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대기실- 푸른 정원
혼돈 수치와 내성 스킬북이 전부가 아니었나?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지.
“일반적인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에에.”
상위층에 올라온 게 처음이라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보상을 받는지는 모르겠다.
뭐가 됐든 더 주겠다면 환영이지.
다른 것도 아니고 제2 천계가 주고 싶다는데.
‘멸망한 세계에도 의지가 있는 건가.’
애초에 세계에 의지라는 게 있나?
철학적인 질문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워낙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 탑이라 확신은 못 갖겠다.
“생각보다 앙증맞네.”
하늘에서 내려온 건 자그마한 상자.
화려한 장식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투박한 나무 상자.
뚜껑을 열자 작은 쪽지와 하얀 구슬이 담겨 있었다.
- 그대의 세계에 빛이 있기를.
쪽지에 적힌 응원 메시지.
작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응원받을 줄은 몰랐다.
하얀색 구슬은 대충 짐작이 간다.
[신성의 씨앗 (S)]
-제2 천계를 크게 도운 이들에게 주는 선물.
-신성 스텟이 생성됩니다.
-막대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핥짝이가 좋아하겠다.”
그동안 신성력 없다고 투덜거렸는데.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 츠즈즈즈즉
[신성의 씨앗 (S)]
-천족이 아닌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약입니다.
-신성력 700 이상인 자에게는 효과가 반감됩니다.
권능을 통해 본 추가 정보.
아무래도 나한테는 크게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이제 막 신성력을 얻거나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신성력 스텟이 700을 넘은 지 한참 됐다. 지금도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는 만큼 조만간 900대에 들어서지 않을까 기대하는 중.
탑 내부에서의 영향력도 크거니와, 많지는 않지만 얼음과 불의 교단으로 개종시킨 NPC 덕분이다.
“네가 먹을래?”
“퉷.”
슬쩍 덕춘이에게 건네 봤지만 대놓고 거부한다.
카오스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그런가, 이쪽에는 별 흥미가 없는 모양.
묘하게 카오스는 마기랑 비슷한 느낌이 있어서.
그래서 마계가 계속 멸망했나? 다른 세계에 비해 멸망이 빨랐다고 듣긴 했다.
일단 인벤토리에 챙겨 넣었다. 나중에 쓸 때가 있겠지. 영 아니면 비싸게 팔아먹고.
이걸 얻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다. 미래가 바뀔 정도의 업적을 쌓아야 얻을 수 있으니.
[보상 지급 종료]
[제2 천계가 리셋 됩니다.]
시나리오가 끝난 만큼 제2 천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허공에 떠 있던 화면이 되감긴다. 우리가 겪었던 일들이 사라지고 처음 상태로 돌아간다.
약간은 아쉽고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미 제2 천계는 멸망했고 이들은 탑에 구속되었으니까.
72층에서 테러로 죽은 귀족을 영혼석에 넣으려 했을 때도 들었었다.
안식을 원한다고. 다시 삶이 되풀이되기 전까지 쉬고 싶다고.
누군가에게는 끝나지 않는 악몽과 같지 않을까.
“뭐, 반응을 볼 때 죽기 전까지는 인지하지 못하는 거 같다만. 것보다…….”
[제2 천계의 설정이 소폭 변경됩니다.]
[사망한 NPC, 가디슈 크롬벨, 에이든, 바오……. 이상 34명이 다른 NPC로 교체됩니다.]
난 추가로 떠오른 메시지를 노려봤다.
NPC가 교체된다? 되살아나는 게 아니라?
메시지에 있는 익숙한 이름들.
가디슈, 에이든, 그 밖에 기타 등등.
전원 탑 숭배자다.
교체된다는 의미는 하나다. 완전히 죽었다는 것. 상위층이 아닌 곳에서 마주쳤던 NPC들처럼 말이지.
“이런 페널티가 있었군.”
“그에에.”
숭배자는 본인이 NPC인 걸 자각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등반가를 방해할 수 있다.
단, 상위층에 있는 다른 NPC와 달리 죽으면 되살아나지 않는다.
있던 사람들이 사라진 만큼 제2 천계의 설정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고.
영생을 바라는 탑 숭배자들한테는 최악의 페널티가 아닐까.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식으로 내용이 바뀐다면 상위층은 확실한 공략이랄 게 없다. 그냥 팁 정도 뿌리는 느낌으로 가야지.
