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추모 행사
가디슈 크롬벨. 제2 천계에 군림하는 왕족 중 하나.
핥짝이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정체불명의 천족이 그였다.
사생아라는 단어에 눈길이 가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것은…….
[가디슈 크롬벨]
-탑 숭배자입니다.
-두구두구두구! 실버 등급!
탑 숭배자.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여기에 있을 줄이야. 그것도 왕족 출신.
왜? 왕족이면 부족할 거 없지 않나? 굳이 탑 숭배자가 될 이유가…….
모르겠다. 그거야 저놈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숭배자의 개인사 따위는 관심도 없다.
‘탑 숭배자라서 핥짝이한테 관심을 보인 건가.’
놈들의 목적은 탑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니까.
등반가로 보이는 핥짝이한테 접근했을 가능성도 있다. 알아보기는 쉬웠겠지. 은갈치 정장에 헬멧 쓰고 돌아다니는데.
다른 이들은 시스템 보정으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숭배자는 다를지 모른다. 당장 등반가를 공격해도 페널티도 안 받는 놈들인데.
‘생각해 보면 저 녀석 위치가 딱 괜찮네. 평생 왕족으로 놀 수 있잖아. 세계관도 고정되어 있고.’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너무 오래 쳐다봤다. 괜히 튀는 행동을 해서 시선을 끌 필요는 없다.
수많은 생각이 지나가는 가운데, 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의 공이 크다 들었다. 긱센의 몬스터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막은 데 크게 일조했다지.”
“과찬입니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단순히 공을 치하하려고 부른 건 아닐 거다. 그럴 거였으면 전투가 끝난 직후에 불렀겠지.
이미 금화와 훈장 등, 보상을 받은 뒤였다.
당시 지휘자였던 벨브레그가 복귀하자마자 날 부른 걸 보니 다른 목적이 있는 거 같은데.
대충 2개의 이유가 떠오른다.
벨브레그가 직접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첫 번째는…….
“특이한 게이트가 있었다고 들었네.”
이거다. 비규격 게이트. 나도 처음 본 유형이었지만 이들에게도 생소했던 모양.
옆에 기립해 있던 가디슈의 눈이 빛났다.
이 정도는 예상했다. 벨브레그가 보고를 올렸을 테니 그에 따른 후속 조치를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설마 직접 부를 줄은 몰랐지만. 그만큼 관심이 간다는 거겠지.
혹시 모른다. 다른 지역에도 에이션트 몬스터가 나타났을 수도 있다. 놈들을 직접 겪은 건 이 자리에 나밖에 없고.
“에이션트 몬스터가 등장했습니다. 보스를 처치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몬스터를 쏟아 내는 특이 게이트였습니다.”
“그 말은 그대가 보스를 죽였다는 뜻이고 말이지.”
“동료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빙긋, 왕이 미소 지었다. 머리에 쓴 왕관이 탐스럽다.
저것도 얻어야 한다. 그래야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건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왕성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니.
여차하면 클리어 전에 왕성으로 쳐들어가 뺏어올까도 했었는데.
[가히무스]
-왕실 기사단장
-사람을 둘로 나누는 매직(물리)에 능합니다!
[호메인]
-왕실 기사
-당신의 머리, 모닝스타로 바뀔 수 있습니다.
무작정 덤볐다간 뼈도 못 추릴 거 같아서.
아니, 당장 저기 앉아 있는 왕 본인부터도 강력하다.
[가디 크롬벨]
-제2 천계의 왕
-신성으로 타오르는 태양을 본 적 있나요?
-못 봤겠죠. 본 사람은 다 죽었거든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둘 생각.
“함께 들어갔던 이들은 크게 도움이 안 됐다고 들었는데.”
“저희가 들어가기 전, 먼저 게이트에 진입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힘들었을 겁니다.”
진짜다. 탈모맨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 한들 그대의 공이 빛이 바래지는 않는 법. 이후 긱센에서 나타난 게이트가 재발하면 힘을 써 주길 바라네. 벨브레그 장군은 이블아이와 협력해 상세하게 정보를 모으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왕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한테 물어볼 만한 주제, 두 번째.
