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출장
터져 나오는 비명. 일이 꼬였음을 느끼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추모 행사에 모인 이들 모두가 느꼈지. 정숙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혼란만이 가득하다.
“시민부터 대피시키고 길 터! 너희가 얼타면 어쩌자는 거야!”
“귀족들을 모셔라! 제기랄, 가드까지 죽은 거 같은데 이거.”
“포, 포션 있으신 분! 파편이 형의 복부에 박혔어요! 누구 없습니까!”
까득. 이를 악물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테러다. 노렸다고 보는 게 맞겠지. 모두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할 때를 노린 거니까.
“이거 써요.”
“감사합니다!”
부상자들에게 포션을 던져 주며 폭발이 일어난 곳을 향해 달렸다.
벨브레그는 남아야 한다. 테러범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이번 행사의 목적은 긱센의 희생자들이었으니까.
“유족들과 용사들의 시신을 지켜라!”
“예!”
“대형 짜!”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하는 유족들을 군사들이 보호했다.
벨브레그 역시 의장용 검을 뽑으며 눈에 불을 켰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범인이 잡히면 좋은 꼴은 못 볼 터.
화려하기만 한 의장용 검이었으나 그의 손에 들린 이상 명검이나 다를 바 없다.
“이블아이! 그쪽을 확인해 주게!”
“이쪽은 맡기십쇼.”
이미 내 전투력을 알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신뢰가 생겼다. 같이 싸운 전우기도 하고.
어지럽게 흩어지는 시민을 헤치고 귀족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진입했다.
‘냥펀이 있었다면 좀 다를 수도 있었는데.’
온갖 보호 아이템을 지니고 있으니 테러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냥펀은 하얀 나무에 남아 있었다. 중요한 화의가 있어 참석하지 못한 것.
일대는 아수라장이다. 귀족들이 빠르게 대피하고 있었으며 신경이 날카로워진 가드들이 위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길을 뚫고 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부분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다.
문제는 이쪽.
“남작님! 포션 더 부어!”
“크으윽! 내 팔이, 빌어먹을.”
귀족들이 다쳤다는 거다. 단순한 타박상만 입은 거면 그나마 다행.
이상을 감지하고 몸을 던져 주인을 지킨 이들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폭발의 여파를 막지 못한 귀족 중에는 팔다리 하나가 날아간 경우도 있었다.
그래, 백 보 양보해서 여기까지도 괜찮다. 신성력이 넘쳐 흐르는 곳인 만큼 잘린 것도 서두르면 붙일 수 있을 테니까.
진짜 최악은…….
“수, 숨을 안 쉽니다.”
“그럴 일 없다! 백작님께서 이렇게 가실 리가 없어!”
“테러범은 아직 못 잡은 것이냐!”
귀족 중에 사망자가 나왔다는 거다.
이번 행사에 참여한 귀족들은 자선가다. 추모 행사를 보태고 기부금을 후원한 이들.
좋은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민중의 분노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달래기 위해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들이 당했다는 건.
“개 같은 놈들! 이래서 하층민과 엮여서는 안 된다니까!”
“백작님이 지은 병원이 아니었다면 치료도 제대로 못 받았을 놈들이!”
그나마 연결되어 있던 두 집단의 연결 고리가 끊겼다는 것과 같다.
은혜를 원수로, 선행을 앙갚음으로 갚았다고 생각할 테니까.
‘정작 테러범과 일반 시민과는 관계가 없지만.’
아니지, 또 모르지. 진짜 시민 중에서 미쳐 날뛴 자가 있을지.
그래도 어디까지나 테레범이 문제인 거지 대다수는 관계없는 것이 맞다.
그러나 백날 말해 봐야 의미 없다. 분노는 언제나 누군가를 향해 쏘아지는 법이었으니까.
“잠시 비켜 보세요.”
그들 사이로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혼석을 들이밀어 봤지만.
[영혼석에 들어가길 거부합니다.]
[안식을 원합니다.]
백작의 영혼은 이를 거부했다.
이유?
[해당 NPC는 스테이지 종료 후 다시 부활합니다.]
[그때까지 휴식하기를 원합니다.]
층에 갇혀 있는 NPC니까. NPC는 각자만의 역할이 있다.
이 백작이라는 녀석은 매번 72층이 시작될 때마다 이렇게 죽어 나간 것.
강제로 살려 볼까.
‘나한테는 부활의 씨앗이 있잖아.’
단 한 번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SSS급 아이템.
세계수를 새로 만들고 얻었던 보물이다.
갈등은 짧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그에에.”
NPC한테는 미안하지만 이런 곳에 쓸 수는 없다.