아무튼, 하얀 나무와 하얀뿔 시나리오는 끝이 났고.
[대기실- 푸른 정원으로 이동합니다.]
- 파아아아앗!
발밑에 마법진이 생성되며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다.
대기실이라.
곧바로 74층으로 올라가는 게 아닌 건가?
강렬한 빛에 눈을 지그시 감았고.
[대기실에 입장합니다.]
빛이 옅어지는 걸 느끼며 눈을 떴을 때는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 * *
나무와 풀이 우거진 곳.
몬스터 특유의 노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싱그러운 풀 내음만 느껴질 뿐.
날은 말았고 옆으로 흐르는 하천은 맑았다.
“휴양지 같네.”
대기실이라고는 했지만 힐링하는 공간인 느낌이 강하다.
뭐, 어디까지나 첫인상일 뿐이지만.
[대기실- 푸른 정원]
[74-76층 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전 휴식을 취하십시오.]
[적정 인원, 혹은 적정 시간이 충족되면 74층으로 전송됩니다.]
배려해 주는 건가.
웬일로 친절하대?
하기야 시나리오 한번 겪으면서 온갖 기억이 생성되는 등 정신적인 피로감이 쌓이기는 했다.
상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비슷한 일이 반복될 거다. 기억이 뒤섞여 혼란을 겪는 사람도 존재할 거고, 심하면 자아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야 쁘찡 연합의 격한 응원 덕에 정신 보호 레벨이 높아 크게 문제 될 건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 띠링
커뮤니티 알람이 왔다.
멤버들도 무사히 대기실로 온 모양.
[니머리 탈모]: 오오오! 얘들아, 대기실 왔냐? 나 그거 받음. 광휘의 씨앗!
[정수리 핥짝]: 으아아아아! 자라나라 신성신성! 300 돌파한다아아앗!
[냥냥펀치]: 자라나라 머리머리! 탈모맨은 탈모다아아아앗!
[니머리 탈모]: 아니요… 니들 봤잖아, 나 탈모 아닌거!
[냥냥펀치]: ……?
[정수리 핥짝]: ……?
녀석들도 같은 보상을 얻은 모양.
[쁘띠공듀]: 그럼 다 푸른 정원에 있는 건가욧?
[냥냥펀치]: 아닝! 난 초록 언덕임.
[정수리 핥짝]: ㅇㅇ, 나도. 거긴 또 어디야?
[니머리 탈모]: 혼자 이상한 곳에 떨어진 사람이 있다? 하하! 이상한 녀석!
“뭐야, 나만 딴 곳이야?”
이상한 녀석한테 이상하단 소리 들으니까 화나네.
대기실이라는 게 하나만 있지는 않은 거 같다.
아쉽지만 별수 없지.
시간도 남았겠다, 몇 가지 작업 좀 하자.
안 그래도 할 일이 있다.
화조국에 보낼 물건들도 만들어야 하고, 그동안 썼던 포션들도 만들어서 채워 놔야 한다.
게다가.
“그것도 받아야지.”
[칭호, 차원 상인이 빛납니다!]
[차원 상점 오픈]
- 지이이이잉
망설임 없이 차원 상점을 열었다.
받을 건 받아야지. 개고생하면서 왕관도 얻었는데.
“카르카 나와.”
“생각보다 일찍 부르셨군요.”
공간이 일그러지며 등장한 차원 상점과 차원 상인.
카르카가 웃는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물건을 던졌다.
천신의 왕관.
무려 SSS급 아티팩트였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마지막 펠라인 세트를 얻을 수 있으니까.
“진품이 확실하군요.”
“그렇겠지. 왕이 쓰고 있던 물건인데.”
꼼꼼히 물건을 살피던 카르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물건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아아아아! 잠깐만요. 장난이에요, 장난.”
“장난 같은 소리 하네. 어딜 그냥 가려고.”
자연스럽게 퇴장하려던 놈의 뒷덜미를 잡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쉰 녀석이 날 바라봤다.
“이래서 초짜란, 에휴. 어차피 지금 물건 못 받아요.”
[거래 물품 납품 확인]
[‘펠라인의 초록색 망토 (S)’의 소유권을 획득합니다.]
