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화 도움 요청해
가디슈 쪽에서 준비해 온 검은 2개. 대련이라고 말한 만큼 날이 죽어 있는 철검이다.
내가 고른 것은 기사가 내민 검이 아닌 반대 손에 들려 있는 검.
꿈틀. 가디슈의 눈썹이 움직인다.
“이쪽이 더 마음에 드네요.”
가볍게 검을 받아 든 후 휘둘러 봤다. 그동안 혼돈검을 비롯해 등급이 괜찮은 것들을 써서 그런가 싸구려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 츠즈즈즈즈
이 검은 그냥 대련용 검이 아니었다.
권능을 통해 본 정보.
[날카로움을 숨긴 검 (D)]
-뭉뚝한 철검입니다!
-마력을 넣으면 칼날이 살아나죠!
-그리 실력이 좋은 대장장이가 만든 건 아닌 거 같네요.
등급이 낮긴 하지만 아티팩트다.
상황에 따라 칼날을 세울 수 있는 검.
‘어디서 장난질이야.’
자연스럽게 내미는 검을 받을 뻔했지만 권능은 못 속여서.
기사가 들고 있는 또 다른 검은 이것과 똑같이 생겼지만 평범한 대련용 검이다.
아마 실수인 척 날 베어 버리려던 게 아닐까.
대련하자고 할 때부터 날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얕은수를 쓴다.
어쩐지 본인의 기사가 아니라 외부인을 데리고 왔다 했더니만 일이 터진 후 덮어씌우려고 했던 건가.
“그쪽 출전자는 누구지? 짐작은 간다만.”
내가 나서 줬기 때문일까 자신감이 붙은 가멘이 턱짓으로 연회장 구석에 있는 야인을 가리킨다.
키가 엄청 크지는 않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
피부가 까맣게 그을린 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흘낏 내 검을 바라보던 녀석이 기사가 내민 검을 받아 든다.
“흐음, 썩 좋지는 않군.”
“대련용이니까. 왜? 그걸로는 못 하겠어?”
“그럴 리가.”
잇몸을 보인 녀석이 검을 빙글 돌린다.
익숙한 손놀림. 가디슈가 데려온 만큼 어중간한 실력자는 아닐 거다. 놈은 내 실력을 알고 있으니까.
선수는 준비된 상황.
구경거리를 놓칠 리가 없는 귀족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눈치 좋은 하인들이 야외용 의자를 배치했으며, 기사와 가드들이 안전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동그랗게 만들어진 경기장. 중앙에 있는 건 나와 가멘, 가디슈, 야인. 그리고 심판을 보기 위해 서 있는 왕실 기사 한 명뿐.
작게 웃은 가디슈가 옆에 선 야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소개하겠습니다. 서쪽 정글에서 온 파투누라고 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파투누.
가멘의 눈이 살짝 커진다.
“서쪽의 정글이라면 설마, 그곳은 이미 마경일 텐데?”
“예, 그곳에 있던 부족의 생존자입니다. 안타깝게도 부족들은 모두 죽고 혼자 남아 있더군요.”
“왕자님의 은혜 덕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놓치지 않고 가디슈의 인덕을 칭송하는 녀석.
3왕자 파의 귀족들 역시 한마디씩 한다.
“과연 가디슈 왕자님. 변방의 야인들까지 보살피는 성품이 대단합니다.”
“그럼요.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선행을 베푸시는 분 아닙니까.”
“모두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항상 우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얼씨구, 입에 모터가 달렸나. 버튼 누르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입 발린 말이 술술 나온다.
그건 그렇다 치고.
마경이라 함은 몬스터가 점령한 곳을 말한다. 그곳에 있었다는 건…….
‘몬스터 웨이브 한복판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과 같지.’
확실히 이 정도면 가디슈가 데려올 만하다. 나도 몬스터 웨이브를 겪어 봐서 안다.
저쪽도 소개를 했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겠지.
가디슈에게 질세라 내 어깨에 손을 얹은 가멘이 당당히 말했다.
“이블아이 공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까 싶군. 네 생명의 은인이니까 말이야. 이것 참, 그런 자를 구경거리로 만들려 하다니. 심보가 고약하구나.”
단박에 가디슈의 얼굴이 구겨진다.
가멘 역시 만만치 않다. 정곡을 찔렀으니까.
방금까지 가디슈를 칭송하던 이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 2왕자 파의 차례.
“허어, 이블아이 공이 큰 공을 세웠다고 들었네만 설마 3왕자님을 구했을 줄이야.”
“몰랐나? 그 일로 크게 상을 받았었는데. 긱센의 영웅! 왕자의 은인!”
