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이제 누가 더 많지?
나의 등장에 당황하는 녀석들.
왜들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
자고로 상황에 따라 뻔뻔해질 줄도 알아야 하는 법.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미 선두로 나선 이들은 기사들을 공격하는 중. 어중간하게 뒤에 있던 녀석들만 눈치를 살폈고.
“일단 공격해!”
“늦게 왔나 보지. 정신 차려!”
판단을 뒤로 넘기고 다시 공세를 가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에게 중요한 건 왕과 2왕자를 처리하는 것이었으니까.
자그마치 왕족 암살이다. 실패하면 미래는 없다.
서로 많은 것을 건 싸움.
성공하면 따라올 막대한 보상과 패배했을 때의 참혹한 미래로 머리가 복잡할 거다.
흥분도 될 테고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움직일 터.
나라는 변수 하나로 멈출 리가 없었다.
“아, 아니. 얘 처음 본다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말이 긴 녀석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지만.
혼자 떠듬거리며 날 가리키는 놈을 향해 달렸다.
“왜 그래, 마이크? 우리 절친이잖아!”
“내 이름 마이크 아닌…….”
“닥쳐! 오늘부터 마이크야!”
- 뻐억!
달리는 속도 그대로 턱을 갈겼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턱이 돌아간 녀석이 기절해 쓰러졌다.
그를 붙잡고 원통하게 소리쳤다.
“이런 못된 놈들, 마이크를 죽이다니!”
차앙!
상점에서 산 싸구려 검을 뽑아 달렸다.
“마이크의 복수를 해 주마!”
오케이. 완벽하다.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괴한인 척 연기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만이다.
왕관을 얻으면 바로 자리를 피하고 놈들을 없앨 예정.
이미 전투가 벌어졌다. 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 막고 있었고, 괴한들은 어떻게든 방어를 뚫고 왕족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병장기가 부딪치고 불똥이 튀어 오른다.
- 촤르르르르!
- 콰직!
스킬을 사용하는 건 덤. 수십 명이 쏘아 대는 스킬을 막아 내는 건 왕실 기사단이라 할지라도 버거운 일.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일부를 제외하면 실력이 엄청 좋지는 않네?’
뭐랄까. 어디 뒷골목이나 음지에서 활동하는 녀석들 중에 쓸 만한 놈들로 뽑아 온 느낌?
아무래도 내가 에이든을 잡으면서 생긴 변화 같다.
녀석을 잡고 심문할 때 그가 종종 가디슈를 도와 음지의 조직들을 동원했다고 들었으니.
그렇다 한들 기사들이 승기를 거머쥘 일은 없었다.
- 우우우웅!
- 파아아아앗!
“이, 이런!”
“거리를 벌려라! 구속 아티팩트다!”
기습이 왜 기습이겠는가.
멍청하게 몸으로만 들이박을 리가 있나.
놈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함정도 깔아 뒀겠지.
나도 몇 번 당해 봐서 잘 안다.
‘슬쩍 도와줘야지 뭐.’
전멸하면 나도 곤란하니.
괴한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가만히 있을 때면 모를까 사력을 다해 싸우는 지금, 복면까지 쓰고 있는 나를 수상히 여길 놈은 없었다.
- 퉁
“어엇?”
“이노오오오옴!”
어이쿠, 실수.
기사와 검을 맞대고 있던 놈의 등을 살포시 밀어 줬다.
균형이 앞으로 쏠린 녀석에게 빈틈이 생기는 건 당연했고, 그 찰나의 순간 기사의 검이 목에 틀어박혔다.
각성자 되면서 어깨가 넓어졌나. 어깨빵이 절로 나가네. 거, 미안하게 됐수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으엇?”
“아이고, 앞에서 어물쩍거리면 어떡해?”
실수인 척 앞사람의 뒤꿈치를 밟았다.
이 녀석은 그냥 쩌리네. 발이 걸리적거린다고 전장에서 뒤를 돌아보고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맹렬하게 뻗어온 검이 놈의 어깨를 찔렀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전투하는 건 힘들겠지.
어깨를 붙잡은 녀석이 다급히 포션을 꺼내려 했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척 깨트려 버렸다.
“야, 이 개────!”
뒤에서 뭐라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중간중간 방해를 해 줬음에도 기사들이 밀려났다. 방어진 일부분이 무너진 곳도 있다.
가드들이 가세했고, 귀족들마저 저마다 가지고 있던 호신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어떻게든 마차까지 접근한 괴한이 팔을 뻗어 댔으나.