혼돈 수치도 100점을 넘긴 만큼 급하게 행동하지 않아도 된다.
몸을 돌렸다.
저 멀리, 테러범을 쫓아가는 병사들이 보인다.
나 역시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떤 놈인지 직접 확인해 볼 생각.
이미 일은 벌어졌다.
72층, 하얀 나무와 하얀뿔, 2챕터, 양극.
그 시작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 *
행사가 중단된 지 일주일.
수도를 중심으로 긴장감이 흘러나왔다. 귀족이 죽었다는 사실이 퍼진 지 오래.
뒤숭숭한 분위기 속, 일반 시민들은 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고 귀족들 역시 저택에 머물며 경비를 늘렸다.
삭막한 거리,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시위도 뚝 끊겼다.
도로를 걸어 다니는 병사들의 눈은 날카롭다 못해 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다른 곳도 아닌 수도 외곽에서 일어난 일이다. 피바람이 불 건 뻔한 일. 모두가 몸을 사렸다.
딱 한 곳만 빼고.
[니머리 탈모]: 지부만 지금 14개거든? 전투 대원만 합쳐도 최소 1,000명?
[냥냥펀치]: 1,000명? 생각보다 적네.
[니머리 탈모]: 밖으로 드러난 건 그 정도고 실제로는 3, 4배는 될 듯. 일반 대원까지 합치면 더 많고.
[정수리 핥짝]: 야야, 애들 관리 똑바로 못 하냐. 이상한 놈 때문에 분위기 개판이잖아!
[니머리 탈모]: 왜 나한테 그르냐… 난 거기 있지도 않았단 말이야.
[쁘띠공듀]: 탈모맨은 탈모맨이니까 원흉임에 틀림없습니다!
[냥냥펀치]: 옳소! 옳소!
[정수리 핥짝]: 사형! 사형이다!
[쁘띠공듀]: 정수리 핥짝형에 처하라!
[정수리 핥짝]: …그게 왜 사형이냐? 어? 포상이지!
[쁘띠공듀]: 아앗… ㅈㅅ… 때리지 말아용.
[니머리 탈모]: 하… 핥지도 말아용.
지방을 중심으로 레지스탕스가 규모를 불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도의 힘이 덜 미치는 곳이라 활동에 자유롭기 때문이다.
테러로 인해 귀족도 결국 죽는 건 똑같다며, 동등한 위치라는 의견이 늘어난 상태.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다.
냥펀의 집무실, 나와 핥짝이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냥펀은 회의 중이다.
며칠 전, 테러범의 심문이 끝났다.
“아 씨, 결국 숭배자도 아니었잖아.”
“진짜 레지스탕스 일원일 줄은 몰랐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직접 계획한 거 같지는 않던데, 그치 않냐?”
확실히. 핥짝이 말대로 직접 일을 꾸민 거 같지는 않았다.
상부의 지시를 받아 테러를 감행했다는 건 맞지만 의문점이 여러 개 남는다.
먼저 그는 그리 능력자가 아니다. 테러 때 일어난 폭발도 본인 능력이 아니라 일회용 아티팩트를 사용한 거였다.
타이밍도 수상하다. 귀족이 참여하는 행사였던 만큼 보안은 철저했고, 지시가 내려온 지 이틀 만에 진행되었던 만큼 일반인들은 미리 알 방법이 없었다.
즉, 내부에서 정보가 흘러 나갔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녀석이야.’
가디슈 크롬벨.
3왕자이자 사생아. 핥짝이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
동시에 탑 숭배자.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슬쩍 녀석을 바라봤다. 가디슈에 대한 건 이미 말해 놨다.
“가디슈, 그 녀석이 안 알짱거리디?”
“글쎄, 요즘엔 안 보이던데.”
“뒷수작 부리려고 바쁜 건가.”
“아아, 진짜. 꼬이는 놈마다 비정상이야.”
끼익, 소파에 늘어진 핥짝이가 툴툴댄다.
동의한다.
“탈모맨부터 정상은 아니지.”
“네가 할 말도 아니지.”
힐끔. 핥짝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피식.
- 짜악!
“크학!”
등짝 스매시가 날아왔다.
깜짝 놀란 덕춘이가 옆으로 도망칠 정도니 맞는 사람은 죽을 맛.
몸을 비틀며 소파에 등을 비볐지만 통증이 사라지질 않는다.
와, 눈물이 쏙 나오네.
“웃어? 응? 닉네임 한번 크게 외쳐 봐?”
“어허, 그렇게 나오면 나도 소원권을 쓰는 수밖에 없어. 알지? 나한테 소원권 있는 거?”
