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66화 (366/740)

366화 왕위 계승자

갑작스러운 왕족의 행차.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명백한 실례였으나 뭐라 하는 자는 없었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 왕족은 절대적인 존재였으니까.

73층으로 넘어오며 자연스럽게 익힌 예절로 그를 맞이했다.

“누추한 곳을 찾아 주셔 몸 둘 바를 모르겠다구요.”

냥펀의 말투야 평소 같지만 시스템이 알아서 조절해 주니 상관없었다.

“연회에서 돌아온 직후라 무기는 착용하지 않았습니다만 확인해 주십시오.”

기사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굳이 문젯거리를 만들 필요는 없는 법. 먼저 말하기 전에 무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게 마음에 드는지 가멘이 눈짓을 줬고.

“실례하겠습니다.”

기사가 다가와 몸을 살폈다.

소매와 다리, 품까지 꼼꼼히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핥짝이와 냥펀에게도 여기사가 다가가 무기가 있는지 확인했다.

핥짝이의 키가 워낙 커서 조금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무탈하게 점검이 끝났고.

“이상 없습니다.”

“아티팩트가 있기는 한데 전부 방어형이라 무기로는 쓸 수 없습니다.”

안전을 확보한 이들이 거리를 벌렸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고맙군. 자네들도 앉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냥펀이 소파 상석으로 가멘 크롬벨을 안내하자 마치 원래 주인이 것처럼 자연스럽게 앉는다.

왕족쯤 되면 여유가 몸에 배는 건가.

우리도 양옆으로 앉았다. 이곳을 찾아왔다는 건 남들의 눈을 피해 할 말이 있다는 거다. 그것도 급하게.

왜냐…….

‘결혼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되풀이가 끝난 만큼 용무가 급한 이들은 자리를 떴지만 대부분의 귀족은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귀족 사회에서 서로의 인맥을 다지고, 정보를 교류하며, 위세를 과시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특히나 이번에 귀족 서열에 대격변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거기에 왕에게 어필할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자그마치 공주의 결혼식. 왕궁에 틀어박혀 있던 왕족들도 오늘만큼은 얼굴을 비쳤다.

사실상 새롭게 왕가의 일원이 된 벨브레그 장군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게 컸지만 귀족들이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이 녀석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정상인데.’

굳이 이곳으로 왔다? 왕족과 귀족들이 다 저기에 있는데?

왕족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할 리가 있나. 그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있을 텐데.

귀족이라고 하나 그들이 따르는 파벌이 있을 게 분명했다.

왕가에 대한 정보가 워낙 가려져 있어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한 가지 짐작 가는 건 있다.

‘냥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거야.’

여러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이쪽이 가장 가능성이 크다.

냥펀 역시 같은 생각인지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환영이다.

이번 챕터의 이름은 왕으로 시작된다. 뭐가 됐든 왕가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번 결혼식도 그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닐까 추측 중.

“마실 것을 내오겠습니다.”

“고맙군.”

핥짝이가 슬쩍 일어나 차를 타려고 하자 기사들이 길을 막는다.

보좌관을 보이는 여인이 왕자에게 속삭였다.

“음식은 아직 검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괜찮다. 안전한 건 좋지만 도가 지나치면 안 되는 법. 냥펀 백작을 그렇게까지 경계하고 싶지 않군.”

신뢰를 쌓겠다는 의미.

그의 말에 기사들이 자리를 비켰고. 핥짝이가 차를 준비하는 사이에 왕자가 본론을 꺼냈다.

“이미 눈치챘을 거라 생각하네만 그대를 찾아온 건 내 사람으로 삼기 위함이지.”

역시나, 예상했던 말이 나왔다.

때마침 핥짝이가 차를 내왔고 가멘과 냥펀이 차를 들었다.

약간의 텀. 겉으로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냥펀도 머리 꽤 굴리고 있을 거다.

“왕가의 분위기는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을 테지.”

“조금 들은 게 있죠. 1왕자님께 변고가 생겼다고.”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다.

중앙 귀족이 되면서 알게 된 내용 같은데.

가멘 역시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 때 1왕자가 없었어.’

나도 한 번이지만 왕성에 들어가 알현한 적이 있다.

그때 봤던 왕가의 일원은 왕과 왕비. 사생아인 가디슈를 포함해 3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가 있었다.

결혼식에 참가한 왕자와 공주는 4명. 1왕자는 불참했다.

“몸이 안 좋으시다고. 흠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몸에 좋은 영약! 어렵게 구했다구요.”

이때다 싶었는지 냥펀이 품에서 영약을 꺼내며 손을 비빈다.