“하하하하! 국민뿐만 아니라 왕자님의 목숨까지 지킨 대단한 자로군!”
“그런 자가 연회장에서 놀잇감이 되다니, 크흠.”
“쉿, 놀잇감이라니. 가디슈 왕자님이 말하지 않았나. 친.목.이라고. 흠흠.”
빠르게 여론이 바뀐다. 그러게 왜 나한테 집착을 하냐.
가디슈의 입장에서는 화날 만하다. 사실 놈을 공격한 건 나니까. 그런데 어쩌나.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술렁이는 분위기. 아직 어느 쪽에도 붙지 않은 귀족들이 눈치를 보는 찰나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라도 왕자님의 유흥에 일조할 수 있다면 그로 족합니다.”
“너, 이!”
내가 굽히고 들어가니 쓰레기가 되는 건 가디슈였다.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여기서 더 말을 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을 걸 아는지 콧김을 뀌고는 물러섰다.
자, 이제 싸우면 되는 건가.
심판과 선수만 남은 자리.
“친목 대련인 만큼 스킬과 아티팩트 사용을 금합니다. 다칠 위험이 있거나 전투 불능, 항복할 시 대련이 종료됩니다. 그럼 준비하시고.”
왕실 기사가 들었던 손을 내린다.
“시작!”
파앙!
손이 내려가기가 무섭게 파투누가 돌진해 온다.
커다란 짐승이 달려드는 느낌. 압박감에 긴장이 될 법도 했지만.
“저돌적이군.”
- 카가가가각!
비스듬히 검을 세워 놈의 검을 흘려 냈다.
힘이 대단해서 매끄럽게 넘기지는 못했다. 뭐랄까 사람이 아니라 곰이 내려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흡!”
검이 흘려지는 것과 동시 몸을 튼 녀석이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근육 덩어리인 주제에 꽤 날렵한 동작.
막기 애매한 각도로 들어오는 공격에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간을 남기고 허공을 베는 검.
놈이 앞으로 크게 발을 내디디며 검을 찔러 왔다. 정확히 목을 노리고 올라온다.
정확히 일직선으로 솟아오른 탓에 타이밍을 잡기 힘들었으나.
- 키릭
나도 검이 있는 건 매한가지라 슬쩍 검을 틀어 놈의 눈을 향해 겨누었다.
이대로 달려들면 본인의 눈 역시 꿰뚫릴 터. 눈을 잃고 목을 찌를 것인가, 아니면 물러설 것인가.
전투라면 전자를 선택했어도 됐지만 지금은 대련 중.
파투누가 찰나지만 고민하는 것이 보였고.
- 빠악!
“크읍!”
그 틈을 노려 놈의 무릎을 걷어찼다.
망설이면 쓰나. 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고. 해서는 안 되는 공격이었다면…….
“시도도 하지 말았어야지.”
놈에 몸을 던지듯 파고들었다. 검을 바짝 붙인 채 회전.
파악!
무게를 실어 놈의 몸을 베었다.
피가 튀는 일은 없었다. 칼날도 없었고, 아티팩트도 발동시키지 않았으니까.
뒤로 밀쳐진 녀석이 반사적으로 가슴을 더듬는다.
역시나. 저놈도 내가 들고 있는 게 아티팩트라는 걸 알고 있다.
- 푹
검을 바닥에 꽂았다.
이미 일격을 가한 거로 대련은 끝났다. 진짜 승부였으면 죽거나 중상이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심판은 눈치를 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매수라도 당한 걸까.
괜찮다. 나도 심심하게 끝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봐, 너 주무기 검 아니지?”
흠칫. 몸을 굳히는 녀석.
몇 번 합을 맞춰 보니 알겠다. 검을 수준급으로 쓰기는 하지만 몸동작이 묘하게 크고 검을 쥐는 폭이 넓다. 거의 손잡이 끝과 끝을 잡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이 녀석은…….
“창이나 폴암 같은 걸 쓰는 거 같은데.”
“…그렇다.”
검을 내린 녀석이 수긍한다.
고개를 돌려 구경꾼들을 바라봤다. 구경거리가 되기로 했으면 확실히 해야지.
“주무기로 다시 하는 건 어떻습니까? 대련용이 아니라 진짜 무기도 상관없는데.”
“준비된 무기는 이것뿐이라.”
“제가 있어서요.”
왕성 곳곳에 기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검문을 하고 아공간 아이템을 압수하더라도 탑을 오른 등반가에게는.
- 떨그렁
- 차르르르륵
인벤토리가 있으니까.
보물 주머니에 넣지 않고 따로 챙겨 둔 물건들이 좀 있다.
그중에는 무기도 있었으니.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보시죠. 괜찮을까요, 왕자님?”