다른 건 아니다. 레지스탕스에 대한 거겠지.
최근 떠오른 문젯거리. 긱센의 영주민들이 말했을 거다. 우리가 가기 전 긱센을 지키고 있던 것이 레지스탕스 하얀뿔이라는 걸.
“게이트에 먼저 들어갔다는 이들, 그들이 레지스탕스라고 하더군. 지금 수도에서 들고 일어난 이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역시나. 이게 본론인가.
“하얀뿔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 그 규모가 그리 크지도 않거니와 영지의 방범대 수준인지라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
그가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괸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눈치챈 관료들이 송구스럽다며 고개를 떨군다.
“어명만 내려 주신다면 제가 모두 쓸어버리고 오겠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귀축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위엄을 보이시지요.”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자들을 처벌하시옵고 군대를 보내 폭도들을 진압하셔야 합니다.”
기사단장과 고위 귀족들이 저마다 한마디 한다.
등신들인가. 그럴 거였으면 진작에 명을 내렸겠지. 다른 곳도 아니고 수도 근처에서 시위를 해 대고 있는데.
가만히 놔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다른 목적이 있든 그들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든.
뭐, 그 사실을 알고도 관심받으려고 입을 놀리는 걸지도 모르지만.
손을 들어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한 그가 나를 굽어봤다.
“놔두어라. 그들도 분노를 풀 곳이 있어야 하니. 그 또한 상위층이 감내해야 할 미덕이다. 옥죄기만 한다면 그릇된 방향으로 터지는 것이 당연하다.”
과연 넓게 왕족쯤 되면 시야가 넓어진다는 건가. 눈에 거슬린다고 쓸어버리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범하게 화를 내라고 하고 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것이고 왕족으로서의 배포도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던가. 애도할 시간은 주는 것이 도리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정당한 분노라. 분위기를 보니 다들 수긍하는 눈치다.
저마다 중얼거리는 귀족들. 난 청각에 집중했다.
“끄응, 멍청한 긱센 남작. 어떻게 호위마저 제대로 못 한단 말인가.”
“그자의 기사단이 수준이 낮긴 하네만 그래도 그렇지 수도로 오는 길에 습격당하다니. 얼마나 얕보였으면, 에이잉.”
“거의 괴멸됐다던데. 그 와중에 본인 목숨은 잘 챙겨 왔더군. 쯧쯧,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도 다쳐서 요양 중이지 않은가.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밀려난 놈들이 있었겠지.”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벨브레그가 이를 악문다.
이제야 의문들이 풀린다. 어째서 전송실에서 벨브레그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다른 곳도 아닌 수도에서 시위가 일어났는지.
‘영주민을 데리고 대피하는 데 실패했어.’
벨브레그가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패했다.
귀족의 이름을 걸고 약속했음에도. 생존자들을 통해 이 사실이 퍼졌을 것이고 그들의 가족과 지인, 같은 처지인 하층민들을 자극했을 거다.
뭔가 잘못됐다.
‘몬스터한테 습격받았을 리가 없어.’
긱센은 봉쇄됐고, 일대는 온갖 장애물과 지뢰로 덮였으니까. 몬스터 웨이브 때 넘어온 놈들이 그곳을 뚫고 지나왔다? 불가능하다.
심지어 몬스터 웨이브를 성공적으로 막아 낸 상태.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의문이 가득해지는 가운데 가디 크롬벨이 말을 이었다.
“명분은 그들에게 있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인 만큼 괜한 마찰은 피하는 것이 좋을 거야. 그래서 벨브레그 장군과 그대에게 명할 게 있네.”
그가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관료가 칙서를 펼친다.
“벨브레그 후작과 이블아이는 긱센의 생존자들을 위한 추모 행사를 진행하며 레지스탕스 일원과 유족들을 설득해 시위를 멈추어야 한다. 행사 일정과 보상은 아래와 같다…….”
큰 목소리로 어명을 읊는 귀족.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때문에 불렀군.
목적은 분명했다.
