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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358화 (358/740)

358화 왕성

챕터Ⅰ종료.

71층을 무사히 끝냈다는 뜻이었지만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진지는 모르겠으나 하얀 나무와 하얀뿔의 관계가 악화됐다.

단순히 악화된 정도가 아니다. 수도로 천족들이 몰릴 만큼 하얀 나무에 대한 악감정이 터져 나왔다고 봐야 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이 하얀뿔이었기에 그들이 대표적인 세력이 됐을 뿐.

‘긱센 전투가 하얀뿔이 커지는 계기였던 거야.’

의문 하나가 풀렸다. 어쩐지 그걸 기점으로 71층이 클리어된다 했더니만.

서서히 암전하는 세계, 흐릿하지만 새롭게 떠오른 메시지를 봤다.

더 나은 미래의 가능…….

조금은 결과가 달라진 건가. 지금은 알 수 없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듯 머리가 멍했으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72층에 진입합니다.]

냥펀의 집무실에 있었다.

* * *

“허억!”

거칠게 터져 나온 숨. 머리가 맑아지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나뿐만이 아니다.

“으으, 뭐야. 상위층은 올라가는 것도 특이하네.”

“공블아이! 무사했구나!”

핥짝이와 냥펀도 함께다. 하긴, 냥펀의 집무실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다들 멀쩡해 보이니 다행이다. 긱센에서 뒹구는 동안 하얀 나무에서도 나름대로 일이 있지 않았을까.

72층에 전송되며 봤던 화면 중에는 왕성에 대한 것도 있었다.

“탈모맨은 다른 곳으로 이동된 모양이네.”

“어떻게 잘 구했어?”

“멀쩡할 거야. 게이트 클리어하고 나랑 같이 나왔으니까.”

아마 소속이 레지스탕스라 그쪽 지역으로 넘어간 거 같다.

적당히 서로의 안부를 묻는 타이밍.

[72층]

[챕터Ⅱ- 양극兩極]

[과거의 기억이 생성됩니다.]

-파직!

메시지와 함께 스파크가 튀더니 미약한 두통이 밀려온다.

머리에서 생성된 수많은 기억. 긱센 전투 이후의 일들이 각인됐다.

전송실에 있던 만큼 내가 직접 하지 않았지만 시스템이 알아서 진행시킨 결괏값인 모양.

‘긱센 전투 이후 2주 지난 시점인가.’

시간이 그리 흐르지는 않았다. 상황은 많이 바뀌었지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기억을 정리했다.

몬스터 웨이브는 무사히 끝났다. 그 과정에서 벨브레그가 크게 다쳐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고, 난 영지에 남아 후속 조치를 하다 다른 곳으로 파병.

전쟁터 몇 곳을 더 해결하고 왕도로 돌아왔다. 공로를 인정받아 나름 보상도 얻었고 냥펀은…….

“와! 나 이제 백작이야!”

남작에서 백작으로 신분이 올랐다. 어디까지나 내 위치는 냥펀의 직속 부하. 내 공로는 냥펀의 공로기도 했다.

그뿐일까, 나와 탈모맨을 구하기 위해 보급로를 뚫고 동부 전선을 안정화하기까지. 긱센 지방에 대한 지원도 들어갔다.

정부 차원의 지원만이 아니다. 다른 지방에서도 식량을 비롯한 구조 물품을 보냈다. 레지스탕스의 이름으로.

“혼돈 수치 많이 준당. 나 8점 얻음.”

“진짜? 이 씨, 난 4점 주던데.”

“공블아이는?”

“난 10점.”

“넌 또 왜 10점인데!”

“인성 차이가 아닐, 악!”

핥짝이가 멱살을 잡고 흔든다.

생각보다 핥짝이는 점수가 짜다.

그건 그거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정작 지금 시위는 긱센에서 일어난 게 아니야.”

“으음. 어느 순간 왕도랑 위성도시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지.”

“귀족한테 불만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 여기 많잖아.”

핥짝이가 팔짱을 꼈다.

하인들과 일하며 들은 이야기들이 많겠지. 직접 마주치는 만큼 불화도 있었을 거고.