“허락한다.”
“그리하라.”
가멘과 가디슈 모두 동의했다. 이렇게 끝내기에는 아쉽다 이거지.
쭈뼛거리며 다가온 파투누가 바닥에 떨어진 십여 개의 무기 중 하나를 골랐다.
칼날이 달린 폴암. 찌르기뿐만 아니라 베기에도 효과적이다.
리치가 긴 만큼 까다로운 무기.
“이블아이 공, 이것들은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예,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남은 무기들은 인벤토리에 넣지 못하고 압수당했다. 뭐가 됐든 왕성에 무기를 들고 오는 건 안 돼서.
가멘의 기사가 가져갔으니 나중에 돌려받을 수 있겠지.
“그걸 계속 쓰려고?”
“아, 나름 쓸 만하더라.”
난 여전히 대련용 검. 자존심이 상했는지 파투누의 얼굴이 붉어진다.
“대련 재개합니다!”
심판이 시작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주무기를 들었다 이건지 아까보다 훨씬 안정적인 자세로 대응하는 녀석.
눈에 살기가 감도는 것이 카운터를 치며 목숨을 노리려는 것 같다.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내 목숨 원하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냐.
속으로 혀를 차며 검을 내리그었다.
- 콰아아아앙!
검과 폴암이 빠른 속도로 격돌한다.
사납게 웃으며 창대에 힘을 더하는 녀석.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깜빡하고 안 말해 준 게 있다.
인벤토리에 넣어 둔 무기.
-쩌저적, 콰창!
불량품이다.
“이런 개─!”
- 빠악!
폴암을 부수고 들어간 대련용 검이 놈의 머리를 강타했다.
시원한 타격음과 함께 뒤로 나자빠지는 녀석.
“스, 승자. 이블아이!”
기절한 파투누를 확인한 심판이 내 승리를 알렸다.
* * *
왕실 연회가 끝난 후.
가디슈의 집무실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조현수와 싸웠던 파투누는 보이지 않았다. 시합에 지는 것과 동시에 밖으로 내쫓은 것.
그에게 약속했던 보상은 지급하지도 않았다. 죽이지 않고 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고 가디슈는 생각했다.
그만큼 그의 심기는 불편했으니까.
- 콰앙!
테이블을 내리친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블아이, 그 자식에게 놀아나다니!”
이번 연회는 제법 중요한 자리였다. 2왕자파와 3왕자파로 나뉜 지금, 중립을 지키고 있는 귀족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이후에 있을 대업에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대련을 빙자해 2왕자의 체면을 깎고 자신의 선행을 알린다. 이블아이의 능력이 거품이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그 뒤에 벨브레그가 있다고 선동하는 것까지 준비해 뒀건만.
혈압이 오른 그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한두 번 방해받은 게 아니다. 긱센은 무사했고 출장은 아무런 피해 없이 지나갔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세계는 혼란에 빠지고 하얀 나무와 하얀뿔이 격돌해야 했다.
이블아이를 비롯해 핥짝이와 냥펀, 탈모맨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옷차림이 괴상해서 더 열받는다.
위험한 놈들.
‘더 놔두면 안 돼.’
상위층의 숭배자들 역시 탑이 존속되길 바라는 이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다. 등반가들이 혼돈 수치를 제대로 얻지 못하도록 하는 것.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지 못하면 탑은 유지된다. 100층에 도전할 수 없으니까.
직접 나서서 경계를 사는 것보다는 뒷수작을 벌이는 게 기본이었는데.
“놈들이 혼돈 수치를 얼마나 받았을까.”
“미래가 이 정도로 바뀐 걸로 봤을 때 최소 15에서 20입니다.”
가디슈의 물음에 그의 개인 비서이자 숭배자인 이사벨라가 대답했다.
“많군.”
상위층은 시나리오 형태로 굴러간다.
70층대에 준비된 시나리오는 3개. 그중 71-73층 시나리오, 하얀 나무와 하얀뿔은 첫 번째 시나리오다.
고작 첫 번째 시나리오를 지나는 중에 20점을 모았다라.
이 정도 포텐이면 100점을 모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이블아이는 이미 100점을 훌쩍 넘겼지만 그는 모르는 사실이었다.
가디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일정보다 빠르지만 작전을 진행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그의 명령에 집무실에 대기하던 이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이 빠져나가고 남은 인물은 가디슈와 이사벨라. 가디슈가 손가락을 튕긴다.
“유헤다 님께 연락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괜찮을까요?”
“저대로 위로 올려보내는 것보다는 낫겠지.”
여기서 확실하게 끝낸다.
골드 등급인 유헤다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할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