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서신을 보내다
[업보 청산]
-당신의 죽음의 순간을 상대방에게 재현할 수 있습니다.
-죽은 횟수만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일부 공유합니다.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9개월.
-9개월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텟 일부가 영구적으로 차감됩니다.
업보 청산.
대충 죽음의 업보를 상대방에게 넘겨 없애 버리는 느낌인 거 같은데.
‘난 이미 프램버그에서 수천 번 죽었어.’
1년도 지나지 않았으니 그때 죽었던 상황은 얼추 다 기억하고 있다.
사용 조건에도 맞다는 것.
교통사고나 그런 거로 죽었다면 크게 효과가 없을지도 몰랐다.
NPC를 비롯한 각성자의 신체 능력은 대단했고, 덤프트럭에 치여도 멀쩡할 사람은 많았으니까.
트럭에 치이는 충격을 준다 하더라도 견뎌 낼 사람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혼돈의 파편이라면?
멸망한 세계에서 나타나는 괴물 중 가장 위에 있는 게 혼돈의 파편이다.
릴카를 비롯한 99층까지 오른 실력자들도 결국에는 혼돈의 파편을 막지 못해 세계가 무너졌으니까.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적어도 한 명은 보내 버릴 수 있는 필살기.
“페널티가 심하긴 한데.”
“그에에.”
9개월에 한 번이라. 심지어 스텟도 영구적으로 잃게 된다. 일부라고는 하는데 정확히 얼마나 빠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
더 신경 쓰이는 건…….
‘상대방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헛수고하는 거거든, 이게.’
당장 나도 구사일생으로 한 번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른 사람이라고 이런 종류의 스킬이 없다는 보장이 없다.
가장 확실한 타이밍, 다른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 변수로 사용해야 한다.
고민이 깊어진다.
‘일단 사?’
이것도 문제네. 또 대가로 말도 안 되는 걸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툭툭. 손가락을 두드리며 생각을 거듭했고.
“스킬북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이야, 이 스킬 나쁘지 않죠. 이곳과는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영웅 중 한 명이 신격에 도전하는 자를 죽일 때 썼던 겁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카르카가 스킬의 역사를 말해 준다.
대충 요약하자면 대단한 놈도 골로 보내는 엄청난 스킬이라는 말.
나도 안다, 이 스킬의 메리트를.
고민만 하는 게 답답한 걸까. 카르카가 퉁, 가슴을 쳤다.
“좋습니다. 우리 이미 한 번 거래한 사이니까 서비스 하나 해 줄까요?”
“서비스?”
“릴카의 친구기도 하고. 뭐, 이참에 단골을 만들어 볼까도 싶어서요. 신참이라 모르겠지만 차원 상인은 지목해서 부를 수도 있거든요. 이번에 사면 서비스로 스킬북 하나 더 줄게요.”
“별 기능이 다 있네.”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굳이 차원 상점을 쓰고 싶지는 않다.
어떤 식으로 엿을 먹을지 몰라서.
반대로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지만.
슬쩍 다가온 카르카가 속닥인다.
“신참 씨도 차원 상인 자격이 있잖아요. 그쵸? 우리끼리 거래를 해도 실적으로 쳐 준다니까요? 실적으로 마일리지를 모으면 마일리지로만 살 수 있는 물건을 구할 수 있어요.”
“마일리지 상품?”
“아, 아직 초록 망토 거래가 안 끝나서 모르겠구나. 잠깐 보여 드리죠.”
찡긋, 눈을 깜빡인 녀석이 손가락을 튕긴다.
차원 상점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목록이 생성됐다.
“마일리지 상점은 종류별로 목록을 나눌 수도 있죠. 취향대로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내 흥미를 끌고 싶었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는 녀석.
정작 내가 집중한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커스터마이징이란 단어는 어떻게 알아. 어떤 놈이 지구에 차원 상점 열었어?”
“하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걸요?”
“말 돌리지 말고.”
