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숲으로
왕성 정문. 일단의 병력이 한자리에 모였다.
비교적 가벼운 옷차림에 개인 짐을 챙겼으며 군인뿐만 아니라 온갖 물자를 챙긴 마차도 줄지어 늘어섰다.
“줄 똑바로 묶어! 가다가 쏟으면 난리 난다.”
“식량이랑 물은 체크했고, 여물도 확인했어? 안 했다고? 말은 밥 안 먹냐, 이 자식아!”
“길잡이들은 준비 끝났대? 크흠. 요즘 길이 자꾸 바뀌어서 정신이 없단 말이야.”
“하여간 몬스터 놈들. 얌전히 구석에 있을 것이지 도로는 왜 부숴 먹는지.”
저마다 투덜거리면서도 빠르게 움직인다.
왕도에서 일하는 만큼 전문적인 솜씨. 약간의 실수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인드로 두세 번 확인을 한다.
왜냐 이번 출장은 자그마치 왕족이 움직이니까.
그뿐일까. 몇몇 귀족까지 합류했으니 하인들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다들 들으셨겠지만 구조 물품 전달 및 사기 증진, 현장 확인 후 평가를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행렬 선두, 화려한 옷차림의 가디슈 크롬벨이 말을 이었다.
사생아. 삼 왕자. 왕위 계승에 가장 뒤쳐진 존재이자 정통성이 비교적 약한 이였기 때문에 이번 출장에 선택되었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말한 건 아니고 냥펀과 핥짝이의 정보에 의하면 그렇다.
내가 봐도 그런 거 같다. 가뜩이나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괜히 왕위 계승자를 내보낼 수는 없으니까.
“분위기가 심상치 않죠? 그런 만큼 당당히 움직여야 합니다. 움츠러드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행동이니까요.”
“맞는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귀족의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
“아랫것들의 발버둥 따위 불길에 달려드는 나방의 날갯짓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허허허.”
가디슈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허허 웃는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 행진은 하얀뿔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역할도 있었다.
너희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우리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오히려 몸을 숨기는 것은 레지스탕스일 것이며, 그것이 하층민과 귀족과의 차이다.
대충 이런 거지.
굳이 왕족이 직접 움직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만남이 약속된 영지 중에 공작을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어 그에 걸맞은 인물이 가야 하는 것도 있겠지만.
“이블아이, 준비는 끝났나?”
“예, 필요한 건 전부 챙겼습니다.”
벨브레그의 말에 몸을 훑어봤다.
펠라인 세트, 덕춘이, 아공간 아이템. 오케이, 완벽하다.
손가락으로 덕춘이의 턱을 긁어 줬다.
“그에에에.”
좋다고 턱을 치켜드는 녀석.
신기한 눈으로 덕춘이를 바라보던 벨브레그도 가벼운 짐을 말 위에 얹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등반가는 모두 인벤토리를 가지고 있다. 덕분에 다른 이들보다 짐이 적다.
딱 한 명만 빼고.
“으으으. 행진하면서 빨래할 생각하니 벌써 끔찍하네. 선수촌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와 함께 지목된 핥짝이.
다른 하인들과 섞여서 짐을 옮기고 있다. 본인 물건이 아니더라도 챙겨야 할 게 워낙 많아서 등에는 큼지막한 배낭을 메고 있다.
본인 몫도 상당하지만 몸이 약한 하인들의 물건을 대신 들어 줘서 더 그렇다.
은근히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성격이라 하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벨브레그가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냥펀 백작이 데리고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군. 힘이 장사야. 주변인을 배려하는 것이 인망도 있고, 하인보다는 군인이 성향에 맞지 싶은데. 탐나는 인재란 말이지.”
“아하하하. 나중에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꼭 좀 부탁하네.”
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얼버무렸다. ‘하인 생활 그만하고 입대할래?’ 차마 물어볼 용기가 안 나서.
시선을 돌렸다. 행진 대열은 이미 완성된 상황. 선두에는 길잡이와 정찰대가 대기했고, 중앙에는 가디슈를 비롯한 귀족들의 마차가, 후열에는 물자를 담은 마차가 줄지었다.
그들을 보호하듯 양옆에 도열한 기사들과 병사들.
어지간한 상단보다 큰 규모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잡부가 너무 많아 보이는데.’