여기서 아부를? 대단한 녀석.

피식, 웃은 가멘이 손을 내젓는다.

“아니. 필요 없네. 마음만 받지.”

“그럴 줄 알고 2왕자님의 것도 준비했습니다!”

원 플러스 원 행사도 아니고, 또다시 품에서 영약을 꺼낸 냥펀이 슬며시 내민다.

방금 것과 달리 금박 장식이 박힌 목함에 들어가 있다.

비밀을 이야기하듯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속삭이는 녀석.

“이게 좀 더 좋은 물건이라구요. 스태미너에 좋다나. 흠흠, 이 정도로만 설명하겠습니다.”

이야, 빌드업을 이렇게 하네.

더 좋은 걸 나중에 주면서 어필하다니. 이게 중앙 귀족의 정치인가.

어느새 하얀 나무에 최적화되어 버렸다.

핥짝이도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솔깃했는지 별말 없이 목함을 챙겨 넣은 가멘이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처음 준 영약을 도로 밀었다.

“선물은 고맙게 받겠지만 형님 건 필요가 없네.”

필요가 없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가멘이 작게 읊조렸다.

“죽었거든.”

* * *

하얀 나무.

제2 천계의 중심이자 귀족들이 모이는 공간이었으나 면밀히 따지면 2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

귀족들이 기거하며 업무를 보는 외곽과 왕성이 위치한 내부.

다른 곳에서는 대접받는 귀족들도 왕성에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왕족과 중앙 귀족쯤 되는 이들, 혹은 왕명을 받은 자들.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극히 까다로우며, 보안을 담당하는 기사들의 수준도 최상급인 곳.

그곳에 나와 핥짝이, 냥펀이 있었다.

“하하하. 이렇게 보니 느낌이 다르군.”

“얼굴이 폈습니다, 벨브레그 장군.”

왕가의 초대를 받았다.

벨브레그가 왕성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자리. 명목상으로는 그랬다.

“흐음, 벨브레그 장군이라. 이거 좋지 않군.”

“동부전선 지휘자라고는 하나 사실상 군 전체를 휘두르는 인물 아닙니까.”

“우리도 만만치 않아. 걱정 말게.”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이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와 관목, 야외 테이블에 올려진 음식. 한쪽에 마련된 공연장에서는 악단이 나른하고 평온한 곡을 연주했다.

겉으로만 보면 평화로웠으나 귀족들의 얼굴은 냉담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날 선 분위기에 공기마저 차갑게 가라앉는 듯했다.

“쟤들 왜 이리 꼬나보냐. 콱 씨, 눈깔을!”

“핥짝아, 참앙. 건들면 난리 난다구.”

“무슨 소리. 셋밖에 없다는 백작 중앙 귀족이 우리 냥펀인데!”

“아, 아직 쩌리야.”

우리와 거리를 벌린 귀족들의 적개심에 핥짝이가 인상을 쓴다.

그들 중심에 있는 건 가디슈 크롬벨. 그들의 반대편, 우리 쪽에 있는 건.

“다들 와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왕자, 가멘 크롬벨.

나와 멤버들은 가멘의 초대를 받았다. 냥펀도 지위가 높고, 벨브레그와 관계도 좋으니 명분은 충분했다.

양쪽으로 나뉘어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였냐.’

왕위 계승자였던 1왕자가 사망. 붕 떠 버린 후계자 자리를 두고 가멘과 가디슈가 경쟁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정통성 문제가 따라오니까.

서자인 가디슈보다 2왕자인 가멘이 후계자가 되는 게 상식적인 일이기는 하나, 세상일이 꼭 순리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니까.

지금만 봐도 가디슈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더 많다. 첫째 공주 역시 저쪽에 가담한 상태.

“결혼 축하한다, 로앙.”

“고마워요.”

벨브레그와 결혼한 둘째 공주는 가멘을 지지했다.

가멘의 축하에 로앙 크롬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결혼에 정치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이쪽이 냥펀 백작?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오, 손 고우신 거 봐. 흠흠! 피부는 계속 관리해야 하죠. 짜잔! 북부 지방에서 가져온 핸드크림입니다! 선물이에요.”

“어머, 이런 걸. 나중에 차라도 한잔해요.”

“좋죠!”

공주와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선물을 찔러 넣는 냥펀.

이제 놀랍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도 2왕자 편에 섰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보다 가능성 있는 쪽으로 붙었겠지만 가디슈가 탑 숭배자인 걸 안 이상 그럴 수는 없으니까.

