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신성일
왕성, 가디슈가 의자를 걷어찼다. 그대로 박살 나 버리는 의자. 파편이 날아올랐고, 그 정도로는 분노가 풀리지 않는지 테이블을 쓸어버렸다.
- 콰장창!
값비싼 장신구와 명패, 물건들이 바닥에 쏟아지며 요란스러운 소음을 냈고, 한가득 쌓여 있던 서류가 위로 날아올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가디슈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
어차피 스테이지가 끝나면 리셋 되는 장난감이나 마찬가지다.
얼굴을 구긴 가디슈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손가락이 파고든 테이블에 기다란 상처가 생겼다.
“에이든, 이 개 같은 새끼가.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가디슈 님, 흥분하셨습니다.”
“그럼 화가 안 나나!”
자신을 말리러 온 비서 이사벨라에게 호통을 질렀다.
그와 같은 탑 숭배자. 비록 브론즈 등급이지만 출중한 재능과 실력만 보면 실버 등급과 동급이라 봐도 무방했다.
비록 가디슈보다 영향력이 없어 브론즈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기에 평소에는 대우를 해 주는 편이었는데.
“기껏 사람을 보냈더니 잠적을 해? 개새끼. 날 묻어 버리겠다는 거야 뭐야! 이따위로 나오면 본인은 무사할 거라 생각한 건가!”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몰랐다. 심부름꾼과 에이든 모두 이블아이에게 잡혔다는 것을.
그렇기에 자연스레 에이든이 심부름꾼을 죽이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했다.
가디슈와 에이든 모두 골드 등급인 유헤다 라인을 따라가는 이들이었고, 서로를 견제하는 라이벌이기도 했다.
양지에서는 가디슈가, 음지에서는 에이든이. 자잘한 마찰은 있더라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위급한 순간에는 협조했다.
그런데 룰이 깨졌다.
도움을 요청했고 거절당했다. 단순히 협조를 부탁한 것도 아니다. 그들의 보스인 유헤다에게 직접 지원을 요청한 거지.
부담되는 일이었고, 이에 따른 불이익은 염두에 두었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에이든, 넌 모른다. 저놈들이 위로 올라가면 어떻게 되는지.’
그만큼 이블아이를 비롯한 멤버들.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을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 온 탑.
다른 NPC와 달리 그는 탑 숭배자였고, 자신이 NPC인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 속에 하얀 나무와 하얀뿔 스테이지가 이 정도로 비틀린 적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게 성공적으로 나은 방향으로 흐름이 바뀐 적이 없다.
수많은 사건 사고를 일으켜 막았으니까. 처음 상위층으로 올라온 이들도 그동안 겪었던 층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 몸을 사리느라 얌전히 있는 경향이 많았다.
“이놈들은 왜 가만히 있질 못하는 거야. 좀 쉬라고. 놀 것도 많잖아!”
털썩.
화를 내는 것도 지치는지 가디슈가 소파에 몸을 뉘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가장 요주의 인물인 이블아이는 뭘 하고 다니는지 왕성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불안감이 싹트는 건 당연.
냥펀은 2왕자와 함께 빠른 속도로 세력을 늘리는 중이었고, 핥짝이는 벨브레그 장군과 함께 군의 지지를 확고히 다지고 있었다.
특히나 핥짝이의 경우 하녀 출신인지라 시종들의 응원을 받는 건 물론이고, 온갖 소문과 정보까지 끌어모으고 있다.
탈모맨?
“이게 왜 레지스탕스냐고, 군대지.”
이사벨라가 정리해 준 서류를 살핀 가디슈가 파일을 집어 던졌다.
탈모맨을 기준으로 레지스탕스가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영주와 계약을 맺은 후 자경단을 돌려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기사들과 힘을 합쳐 몬스터를 토벌하기까지.
사실상 용병 역할까지 같이 하고 있다. 그것도 전국구로 체계화된 용병.
초조함을 느낀 가디슈가 손톱을 물어뜯었다.
기반이 없을 때라면 모를까 이 정도로 내실을 다졌다면 혼자 어쩔 수 없다.
왕족이 모두의 위에 군림한다고는 하나 아무런 명분도 이유도 없이 쓸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
왕이 된다면 모를까. 미친 척하고 피의 숙청을 벌일 수도 있다. 온갖 비난에 시달리고 신뢰에 균열이 가겠지만 상관없다.
