측은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던 차, 다른 녀석들도 자기소개를 했다.
“난 핥짝이.”
“냥펀이라구!”
멤버들한테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정도가 전부였으니.
대신 그들의 관심은 내게 쏠려 있었는데.
“이블아이라, 멋진 이름이군요.”
앞으로 다가온 메디가 내 손을 붙잡았다.
눈빛이 타오른다. 좀 부담스러운데.
“초면에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뭐하지만 부탁할 게 있습니다.”
“어, 무슨. 어떤 거죠?”
“그 화관을 저희한테 넘기세요.”
꾸우우욱.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압착기에 넣은 것만 같은 압박감.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글쎄.
‘이번에도 쉽게 가긴 그른 거 같은데.’
그런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예상은 틀리지 않는다고 하던가.
[74-76층 시나리오, 피로 물든 세계수]
[챕터Ⅰ-눈의 정령의 아이들이 시작됩니다.]
척 보기에도 불길한 시나리오 명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