“뭐, 열지 말란 법도 없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인정하고 있는 거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차원 상점을. 어떤 목적으로 연 걸까, 뭘 산 거고. 산 게 아니라 판 건가?
차원 상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을 이용해 차원 상인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들었다.
지구에 있는 누군가가 했어도 이상할 건 없다는 이야기.
아니지, 살짝 이상하기는 하다.
‘차원 상점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나도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서 많은 NPC와 교류했지만 차원 상점에 대해 말을 꺼낸 이는 없었다.
과거 차원 상인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나를 계승자로 삼은 릴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멍청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차원 상인이 됐다는 걸 듣고 기겁했던 걸 떠올리면 일부로 안 말해 준 게 맞을 거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답답하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100층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진짜 못 나간다. 이놈의 무한 코인 때문에.
으득. 이를 갈며 놈을 바라봤다.
“어우,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저희한테는 선택권이 없다고요? 차원 상점이 열리면 나가는 게 일이라서요.”
“됐다. 거래하지.”
껄끄럽기는 하지만 이 녀석이랑은 좀 더 봐야 할 거 같다.
바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낼지도 모르니.
“탁월한 선택! 잘 봐달라는 의미로 싸게 받도록 하죠. 물품 목록 좀 보여 주시겠어요? 상인 자격이 있으니 할 수 있을 겁니다.”
종종 릴카가 보여 줬던 걸 말하는 건가.
그의 말마따나 그런 기능이 생겼는지 목록창을 떠올리자 홀로그램이 생성되었다.
내용물을 쓱 훑던 녀석이 물건 3개를 지목한다.
“이것들로 하죠.”
[히드라 셸의 진주 (A)]
28층에서 얻었던 물건. 해독 기능이 있는 물건이었지만 독 내성이 S급을 찍은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다음 물건은.
[점멸 단검 (SS)]
하얀 나무와 하얀뿔 시나리오에서 에이션트 몬스터를 처리하고 게이트 클리어 보상으로 받은 물건이었다.
[너구리 가면 (AAA)]
얼굴을 바꿔 주는 가면도 포함.
이 아이템이 참 애매한 게 얼굴을 바꿔 주기는 하는데 원하는 얼굴로 바꿀 수가 없다. 랜덤으로 얼굴이 바뀌지.
그게 아니었으면 유용하게 사용했을 텐데.
점멸 단검이 좀 아쉽기는 했지만 내가 얻은 스킬북을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는 않다.
“가져가.”
“거래 감사합니다!”
짝!
카르카가 손뼉을 치자 거래가 성립된다.
[성공적으로 거래가 성립됩니다.]
[차원 상인 자격 보유.]
[마일리지가 적립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 사라지며 동시에 스킬북 2개가 인벤토리에 들어왔다.
“마일리지 들어왔죠? 나중에 한번 확인해 보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볍게 손가락 경례를 날린 녀석이 소용돌이 안으로 사라졌다.
이것 참.
“어째 시나리오 깰 때보다 정신이 없는 거 같지.”
“그에에.”
덕분에 여러 가지 정보와 물건을 얻게 됐지만.
마일리지도 얻었으니 마일리지 상점도 한번 열어 볼까.
[차원 상인 자격 확인]
[마일리지 보유]
[마일리지 상품 목록이 생성됩니다.]
내 의지에 반응해 새로운 홀로그램이 생성된다.
개인 취향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다고 했던가.
가장 익숙한 것이 상점창이라 그런지 그것과 비슷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한가득.
이세계 스킬북도 있었고, 불길한 저주가 걸린 것들도 있다. 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악마같이 생긴 놈의 머리도 판다. 뭐에 쓰는 거야, 이거.
“어메이징 하다, 진짜.”
목록을 살피던 난 작게 감탄했다.
누가 차원 상점 아니랄까 봐 원하는 게 많다.
모든 아이템이 그런 건 아니지만 몇 개의 아이템은 정보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일리지를 요구했다.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기에 열람하는 데 마일리지 100점을 요구하냐.
이번 거래를 통해 내게 들어온 마일리지는 10점.