명분이야 만들면 그만. 쓸어버린 다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는 것도 방법이다.
가디슈의 표정이 침착해진다.
“이사벨라,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 중이겠지?”
“에이든과 관련된 것을 제외한다면 이상 없습니다. 그날까지 남은 기간은 4일. 이틀이면 완료됩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억지로라도 밀어붙여야지. 다른 놈들을 섭외해.”
“알겠습니다.”
원래라면 에이든이 관리하는 음지의 세력들을 동원하는 것이 맞았으나 이렇게 된 이상 스스로 해결을 본다.
“오히려 잘됐다. 이번 일로 놈을 유헤다 님의 눈 밖으로 내보내야지.”
성공만 한다면 모든 공을 독차지할 수 있다. 동시에 에이든의 무능함을 보여 줄 수도 있고.
이제 남은 건 하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지원을 받아 놓는 것.
에이든이 가만히 있겠다면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옷을 정돈한 가디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랜만에 유헤다 님께 연락을 드리겠군.”
다른 게 중요한 게 아니다. 결국에는 혼란에 빠트리고 정상적인 흐름에서 벗어나게 만들면 되는 거다.
숨을 고른 그가 나갈 채비를 했다. 오랜만에 왕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 * *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큰 행사가 있기 마련이다.
명절이나 축제와 같은. 제2 천계 역시 마찬가지. 10년에 한 번 왕족들이 참여하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으니.
“세계 전체가 한 나라라 그런가. 규모가 엄청나네.”
“일정도 어마어마할걸? 일주일 동안 진행된다고 하니까.”
“그것도 많이 줄인 거임. 몬스터가 난리 치기 전에는 한 달 동안 했었대.”
신성일神聖日.
왕족의 시초가 되는 천족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짐작기 어려운 오래된 축제. 이 기간만큼은 왕족들도 모습을 드러낸다.
평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왕족을 두 눈에 담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들도 있었으며, 귀족들은 필참이라 봐도 무방했다.
혼잡스러울 게 뻔한 만큼 보안에도 각별히 신경 쓴 상황.
지금이야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수습이 됐다지만 레지스탕스 일원이 귀족을 공격한 사건도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이 거리를 배회했고, 기사들 역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사전에 제거했다.
- 화르륵
곳곳에 횃불이 켜진다.
신성일은 밤에 시작된다. 왕족의 시초가 밤에 태어났기 때문이라나.
노점상과 가게도 저마다 불을 켰으며, 가정집도 창문을 활짝 열고 등을 달았다.
각가지 색으로 빛나는 거리.
닭꼬치를 비롯한 구이와 볶음면, 호떡 비슷하게 생긴 음식과 음료수의 냄새에 절로 군침이 돈다.
“이런 축제나 행사도 중요하다구. 일상은 유지되어야 하니까.”
“그에에.”
바비큐 꼬치를 우물거리며 냥펀이 말했다.
녀석도 귀족 신분인 만큼 귀족 무리에 껴 있는 게 맞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일반 시민 사이에 섞이기로 했다.
천계의 축제를 즐길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 지긋지긋하게 보는 귀족 얼굴을 보느니 거리에 나오는 편이 더 좋았다.
나나 핥짝이도 마찬가지고.
뭐, 굳이 또 이렇게 나온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다.
저기, 저 녀석.
수많은 천족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놈과 눈이 마주쳤고.
- 콰아아앙!
짐승 같은 속도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주먹을 들 정도의 박력.
거의 몸을 던지다시피 한 녀석이 우리를 끌어안았다.
“오오오오! 얘들아! 흑흑! 나 혼자 떨구고 너무한 거 아니냐고.”
“악! 얘 체온 너무 높아! 싫어!”
“놔! 안 놔? 뒈질래?”
“얘 힘 더 쎄진 거 같은데? 으으.”
누구라 할 것도 없이 탈모맨.
커뮤니티에서 얼마나 징징거리던지 결국 이렇게 만나기로 했다.
심정이 이해되기는 하다. 혼자 레지스탕스에서 구르고 있으니 외로울 만도 하지.
누군 감자 쪄 먹는데 누군 스테이크 먹는다고 궁시렁. 자기는 골목에서 양아치 꿀밤 먹이는데 누구는 전장에 나간다고 궁시렁.
