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73층
탈모맨의 등장. 기습한 이들이 당황한다. 갑작스러운 전력이 몰려든 탓도 있겠지만…….
“너희가 레지스탕스라고? 본 적도 없다, 이 자식들아!”
“야, 거기 빡빡이! 하얀뿔 마크나 제대로 붙여. 거꾸로다, 인마!”
“어디 지부냐, 어? 이쪽은 우리 영역인데.”
레지스탕스로 위장한 놈들이 진짜 레지스탕스를 마주쳤으니 일이 꼬이는 건 당연했다.
가디슈 이 녀석, 진짜 레지스탕스를 매수하지는 않았을까 고민했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하지. 하얀뿔이 하층민들 위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체계가 없는 곳은 아니다.
급속도로 덩치를 불렸음에도 통제가 된다는 건 그만큼 지휘부의 능력이 있다는 것.
믿을 만한 이들이나, 해당 지역 토박이를 중심으로 지부장을 두었으니 큰 마찰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하얀뿔 지부가 생기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지역 깡패들을 정리하는 거랬지.’
세계가 개판이 되면서 치안이 안 좋아지는 건 기정사실.
영주는 몬스터를 처치하고 지원을 받는데 정신이 없다. 이때다 싶어 동네 양아치들이 조직폭력단을 만드는 건 흔하다.
그런 놈들을 때려잡아 주니 영주민들의 호감을 사는 건 덤. 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덕분에 영주가 레지스탕스를 잡으려 할 때마다 주민들이 도움을 준다고…….
상위층에 저항하며 하층민을 보호한다는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잘 이어 나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후방 걱정도 줄었겠다 망설임 없이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거센 홍염이 전방을 휩쓸었다. 난데없는 불세례에 습격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오오, 이런 스킬도 가지고 있었나?”
“소문 들었던 거 같아. 긱센에 폭탄마가 하나 있다고.”
“그럴 만하네.”
병사들의 수군거림.
부인은 못 하겠다. 폭탄마 칭호도 가지고 있어서.
벨브레그야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상관없겠다만.
“저 정도 실력이면 어디 가서도 한자리 꿰찰 수 있겠는데요?”
“냥펀 백작은 언제 저런 인물을 섭외한 건지. 그동안 드러내지도 않고 말이오.”
“저자뿐이겠습니까. 뒤에 하인들과 있는 자도 보통이 아닙니다.”
“끄응. 냥펀 백작이 우리가 모르는 인재를 몇이나 더 데리고 있을지. 무서울 정돕니다.”
“왕도에 도착하면 자리를 한번 만들어야겠군요. 지금이라도 가깝게 지내는 게 좋겠어요.”
귀족들 역시 나와 핥짝이의 활약에 감탄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냥펀의 귀족 서열이 올라갈 거 같다.
예전에는 업무에 비해 직위가 낮아 서열이 살짝 밀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대로 가면 중앙 귀족 사이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왕도에서 머무는 만큼 영지는 따로 없긴 하지만…….
‘지금 시기에는 영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지.’
오히려 발이 묶이는 경우가 많다.
자식에게 영지를 물려주고 왕도에 올라오는 이들도 있을 정도.
뭐, 여기까지는 부차적인 거고. 진짜 중요한 건.
“후퇴! 후퇴해!”
“제기랄, 이런 말은 없었잖아!”
“떠들 힘 있으면 달리기나 해, 멍청이들아!”
습격을 가한 놈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귀족과 가디슈 어느 쪽도 다치지 않았으며, 진짜 레지스탕스가 옴으로써 하얀 나무와 척을 지는 것도 피했다.
가디슈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건 물론이고, 도움을 받은 이들은…….
“레지스탕스라고 했나. 크흠,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긴 하네만 도와줘서 고맙네.”
“듣던 거랑은 분위기가 다르더군. 이번 일은 기억해 둘 것이야.”
어찌 됐든 고마움을 전했다.
레지스탕스 탄생 이유가 하층민의 권리 보장인 만큼 껄끄러운 관계인 건 맞다.
주목해야 할 건 서로가 맞춰 가는 과정이 폭력적이냐 아니냐의 차이.
어느 정도 양보하고 존중해 주는 것과 한쪽이 찍어 누르고 그에 저항하는 건 전혀 다르니까.
“하하하하! 별말씀을. 그냥 길 가다 도운 건데요, 뭘.”