하인들이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당장 기사들도 시종을 몇 데리고 있고, 가디슈와 귀족들의 수발을 들 하인들까지 합세하니 그 수가 상당하다.
그들까지 보호하기에는 병력이 조금 빠듯한 느낌이기는 하다만…….
“자자. 다들 긴장 풀지 말고. 신발끈 꽉 조이고. 힘들거나 아프면 말해. 물통 다 채웠지? 무겁다고 안 채웠으면 지금이라도 채워라. 딴 애들 거 뺏어 먹다 걸리면 뒈져.”
“네, 언니!”
“그, 그럼요. 다 채웠… 어이쿠. 수통이 깨졌네? 헤헤. 다시 채워 올게요.”
“쓰러지면 누나가 안아 주나요?”
“아니, 머리채 잡고 끌고 갈 건데.”
“오. 오오!”
“오오는 새꺄.”
저쪽은 핥짝이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거다.
이미 하인들 사이에서는 큰언니, 대빵, 정신적 지주 정도의 위치다.
믿고 따르는 녀석들도 제법 보인다. 그러니까 온갖 소문을 다 들고 오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핥짝이한테는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
시야도 넓고 전투력도 보통이 아니니 크게 걱정은 안 한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덕춘아, 핥짝이 옆에서 도와줘라.”
“그에에.”
덕춘이를 보냈다.
난 가디슈가 직접 호위로 임명한 상태라 문제가 생겼을 시 직접 돕기 어려울 수도 있다.
지켜야 하는 우선 순위가 다르니.
혹시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야 주변에 병력이 많으니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출발합니다.”
-뿌우우우우우
나팔 소리와 함께 행진이 시작됐다.
나 역시 말에 올라타 뒤꿈치를 쳤다. 가벼운 투레질과 함께 앞으로 걷기 시작하는 군마.
귀족들이 있는 중앙의 앞부분. 좌측에는 벨브레그가 우측에는 내가 자리 잡았다.
가장 전투력이 높은 사람이 위치하는 곳. 불만을 품은 자는 없었다. 긱센 전투를 통해 실력은 증명되었으니까.
“처음 가는 지역은 포투카라고 했었나.”
냥펀이 따로 건네준 서류를 살폈다. 냥펀은 직접 갈 수 없으니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줬다.
어디 보자. 포투카, 그 다음이 테메른.
간략하게 그려진 지도를 보며 이동 경로를 확인했다.
눈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예민한 건가, 이거…….
‘하얀뿔 지부가 있는 곳들인데?’
탈모맨이 말해 줬던 하얀뿔 지부들. 그것들이 위치한 곳과 행선지가 묘하게 겹친다.
직접 들르는 곳도 있고 사이를 지나가는 곳도 있고.
그중 한 곳은.
‘탈모맨이 지부장으로 있는 곳이야.’
어쩌면 이번에 만날지도 모르겠다.
꾸욱. 말고삐를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행군이 시작되었다.
* * *
“키햐아아악!”
“크하아아앙!”
뛰어오른 몬스터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빠르게 내지른 일격에 녀석의 목이 잘려 나간다. 흩뿌려지는 피. 얼굴에 튄 피를 닦을 틈도 없이 연달아 검을 휘둘렀다.
“합!”
말을 박차고 땅에 내려섰다. 이동 중일 때라면 몰라도 전투 시에는 두 다리로 움직이는 게 편해서.
각성자가 된 만큼 말 위에 올라타는 건 아무런 메리트도 없다. 몬스터랑 비빌 수 있을 정도의 명마라면 또 모르지만 내가 탄 말은 평범한 군마다.
- 촤아아아악!
다리 사이를 뚫고 들어온 바이퍼의 머리를 벴다. 피와 함께 쏟아지는 독.
일반인. 아니, 어정쩡한 헌터라도 닿으면 녹아 버릴 맹독이었으나.
[독 내성 (S) Lv.10]
- 치이이이익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 정도는 귀엽지.
콰득! 머리가 사라졌음에도 버둥거리는 놈의 몸체를 밟아 으깼다.
정면에서는 벨브레그가 몬스터를 휩쓸고 있었으며, 병사들은 안으로 뭉친 귀족과 하인들을 지켰다. 어지럽게 울리는 병장기 소리.
얼핏 위험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을 보자면 그렇지만도 않았다.
몬스터들이 집어삼킨 지역이 많은 만큼 이 정도의 기습은 일상이었으니까.