“누가 뭐라 해도 자네들은 긱센의 영웅. 시위하는 자들의 명분은 희생자에게 있다. 그것만 막으면 하층민들이 들고 일어설 이유를 잃는 것이지.”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제삼자가 날뛸 수는 없는 노릇.
긱센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것에서 하층민의 울분을 대변하는 것으로 시위의 성질이 바뀌기 전에 무마시키겠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때다 싶어서 하층민들의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고 이는 신분제 사회에 큰 위협이 되니까.
세계 자체가 멸망하고 있는 시국인 만큼 이들도 그들을 함부로 어쩌지는 못하는 상태. 꽤 효과적이면서도 평화로운 방법.
“…이상으로 명을 마친다. 벨브레그 후작과 이블아이는 즉시 움직이도록.”
“어명을 받듭니다!”
“어명을 받듭니다!”
나와 벨브레그가 동시에 외쳤다.
* * *
대략 이틀의 시간이 지난 시점.
어명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행사 준비는 빠르게 마쳤다.
유족들과 수도 내에 집을 내주었고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약속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긱센에서 지인들을 데리고 온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레지스탕스 쪽에서는 아무 말이 없군.”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위치를 옮긴 거 같군요. 외부로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탈모맨을 비롯한 레지스탕스 일원들은 초청할 수 없었다.
커뮤니티를 켜서 물어보기도 했으나.
[니머리 탈모]: 나 지금 다른 곳에 있어. 본부에서 합류하라고 연락 와서.
[쁘띠공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죵. 그쪽은 문제없지욧?
[니머리 탈모]: ㅇㅇ 딴 건 없고 덩치 불리는 중. 지원자 많아서 정신없다 ㅂㄷㅂㄷ.
[니머리 탈모]: 아, 나 여기서 직책 올라감! 이제 지부장이다!
[쁘띠공듀]: 오오오oh! 권력자!
다른 곳에 있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다.
이건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이제 행사를 진행해야 한다.
나와 벨브레그, 긱센의 참전 용사들의 행진.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국가 안치소로 이동한다.
도로를 통제한 뒤 행사장을 꾸며 모두에게 음식과 술을 나누는 건 물론이요, 악단과 무희를 동원해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기까지.
마지막에는 설득에 성공한 유족들이 받는 보상을 공개하며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긱센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우리가 긱센을 수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말하는 건 덤.
“슬슬 움직이셔야 합니다. 마차로 가시지요.”
병사 한 명이 나와 벨브레그를 불렀다.
군마가 이끄는 군용 마차. 투박하지만 강인한 모습이었으며 갑옷을 차려입은 병사들이 도열한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벨브레그 역시 전쟁터에서 입던 갑옷을 착용한 상태.
“아, 이블아이 님은 이것으로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크흠, 자네 갑옷이 좀 튀기는 하지.”
아쉽지만 펠라인 세트는 거부당했다. 추모 행사 때 무지개 갑옷은 좀 그렇지.
“그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덕춘이. 그러지 마라. 맨날 펠라인 세트에 올라타 있는 녀석이.
준비는 모두 끝났다.
당당한 모습으로 마차에 타고 행진을 시작했다. 마차 뒤를 따라 죽은 이들의 얼굴이 그려진 관을 들고 이동하는 병사들.
그에 맞춰 관악대가 숙연하고 웅장한 연주를 시작한다.
살짝 들떴던 거리가 진정되며, 행인들 모두가 고개를 숙여 묵념한다.
나와 벨브레그 역시 마찬가지. 행상에 참여했던 다른 귀족들 역시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하층민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히끅거리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으며, 주먹을 움켜쥔 채 입을 다문 이들도 있었다.
성공적으로 행사가 진행되는 타이밍.
“으아아아아악!”
귀족들이 있는 곳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 콰아아아앙!
이어지는 폭음.
“히이이잉!”
“이런!”
놀란 말이 경로를 이탈해 질주했고.
- 쿠구구구구궁!
- 콰과과광!
“뭐, 뭐야!”
“제길, 도망쳐!”
“테러다! 병사들 뭐 하고 있어!”
“꺄아아아악!”
병사들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검을 빼 들었다.
번뜩이는 칼날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시민들.
거리가 아수라장이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