“맞지. 탈모맨은 다르다고!”
“탈모! 탈모! 탈, 아아. 잠만요. 지부장님.”
탈모를 연호하던 대원을 제압한 탈모맨이 슬쩍 나와 핥짝이에게 윙크한다.
마치 나 잘했지? 하고 묻는 모양새.
티 안 나게 엄지를 세워 줬다.
이쪽은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 남은 건 도주하는 놈들을 잡는 것.
벨브레그도 그렇게 판단했는지 병력을 지휘했다. 탈모맨도 마찬가지.
“도주하는 이들을 잡아라! 생포해서 심문할 것이다!”
“우리도 보태지. 얘들아, 잡아!”
벨브레그와 탈모맨의 지시에 병사들과 대원들이 뛰쳐나갔다.
대원들 모두 이 지방에서 오래 살아온 만큼 지리에 밝다. 병사들 역시 발이 빠른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니 습격자들을 잡는 건 시간문제.
가디슈를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잘하면 이번 기회에 놈의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지 않을까?
놈도 바보가 아닌 이상 조치를 취해 놨겠지만 한동안은 몸을 사려야 할 거다.
왜냐…….
“그, 습격자들은 내가 직접 심문하지. 저번 습격도 있었…….”
“왕자님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장군, 왕자님을 암살하려던 자를 직접 마주쳤던 만큼 제가 냥펀 백작의 지원을 받아 취조하겠습니다. 장군님도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아무리 바빠도 후한을 남겨 둘 수는 없는 노릇. 왕자님께서 손을 더럽힐 수는 없는 일이지.”
가디슈가 뭐라 하기 전에 수사권을 받아 냈으니까. 벨브레그도 동의했고.
녀석이 담당으로 되면 어떻게든 증거와 증인들을 조작했겠지만 우리 쪽으로 오면 말이 다르지.
사실 내가 끼어들 만한 신분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냥펀의 직속 부하 위치니. 귀족들 사이에 말을 주고받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불쾌해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아니지만.
“왕자님을 지킨 일등 공신답군. 이토록 왕실에 충직하다니.”
“그렇지. 저런 저급한 놈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왕자님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이야.”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 냥펀 백작의 지시로 숭배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저들도 그쪽일지 모르네.”
“암, 이런 건 전문가한테 맡겨야지.”
벨브레그와는 긱센을 기점으로 신뢰를 다졌으며, 공식적으로 왕자를 구하며 위세가 올랐다.
냥펀을 의식한 귀족들이 은근히 동조해 주기까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가디슈.
귀족들 사이, 이를 악문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암전.
[72층 클리어]
[챕터Ⅱ- 양극 종료]
-스스스스스스스
71층을 클리어했을 때와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어두운 공간, 습격자들을 처치하는 모습이 화면이 되어 멀어진다.
홀로 남은 영화관처럼 우두커니 자리에 앉아 흘러가는 화면을 지켜봤다.
무사히 끝난 출장. 잡혀 온 괴한들. 심문하는 벨브레그. 귀족들의 움직임. 왕성. 레지스탕스.
“그에에.”
“덕춘아, 너도 고생했다.”
슥슥. 나와 함께 전송실로 떨어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핥짝이를 도와 후방을 지켰으니까. 귀족은 물론이고 하인들 중에도 사망자가 없다.
72층은 내가 생각해도 꽤 괜찮게 끝났다. 전환점이 되는 사건들을 연달아 막았으니까.
조금은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고.
[분쟁의 씨앗이 사라집니다.]
[혼돈 수치 +20점]
[제2 천계가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렇지!”
“궥!”
덕춘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저번과 달리 확실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했으니까.
역시 상위층의 메인은 그거다. 멸망이 가속되는 계기를 고쳐 나가는 것.
그게 뭔지도 모르고, 언제 일어나는 사건인지도 모르지만 바로 잡아야 한다.
미리 봐 두자. 이건 연습 게임이다.
“본 게임은 우리 세계야.”
실제로 우리에게 발생할 사건은 어떤 종류일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탑에 있어 알 수 없을 뿐.
아니, 밖에 있었더라도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곳은 등반가 모두에게 적어도 한 번은 사건에 개입할 기회를 주니까.
실제 세계에서는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이 터질 수도 있었으며, 내가 잠든 시간에 변환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난이도 자체가 다르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상위층에 올라오는 녀석들이 많아야 해.”