스스로 몸을 지킬 힘이 없는 하인들이야 서로를 붙잡고 떨기 바빴지만 귀족들은 달랐다.
개인 호위도 있을뿐더러 우리가 최우선 순위로 지켜 주고 있다.
마차 문을 연 채 구경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허허. 역시 벨브레그 장군의 위용은 대단하군.”
“직접 나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려. 전장을 지휘하는 모습이 맹호와 같습니다.”
“저쪽, 알록달록한 이가 그자지요? 긱센에서 활약했다는?”
“아. 맞습니다. 냥펀 백작의 직속 부하라던데요. 실력이 준수합니다.”
본인들을 위해 싸우는 것조차 구경거리라 이건가.
태연한 모습에 마빡 한 대씩만 때려 주고 싶다.
신경 쓰지 말자. 어차피 엮일 일도 없는 놈들이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쪽은…….
‘저 자식, 나만 보고 있어.’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마차 창문에 팔을 걸친 채 턱을 괴고 있는 가디슈 크롬벨.
흥미로운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다. 다른 쪽은 보지도 않은 채 말이지.
마치 나를 평가하는 듯한 모습.
“왕자님도 저자에게 관심이 있는 듯합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했군요. 왕자님의 총애를 받을 기회 아닙니까.”
“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노력하게나!”
귀족들이 멋대로 떠든다.
그래. 만약 전후 사정을 몰랐다면 나도 비슷한 생각일지 모른다.
놈이 탑 숭배자인 걸 안 순간부터는 아니지만.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은 나와 핥짝이를 직접 지목했다.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등반가인 걸 확신한다는 거지.’
보통은 시스템 보정으로 우리를 일반적인 천족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저 녀석은 아니다.
아무래도 탑 숭배자는 등반가를 알아볼 수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거 같다.
신경 쓰인다. 시선을 돌려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살폈다.
지금까지 행렬이 공격당한 횟수는 총 4번.
묘하게 공격을 당할 때마다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졌다. 물량이 많아지든 등급이 높아지든 까다로운 조합으로 몰려오든.
마치 슬글슬금 자극해 내 전력을 알아내려는 것만 같다.
과잉 의식일지도 모르겠으나.
[쌍뿔아귀]
-5성급 몬스터.
-평소보다 흥분한 상태입니다.
[메두사]
-5성급 몬스터.
-눈을 마주치면 딱딱! 돌이 됩니다.
-무언가에 쫓기는 기색입니다.
권능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이 심상치 않다.
어디선가 떠밀려 온 듯한 느낌이랄까.
애초에 메두사는 5성급이지만 보스에 해당하는 놈이다. 이런 식으로 무리지어 움직이는 개체가 아니라는 것.
‘일부로 풀어 둔 거 같은데.’
어디까지나 심증.
그래도 혹시 몰라 최대한 스킬을 아끼고 있다.
병력은 충분하고, 벨브레그와 같은 강자들이 있으니 굳이 온갖 스킬을 사용해 날뛸 필요는 없다.
며칠간 계속해서 검만 휘둘렀기 때문일까, 가디슈의 표정이 구겨진다.
한순간 마주친 눈.
손가락을 두들기던 그가 씨익,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벙긋. 그가 소리 없이 말했다.
‘좀 더 해 봐.’
좀 더 하라고? 미간을 찌푸리는 타이밍.
- 삐이이이
숲속 어디선가 미약한 소음이 들렸다.
전투 중에 들린 소리라 들은 사람이 없는 것 같지만 난 똑똑히 들었다.
피리 소리? 몬스터가 낸 소리는 아니다. 인위적인 소리지.
- 투두두두두두
발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거 설마.
“몬스터가 추가로 옵니다!”
“오른쪽에 다수 발견!”
“왼쪽에도 옵니다!”
하, 진짠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절묘한 타이밍.
이쯤되면 가디슈 저 녀석이 일부러 몬스터를 불러 모으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게 내 스킬을 보고 싶은가.
빙긋 웃는 녀석을 보며 나도 실실 웃었다.
절대 안 보여 주지.
- 콰아아아앙!
발을 박찼다.
여태껏 보여 준 적 없는 빠른 움직임.
“이블아이!”
“장군! 안에 들어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절대 놈 앞에서는 안 보여 줄 거다.
가디슈가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