“무엄한 것들!”
- 촤아아악!
2왕자는 거침없이 그런 놈들의 팔을 잘라 냈다.
왕족쯤 되면 신성력 하나는 엄청나다. 신성력이 강할수록 기본 스펙이 올라가는 천족 특성상 전투 경험이 없더라도 어지간한 놈들은 처리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일정 수준 아래인 경우에.
“으랴차!”
[차징 (S) Lv.10]
- 콰아아아앙!
거한의 괴한이 마차에 몸을 들이박는다.
소란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던 마차가 크게 기울었고.
“조심하십시오!”
“으아아아!”
괴한들의 계속된 공세에 마차가 완전히 뒤집혔다.
튕겨 나오듯 바닥을 구르는 왕과 왕비.
그들을 지키기 위해 반쯤 끌고 가다시피 당기는 가드와 기사.
2왕자는 용감하게 검을 들고 싸우기 시작했고, 가디슈는 설렁설렁 괴한들과 검을 나누었다.
중요한 건 바로 마차가 엎어지며 왕관이 떨어졌다는 것!
지금이다.
[디그 (B) Lv.9]
섬세하게 마력을 컨트롤했다.
절대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범위를 줄이는 대신 깊게 구덩이를 파 내려갔다.
- 수웅
마차 잔해와 섞여 있던 왕관이 구멍 안으로 떨어지고.
파앙!
혹여나 다른 사람들이 볼까 싶어 바닥을 걷어찼다.
흙이 튀어 오르며 비산한다.
난데없는 흙 폭발에 얼굴을 가리는 이들.
“잘했어! 시야를 가렸다, 찔러!”
“좀 하잖아!”
의도도 모르고 괴한들이 소리를 질러 댄다.
됐다. 이러면 나야 좋지.
이걸로 일단 할 건 끝냈고. 퇴장하는 일만 남았으니.
‘저놈이 좋겠군.’
난 덩치가 커다란 기사를 향해 몸을 던졌다.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방패와 검을 쥔 기사.
흙먼지에 시야가 가려진 만큼 방어적으로 나올 것이 분명했고.
“못 지나간다! 으랴압!”
거구의 기사가 힘차게 방패를 휘둘렀다.
방패는 그 자체로 둔기나 마찬가지.
난 활짝 팔을 벌리며 방패를 맞이했다.
- 터엉!
이어 방패와 부딪치는 것과 동시에 힘껏 발을 박찼으니.
“크학! 너무 강하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으로 저 멀리 날아갈 수 있었다.
마무리 멘트까지 완벽.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퇴장이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덕춘이가 나를 반겼다.
“그에에.”
“뭐?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역시 덕춘이야, 나랑 마음이 통해.”
“궤?”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띠꺼운 표정은 덕춘이의 아이덴티티. 신경 쓰지 않고 복면을 벗었다.
몸에 둘렀던 로브도 벗어 불에 태웠으니 증거 인멸 완료.
빠르게 전장을 벗어나며 펠라인 세트를 착용했다. 이어 혼돈검까지 착용하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목적은 달성했으니 남은 건 놈들을 처리하는 것.
전장을 중심으로 한 바퀴 빙 돌았다. 아무래도 바로 들어가면 이상하게 보일 거 같아서.
조금만 버텨 주길 바라며 적절한 위치를 찾았다.
이쯤에서 등장하면 되겠지.
“이제부터는 다 조지면 돼.”
입꼬리를 올리며 발을 박찼다.
파이어 밤.
폭발을 일으키며 맹돌진.
- 콰아아앙!
굉음을 일으키며 적진으로 달려들었다.
그 짧은 사이, 전세가 완전히 꺾였는지 기사들은 반격할 틈도 없이 당하고 있었다.
부상을 입고 쓰러진 귀족들까지 있었는데 그 원인은…….
“으으으음!”
“가디슈 네 이놈!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네가 어찌 이러느냐!”
승리를 확신한 가디슈가 직접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가 들고 있는 검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왕부터 노린 것인지 배를 찔린 국왕이 신음을 흘렸고, 왕비가 그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둘을 지키기 위해 2왕자가 검을 들었으나 실버 등급인 가디슈를 정면에서 막기에는 역부족.
자잘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온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라진 세계의 망령에 불과한 것들이 처지도 모르고, 쯧쯧.”
가디슈가 혀를 찬다.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본다.