혼자서 안 된다면 여러 명이 경각심을 가지고 움직이면 되는 거 아닌가.
모든 위기를 막는 건 못하더라도 막을 수 있는 건 막을 수 있도록.
-촤라라라락
화면이 끝을 향해 다가간다.
우우웅. 이명이 커진다. 몸이 붕 뜨는 느낌.
73층으로 갈 때가 됐다.
[73층으로 진입합니다.]
[챕터Ⅲ- 하얀 나무와 하얀뿔]
하얀 나무와 하얀 뿔이라.
맨 처음 71층에 들어올 때 떠올랐던 문구다.
73층까지 이어지는 시나리오의 전체의 이름.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원래대로의 흐름으로 진행되었다면 이번 챕터는…….
“두 세력의 전면전.”
“그에에.”
지금은 어떨까. 시스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어쩌면 강제로 사건을 비틀어 기존과 같은 방향으로 진행될 가능성도 있다.
그럴 거 같지는 않지만. 내가 아는 시스템은.
[변환점이 바뀌었습니다.]
[챕터Ⅲ가 변경됩니다.]
결코 등반가가 이룬 성과를 무시하지 않으니까.
도전과 성공. 모든 과정을 이겨 낸 자에게는 합당한 보상을 내린다.
-파앗!
순간적으로 빛이 터져 나왔다.
반사적으로 찌푸린 눈. 그 사이로 희미하게 새로운 메시지가 보였다.
[73층]
[챕터Ⅲ- 왕…….]
-사아아아아악!
시야가 바뀌었다.
* * *
전송실에서 빠져나온 건가. 주변을 살피자 핥짝이가 보인다.
일단 냥펀의 집무실은 아니다. 복도? 하얀 나무인 건 맞는데 냥펀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뭐였지. 제대로 못 봤는데.’
73층으로 넘어가지 직전 떠올랐던 메시지를 되짚었다.
챕터 이름이 바뀌었다. 왕까지는 봤는데 뒷부분은 못 봤다.
왕이라면 제2 천계의 왕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왕으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였던 걸까.
왕, 왕, 왕자? 왕명주잠자리? 아니, 이건 아니고.
“야야, 너 뭐냐.”
“어?”
고민에 빠졌을 때, 핥짝이가 나를 불렀다. 내가 왜? 뭐 했나?
눈을 꿈뻑이자 녀석이 내 위아래를 훑었다.
나도 따라 몸을 살폈고.
“오?”
“궤?”
작게 감탄했다.
평소 입고 다니던 옷이 아니다. 펠라인 세트는 더 아니고.
화려하게 꾸며진 백색 정장. 정장이 맞나? 장신구가 달려 있어서 잘 모르겠다. 가슴팍에 훈장도 달린 것이 출장 때 공을 인정받은 모양.
“그러는 너도 옷차림이 다른데?”
“엥? 진짜네?”
나만 이런 게 아니다. 핥짝이 역시 평소에 입고 다니는 은갈치 정장이 아니다. 드레스 차림. 수수한 장신구도 착용했다.
이곳은 하얀 나무. 하녀 신분으로 입고 있을 리가 없는 옷차림이다.
하이힐까지 신었는지 체고가 더 높아졌다. 어고. 목 아파.
“2미터 돌파 축하한다.”
“오냐. 이제 널 지팡이로 쓸 수 있겠구나.”
장난스레 녀석이 내 머리에 손을 얹는다.
그러다 흠칫. 진지한 표정을 지은 핥짝이가 손에 힘을 준다.
“야, 너 두상이 동글동글한 게 배구공 같다? 한 대만 쳐 봐도 돼?”
“…되겠냐.”
“진짜 살살 칠게! A퀵 스파이크 느낌으로 파바박!”
“악! 네가 치면 머리가 톡 떨어져서 절로 날아간다고!”
“왼손! 왼손은 괜찮잖아!”
자연스럽게 내 목숨을 노리는 녀석을 피해 도망치려는 찰나.
[73층]
[과거의 기억이 생성됩니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현시점까지 진행된 상황들이 머리에 각인되었다.
출장 이후의 기억들. 약간의 시간 지난 후, 나와 핥짝이는 서로를 바라봤고.
“이거, 설마?”
“…일단 미안.”
난 사과 먼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