사실상 군권을 휘두르는 벨브레그와 전쟁 물자 전체를 관리하는 냥펀이 합류하며 기울었던 힘의 균형이 얼추 맞춰졌다.

“저쪽에서 신경 써야 할 건 갈색 머리 배불뚝이얌. 소펜 후작. 남부 지방은 다 먹었다고 보면 돼.”

공주와 담소를 마치고 옆으로 다가온 냥펀이 속삭였다.

두툼한 배를 내민 채 술을 홀짝이는 남자.

부유함으로 따지면 귀족 중 제일이라나.

냥펀이 보급품을 관리한다면 그 보급품을 만들어 내는 인물.

마음을 독하게 먹는다면 보급품 공급 자체를 틀어막을 수도 있었다.

군부대에 숨통을 쥘 수도 있다는 것. 그랬다가는 전선이 붕괴될 가능성도 있으니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겠지만 또 모르지.

‘권력이라는 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고들 하니까.’

결국 왕위를 계승하는 쪽이 모든 걸 먹고, 진 쪽은 나락이다.

아무래도 미래가 바뀌며 이쪽으로 흐름이 흘러간 거 같다.

하얀 나무와 하얀뿔은 별다른 마찰 없이 협력 관계로 발전 중이니까.

‘하얀 나무 내부에서 일이 터진다고 봐야지.’

모든 정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1왕자의 죽음도 의문이 많다. 장례식도 비밀리에 치러졌고, 2왕자의 말에 따르면 독살 가능성도 있다고.

확실한 것이 아니다. 따로 조사단이 꾸려졌다는 것만 안다. 사인이 명확하게 밝혀지고 나서야 대중에게 알려질 예정.

복잡한 상황 속 여러 사람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여기, 사람이 아닌 덕춘이는 예외지만.

“그헤헤헤헥!”

“야야, 지금 그러면 안 돼.”

신나서 테이블 위로 올라가 음식을 집어 먹고 있는 덕춘이를 붙잡아 어깨에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저저, 하여간 족보 없는 것들은 예의라곤 없군요.”

“두꺼비가 웬 말입니까. 에이잉.”

“저런 것도 가지고 와도 되는 줄 알았으면 우리 집 강아지도 데리고 올 걸 그랬군요. 와하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하하하!”

지들끼리 웃으며 신경을 긁는다.

두꺼비 아니고 개구린데. 우리 덕춘이 어딜 봐서…….

“끄억.”

…살이 좀 쪘나. 살짝 넙데데해진 것도 같고.

아냐, 그래도 내 눈엔 덕춘이가 최고야. 그럼 그럼.

덕춘이의 턱을 긁어 주며 달래 주고 있는 와중에도 상대 쪽의 비아냥은 거세졌다.

“2왕자님이 조급하긴 한가 봅니다. 저런 쭉정이들도 끌어들이고.”

“가디슈 왕자님만큼의 인덕이 없는 게지요.”

“전하께서 후계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 아니겠습니까.”

자연스럽게 나를 시작으로 가멘 크롬벨을 비난하기 시작하는 이들.

평소였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으나 명백히 파가 나뉜 지금은 아니었다.

벨브레그를 비롯한 2왕자 사람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대로 넘어가서는 체면이 안 서는 상황. 냥펀이 나서려던 그때.

“하하하. 그만하시지요. 좋은 자리에.”

“아이고, 오셨습니까.”

가디슈가 선수를 쳤다.

자기 귀족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녀석.

“형님, 귀족들이 좀 짓궂은 면이 있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받아 주시죠.”

“가디슈.”

“분위기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축하하는 자린데. 그렇지 않은가?”

고개를 돌리며 묻는 가디슈에게 호응하듯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묘하게 돌아가는 분위기.

“그래서 말인데 분위기 좀 띄울 겸 경기나 합시다.”

까딱.

가디슈가 손짓에 기사 한 명이 칼 2개를 들고나온다.

“구경거리에는 싸움 구경만 한 게 없지요. 어떻습니까? 한 명씩 사람을 보내 친목 대련을 하는 건?”

정확히 나를 보며 말하는 녀석.

친목 대련은 개뿔. 2개로 나뉜 파. 지는 쪽은 창피를 당하게 된다.

검까지 준비했다는 건 싸울 전사도 미리 준비했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저쪽 구석,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야성적인 인상의 사내가 서 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한 가멘이 입술을 깨문다. 피하려는 눈치.

“왕자님, 갔다 오겠습니다.”

앞으로 나섰다.

“괜찮겠나?”

“물론이죠.”

시비 거는 건 못 참아서.

“찍어 누르고 오겠습니다.”

기사가 내민 검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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