10점으로 살 수 있는 게 있나 싶다. 그래도 혹시 몰라 계속해서 목록을 살폈고.
“그에에.”
“음?”
덕춘이가 가리킨 물건을 확인했다.
“오호라.”
스킬북 말고도 얻어갈 게 하나 더 있다.
* * *
73층, 하얀 나무와 하얀뿔 스테이지.
시간을 거슬러 역행하는 사람들과 물건들.
파괴되었던 건물들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며, 죽었던 몬스터들이 다시 일어나 게이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부를 개척 중이던 가디슈파 귀족들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갔으며, 큰 세력을 이루었던 레지스탕스는 소규모 조직이 되었다.
벨브레그가 동부 전선에 있고 1왕자가 살아난 세상.
가디슈는 없었다.
[제2 천계의 설정이 일부 변경됩니다.]
공지하듯 떠오르는 메시지.
그것을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탑의 꼭두각시나 다를 바 없는 NPC들은 스스로가 NPC인 것도 자각하지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알림이 떠오른 이유는 하나.
이 세계에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이 존재했으니까.
“후우.”
왕성에 발코니에 팔을 얹고 담배를 태우던 여인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과 갈색 눈.
앞머리를 뚫고 올라온 한 쌍의 뿔.
가디슈의 개인 비서였던 여인. 이사벨라.
그녀가 눈앞에 반짝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당신의 신분은 공주로 변경되었습니다.]
[당신은 사생아입니다.]
“공주라,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평소 입었던 정장 대신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이사벨라가 희미하게 웃었다.
변해 버린 환경에 어색할 만도 했지만 그녀는 익숙하게, 오히려 기쁘게 현재 상황을 받아들였다.
- 츠즈즈즈
그녀의 품에서 작은 소음이 들렸다.
반사적으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이사벨라가 숭배자 패를 꺼냈다.
“후후후.”
증명패 재질 자체가 바뀌고 있었다.
탁한 동에서 은으로.
뒷면의 등급도 올라갔으니.
“이렇게 실버 등급이 될 줄이야.”
실버 등급으로 승급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실력은 가디슈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
신분의 차이로 가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58시간 뒤, 하얀 나무와 하얀뿔 시나리오가 시작됩니다.]
적막한 공간. 다른 NPC 모두 동상처럼 굳어 있는 세상 속, 이사벨라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왕성을 거닐었다.
왕좌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는 왕의 뺨을 어루만지고, 굳은 얼굴로 창을 쥔 채 문을 지키는 기사의 콧잔등을 튕기며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왕성에서 벗어나 수도의 뒷골목으로, 수로를 따라 아래로 이동하길 반복.
“유헤다 님, 감사합니다.”
숭배자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도착한 이사벨라가 수정구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은은한 빛과 함께 유헤다의 떠올랐으나,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깐 이사벨라가 말을 이었다.
“가디슈와 에이든이 사망했고, 브론즈 이하 숭배자들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담담히 올린 보고.
사후 처리는 기본이다. 자신이 실버 등급이 되었다는 건 유헤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거였지만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가디슈를 대신해 여러 번 보고를 올렸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
묘한 흥분감과 긴장감에 이사벨라가 살짝 주먹을 쥐었다.
“새로운 숭배자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때까지 힘내 주거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유헤다 님.”
“위로 올라간 이들에 대한 것은 알아보았느냐.”
“이블아이를 비롯한 핥짝이, 냥펀, 탈모맨에 대해 조사한 결과 쁘찡 연합 소속이며…….”
보고를 하고 있을 뿐이건만 어째서인지 부끄러워진다.
반면 진지한 표정으로 이사벨라의 보고를 들은 유헤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앞으로 해야 할 것을 알려 줄 테니. 70층대에 있는 다른 실버 등급 관리자들과 협력하세요. 우선…….”
이사벨라가 해야 할 조치를 알려 주었다.
비록 조현수를 비롯한 멤버들은 위로 올라갔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법.
유헤다와 대화를 마친 이사벨라가 위층에 있는 자들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