“역시 이 자리에서 없애 후환을 없애야겠구나!”
“악! 비겁하게 힘을 쓰다니, 정정당당하게 말로 하자!”
- 벌컥
폭력을 행사하려는 악당에 맞서 몸을 웅크리던 때, 문이 열렸다.
“회의 끝났어?”
“어째 표정이 안 좋은데.”
평소와 달리 굳은 얼굴.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문을 닫고 침묵 아티팩트를 사용한 냥펀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아아아아! 망했어. 개판이라구!”
회의 내용이 어지간히 스트레스였던 모양.
평소에는 잘만 하던 녀석이 왜 이러나 싶기도 했으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 바로 납득했다.
“위에서 빛의 성소 만든대. 이건 그냥 전면전 하자는 거야.”
“빛의 성소면?”
“달칸 봉인하는 그거.”
왜 모르겠는가.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이곳에 머물며 여러 정보를 나누었고, 그 중에는 빛의 성소에 대한 것도 있었다.
천족의 뿔을 잘라 만든 봉인 시설.
“그게 지금 시점에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은혜도 모르는 애들한테 당할 바에는 그냥 갈아 버리자고 난리야.”
“반발이 장난 아닐 텐데.”
“나도 일단은 반대하기는 했는데. 에휴, 명분이 없지도 않아.”
냥펀이 품에서 아티팩트 하나를 꺼내 든다. 업무용 키트.
빔 프로젝터 비슷한 물건이 홀로그램을 띄웠다.
귀족의 얼굴과 함께 현장 사진, 사례 번호, 간단한 설명 등이 적혀 있다.
뭐랄까. 회의 자료라기 보다는 사건 수첩 같은 느낌인데.
“테러 이후에 습격당한 귀족 목록이야.”
과연. 그런 거였나.
이놈들, 쉬지 않고 일을 터트리고 있다.
“피격당한 귀족만 열 명이 넘고. 대부분 제압했지만 몇 명은 다쳤어. 그리고 여기.”
냥펀이 사진 몇 개를 가리켰다.
“귀족 한 명 사망. 자제 두 명 사망. 사람은 아니지만 기르던 말과 강아지도 몇 마리 죽었어. 일종의 협박이지. 언제든 널 노릴 수 있다는.”
“그 짓거리를 하는 게 하얀뿔이다?”
“귀족도 죽는다. 우리와 같은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다.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겠다. 이게 지금 그쪽 슬로건이얌. 강건파 쪽이겠지만.”
초기의 하얀뿔은 꽤 과격했다. 이 정도면 거의 싸우자고 덤비는 수준 아닌가.
주의 깊게 사건 요약을 살폈다. 대부분 혼자 돌아다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공격을 당했다.
하긴, 영주성에 있을 때보다는 나와 있을 때가 전력이 약하니까.
“에휴우, 힘들당.”
작게 한숨을 내쉰 냥펀이 소파에 쓰러지듯 엎어진다.
옆으로 살짝 움직여 공간을 만들어 줬다.
“으으, 그나마 지방 귀족이고 평소 평판이 나빴던 이들이었기에 참고 있는 거지. 만약 명망 있거나 높은 신분의 귀족이 죽으면 끝이야. 막을 명분이 없다구!”
냥펀의 말대로다. 그때면 하얀 나무와 하얀뿔의 관계가 최악이 된다.
밑바닥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정도의 위협이라면 코웃음 치고 넘어가겠지만 칼 들고 휘두르는 거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분열하고 있다. 제2 천계가 왜 멸망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찾아야 돼.’
분명 72층에서 73층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있을 거다. 71층의 긱센 전투처럼.
예상하건대 빛의 성소가 만들어지는 것도 그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이번 테러와 같이 뒤이어 벌어지는 사건일 수도 있고.
다시금 사건 목록을 살피며 집중하는 찰나.
- 똑똑
“핥짝아!”
“아 씨, 누구야.”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란 핥짝이가 청소하는 척을 한다.
“들어오세요.”
“아하하, 미안하군. 이블아이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벨브레그가 들어왔다.
이 양반은 또 무슨 일이지?
“다름 아니라 가디슈 왕자님께서 출장이 있으셔서 호위 임무를 맡게 됐네. 왕자님께서 이블아이를 지목하시더군. 그리고 말이야.”
그의 눈이 먼지를 털고 있는 핥짝이에게 꽂혔다.
“크흠, 옆에 하녀도 굳이 지목을 하시더군. 둘 다 자네 사람이지 않나. 부탁 좀 함세.”
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 핥짝이가 입을 벙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