“원망을 할 거면 저 녀석에게 하라고. 저놈이 날뛰지만 않았으면 이럴 일은 없었을 거니까.”
하여간 남 탓은.
나한테 얻어맞았던 기억은 잊었는지 꽤 여유롭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이블아이, 여기까지 온 걸 진심으로 축하하마. 대단해.”
짝짝짝.
박수를 치는 녀석이 조소를 흘린다.
“그런데 너 혼자서 뭘 할 생각이지? 죽으러 달려오는 꼴이 볼 만하구나!”
놈이 검을 집어 던지고 손을 내뻗었다.
두 손에 집히는 순백의 불길.
72층 출장에서 겪었던 놈의 공격이다. 초고온의 불길에 맞으면 나라도 위험했으나.
[칭호, 폭탄마가 빛납니다!]
[파이어 밤 (S) Lv.10]
- 콰아아아앙!
폭발하면 나도 자신 있는 종목이라서.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터트렸다. 홍염과 백염의 격돌.
나와 가디슈를 중심으로 세상이 둘로 나뉘었다.
붉게 빛나는 곳과 하얗게 빛나는 곳.
“가디슈는 탑 숭배자입니다! 이곳에 모인 놈들도 마찬가지죠!”
힘껏 소리 질렀다.
가디슈가 이미 대놓고 반역을 한 상태. 내 말을 믿지 않을 리가 없다.
사그라드는 불길을 뚫고 2왕자 앞에 섰다.
“숭배자들을 쫓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것들이 증거입니다.”
반쯤은 던지다시피 그동안 모았던 증거 물품을 건넸다.
왕족에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뭐라 하는 자는 없었다.
“가디슈, 네놈이 꿍꿍이가 있을 줄은 알았으나 이럴 줄은 몰랐다.”
분노와 배신감에 부르르 떠는 2왕자.
왕비의 눈에도 노기가 서렸다.
조금만 더 양념을 쳐 보자. 그편이 더 많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하얀뿔과 합작해 놈들을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지원군이 올 테니까요.”
“하얀뿔이라면, 레지스탕스?”
“그들이 어찌, 우리와 적대적인 곳으로 알았는데. 몰랐던 일이야.”
몰랐겠지. 방금 지어낸 거니까.
놀란 표정을 짓는 왕자와 왕비의 시선을 회피하며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하얀뿔이 원하는 건 더 나은 천계지 왕가의 몰락이 아닙니다. 나라가 흔들리는 걸 결코 두고 보지 않죠.”
그 말을 끝으로 준비했던 조명탄을 들어 올렸다.
망설임 없이 발사.
- 피유우우웅.
- 퍼어어엉!
하늘을 밝히는 불빛.
이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던 걸까. 저 멀리서부터 소음이 들려온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이들.
두 무리다.
“공블아이!”
“공공아이!”
“공공공이!”
탈모맨이 이끄는 레지스탕스 무리와 따로 달려오는 냥펀과 핥짝이.
공공공이는 또 뭐야. 이 상황에도 죽이 잘 맞는다. 돌겠네.
아무튼 간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가디슈?”
삐딱하게 서서 놈을 응시했다.
기습을 하며 괴한들의 숫자 역시 줄어든 상황.
하얀뿔이 참전하며 우리 쪽 인원이 더 많아졌다.
“어, 어떻게 합니까? 가디슈 님?”
당황한 괴한의 조장이 가디슈의 판단을 기다린다.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몰랐는지 그의 동공이 흔들렸지만 그것도 잠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은 녀석이 호탕하게 소리쳤다.
“상관없다. 우리도 지원군이 온다. 곧 벨브레그를 처치한 매복조가 합류할 테니 걱정 말고 싸우도록!”
“알겠습니다!”
“그, 그럼! 우리 쪽도 아직 전부 안 모였다 이거야!”
“봐라! 우리도 지원군이… 어?”
자신감을 되찾은 녀석들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들 말마따나 1차 매복조가 있던 곳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단 한 명.
“늦어서, 죄송합니다. 전, 하.”
혈혈단신으로 돌아온 벨브레그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갑옷은 부서진 지 오래. 온몸이 피로 젖었고 다리를 끌고 있었으나 기세만큼은 살아 있었다.
기어이 놈들을 전멸시킨 것.
동부전선의 영웅은 죽지 않았다.
나와 멤버들, 벨브레그를 비롯한 기사와 레지스탕스 대원이 40여 명.
놈이 이끄는 괴한이 30여 명.
“…젠장.”
전장을 훑은 가디슈가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