[첫 정식 거래 참관인, 릴카의 확인 아래 거래가 완료됩니다.]
미간을 찌푸렸다.
“거래했을 때 릴카가 참관인으로 있었잖아요. 첫 거래는 참관인 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이죠.”
“그런 설명은 처음 들었는데.”
“그야 제가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깜찍하게 양손을 펼치며 싱긋거리는 녀석.
진짜 줘 패고 싶다.
“그래도 소유권은 확실히 얻었으니 걱정 마시길. 릴카를 만나게 되면 다시 불러 주세요! 아니면 따로 사실 물건이라도 있으신지? 마침 괜찮은 물건이 있는데. 헤헤.”
바로 자세를 바꾸어 영업 모드가 된 카르카.
얼굴을 쓸어내렸다. 머리가 다 아프다.
살짝 허무하네. 릴카 이 녀석도 문제야. 이런 건 미리 말해 줬어야지.
조그마한 머릿속 뇌도 조그만 게 분명하다. 만나면 바로 꿀밤이다.
“없어. 저리 가, 빨리 가.”
“진짜요? 진짜 괜찮은 물건이 많은데. 세계 창조의 열쇠도 있고, 빅뱅의 잔상, 디스맨 포트폴리오도 있고, 잡다한 이세계 스킬북 같은 것도 있고 또…….”
“잠깐 스톱.”
앞에 물건들은 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만 이세계 스킬북은 말이 다르지.
안 그래도 새로운 스킬을 만들 생각이었다.
‘상위층에서는 스킬 레벨과 등급이 급격히 올라갈 수 있어.’
데몬 스피어를 비롯한 다른 스킬들처럼.
이미 대부분의 스킬의 레벨을 최대치로 올린 상황.
이 좋은 기회를 아깝게 버릴 수는 없다. 이세계의 스킬북이 어떤 것들일지는 모르겠지만 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 조합하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무엇보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강점이야.’
스킬 종류가 워낙 다양해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의외로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워터나 샤워 같은 생활형 스킬은 물론이고, 메인으로 사용하는 스킬도 겹치는 경우가 있다.
그때부터는 스킬의 등급과 레벨, 관련 칭호와 권능으로 우열을 가리는 거고.
다 떠나서.
‘이미 내 스킬들은 알려졌단 말이지.’
이블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꽤 정보가 알려졌다.
탑 숭배자들 역시 나를 경계하는 만큼 여러 정보를 모았겠지. 그들이 모르는 비장의 한 수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건 좀 보지.”
“좋습니다!”
차원 상점인 만큼 위험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리스크 없는 리턴은 없다.
찬찬히 목록을 살폈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물건들 사이, 이세계 스킬북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아, 미리 말 안 했는데 이세계 스킬북 같은 경우 데이터가 깨져 보일 수 있어요.”
곁눈질로 내가 뭘 살피는지 확인한 카르카가 조언했다.
“그런 건 미리미리 말하라고.”
[■■□■]
-대사Odf하,# s고(ffㅎ니다.
[&!□■d]
-시;ᅟᅡᇁㅇ□가ㅎ푸.
말마따나 글씨가 깨진 건 물론이고, 제대로 읽는 것조차 불가능했지만 내게는 권능이 있다.
눈에 힘을 주며 천천히 정렬되는 문자를 바라봤다.
[단 하나의 승리]
-당신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승리를 위하여.
-그대의 마지막 승리를 정하라.
이건 뭐,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확정적으로 한 번은 이길 수 있다니 상황에 따라서는 최고의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페널티가 너무 크다.
다른 스킬도 읽어 내려갔다.
그동안 봤던 것들과는 다른 종류들.
등급조차 없다. 스킬인지 권능인지 애매한 것들도 있고.
스킬 설명도 평소 읽던 것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 스스스스
그런 내게 도움을 주려는 것일까, 권능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빛무리가 번지는 스킬북 하나.
[업보 청산]
-수많은 삶을 이어온 필멸자여.
-그대가 기억하는 전생은 어디까지인가.
-쌓아 온 업보를 청산하라.
업보 청산?
이게 뭔 소린가 싶었으나 권능으로 추가 설명이 떠올랐다.
천천히 스킬 설명을 읽은 난 입을 벌렸다.
다른 사람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S급 스킬 이상이야.’
엄청난 메리트를 지닌 스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