아무리 친하게 지내도 NPC는 등반가가 아니다. 어느 정도 선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 편하게 떠들 사람도 없었을 거다.
축제까지 넘어가려니 서러움이 폭발. 기어코 여기까지 왔다. 풍문으로는 오는 길에 있던 몬스터랑 강도들이 씨가 말랐다던데.
그도 그럴 것이.
“형님! 이분들이 그때 말씀하셨던 지인입니까!”
“형님과 달리 이목구비가 뚜렷하십니다!”
“모자란 형님과 친구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온 게 아니다. 녀석을 따라온 레지스탕스 일원들이 고개를 숙인다.
빡빡머리, 덩치, 안경.
대표적으로 3명 정도만 인사를 했고 나머지 대원들은 인파에 녹아든 상태.
뭐가 됐든 레지스탕스 지부장. 그것도 초기 멤버. 서열로 따져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 사실상 핵심 구성원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 녀석이 무작정 수도로 올라가겠다는데 그냥 보낼 수야 있나. 호위를 위해서든 보좌를 위해서든 레지스탕스가 움직이는 수밖에.
“내가 형님이라 하지 말랬지? 우리가 깡패야? 지부장이다, 이놈들아!”
- 따악! 딱! 따닥!
“억! 폭력 쓰지 맙시다!”
“형님이 형님이지. 어딜 봐서 지부장입니까! 예?”
“아니. 왜 난 두 대…….”
부하들의 머리통을 때린 녀석이 손을 내젓는다.
“가서 놀고 있어. 나 얘네랑 놀 거니까.”
“형님, 조직으로 돌아오십쇼. 양지보다는 음지에 더 어울리는 관상이십니다.”
“왜 선량한 시민들에게 안 좋은 것을 보이려 하십니까.”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있는 건 경우가 아닙니다.”
“아오, 진짜!”
척 봐도 사이가 좋아 보인다. 허물없다고 해야 하나. 너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장난스레 떠들면서도 순순히 물러난다.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잘 부탁한다 하는 것도 잊지 않고.
그냥 보기에는 장난기 많은 동네 청년 1, 2, 3 정도로 보이기는 하지만.
[게네티]
-레지스탕스 하얀뿔 전투조장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유연함!
-어랏? 하면 당합니다!
[카뮤]
-레지스탕스 하얀뿔 타격대장
-저돌적인 돌진이 특기!
-튼─튼합니다.
[테루]
-레지스탕스 하얀뿔 암습조장
-홀로 암살 집단을 궤멸시킨 장본인!
-음지에서는 밤선생으로 불립니다.
하나같이 설명이 범상치 않다.
아무래도 하얀뿔 지부 전체가 움직일 수는 없으니 실력자들을 중심으로 보낸 모양.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 츠즈즈즈즉
권능을 활성화시키며 군중을 바라봤다.
그 안에 섞여 있는 레지스탕스 인원이 대략 30명 정도.
생각보다 많이 오기는 했다. 이쯤 되면 이들도 축제를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닌가 싶다.
여러 생각이 드는 타이밍.
- 피유우우우우웅!
- 파아아아앙!
폭죽이 터졌다.
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표식.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터지는 폭죽에 모두가 하던 걸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와아!”
“엄마! 나 저거 사 줘!”
“예쁘네.”
“나처럼?”
“어? 어어. 으응.”
“목소리에 힘 안 줘? 죽을래?”
아이와 어른. 가족과 연인 할 것 없이 이 순간을 즐긴다.
지금도 전장에서는 몬스터와의 전쟁이 치러지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일상을 지켜야 하는 법.
축제 기간만이라도 예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면 희망이 생겨날 것이다.
이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시 한번 느끼고 싶다는 마음으로 힘을 내고 나아갈 터.
“좋다.”
작게 중얼거리며 연달아 터지는 폭죽을 바라봤다.
무작정 놀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건 아니다. 따로 하려는 일이 있지, 그래도 잠깐 즐기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슬쩍 바라보자 다들 넋을 놓고 폭죽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폭죽 색에 따라 이리저리 변하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는다.
“그에에.”
덕춘이도 마음에 드는지 작게 운다. 턱을 긁어 주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 츠즈즈즈즈
“응?”
저절로 반응하는 권능.
빛무리가 보인다.
수많은 폭죽으로 가려진 밤하늘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
“이런 씨.”
난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