오히려 지방 쪽은 불만이 많지 않다고 들었다.

지방 귀족들이 특별히 더 착한 건 아니고, 몬스터의 공세에 정신이 없어서 영주와 영주민들이 신분 싸움을 할 겨를이 없다.

“넌 특별한 거 없어?”

나와 냥펀에게 변화가 생긴 만큼 핥짝이에도 변화가 있을 수 있다.

2주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지만 일이 터지기에는 충분한 상황이라…….

“하인들 사이에 레지스탕스에 가입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가입한 사람이 있든 없든 생길 만한 소문이니까.

장난식으로 확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버려? 하고 떠든 놈들도 있을 거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하인 중 배반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품은 이들이 있을 거다.

이 부분은 핥짝이가 직접 알아보는 편이 좋겠지. 하인들 사이에 섞일 수 있는 건 핥짝이뿐이니.

“그리고… 음, 아냐.”

미간을 찌푸린 핥짝이가 눈을 굴렸다.

뭔가 더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뭔데, 뭔데애!”

“정보는 공유해야 하는 법! 언론 통제다!”

“언론은 개뿔이, 콱!”

핥짝이가 주먹을 들어 올렸지만 그것도 잠시.

볼을 긁적인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 애가 있어.”

“오, 그렇군. 그래서 진짜 정보는 뭐지?”

꽈악. 핥짝이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아, 아파요. 탈모맨으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각성자가 되면 모근도 강해지는 걸까. 다행히 머리카락은 몇 개 빠지지 않았다.

반응이 조금 격한 것이 설마?

“진짜로?”

“핥짝이에게 마음을 뺏긴 자 그 누구인가!”

나와 냥펀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설마 여기서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는데.

어? 뭔가 이상하다. 이 타이밍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건.

“여기서 대쉬 받았다는 건. 혹시 NPC?”

“엇? 맞네.”

중간에 전송된 만큼 뜬금없이 등반가와 엮일 일은 없다.

핥짝이는 왕도에서 일하는 만큼 외부와의 접촉이 있지도 않고.

“가디슈라고 하는데, 왕성에서 종종 보이더라고. 귀족이겠지 뭐. 하인이었으면 내가 알았을 테니까.”

“가디슈가 아니라 핫이슈겠지! 오오오. 어떻게 생겼어?”

“잠깐, 잠깐만. 냥펀아.”

흥분하는 냥펀을 진정시켰다.

재밌는 일이기는 한데 말이야.

“가디슈라는 NPC 들어 본 적 있어?”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긱센 전투 이후 나름 유명세가 있어 왕도 내에 있는 귀족들과 시간을 몇 번 보냈다. 대충 알 만한 귀족은 다 알게 됐다는 말.

게다가 냥펀의 반응. 귀족 간의 서열, 족보까지 파악하고 있는 녀석이 모르는 눈치다.

본인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턱을 만지며 머리를 굴린다.

“나도 잘 모르는 사람인뎅, 뭐지. 왕도면 신분이 검증된 사람밖에 못 들어오는데.”

“전부터 종종 보이더라. 부모랑 같이 들어왔나 보지.”

“그런가. 그래서 어떻게 하게. 받아들일 거야?”

“NPC는 좀 아니지.”

“그렇긴 해!”

등반가면 그런가 보다 하겠다만 NPC랑은 좀, 언젠가 탑 밖으로 나갈 텐데.

물론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한 만큼 NPC와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아니다.

“신분이 있는 만큼 잘 피해 봐야지.”

“만만한 녀석이면 내가 혼쭐을 내줄게. 이제 백작이라구.”

“오, 권력자의 자신감.”

흥흥. 콧김을 뱉은 냥펀이 당당한 포즈를 취한다.

이 부분은 대충 일단 넘어가자. 물론 기억해 둘 생각이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뜬금없는 이벤트란 말이야. 시스템이 개입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어.’

불친절하고 악독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게 시스템이지만 의외로 공정한 부분이 있다.

70층대에 진입하고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 이곳에 올라온 등반가들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리가 없다.

각 층은 명확한 목표가 있고, 등반가는 그 안에서 업적을 쌓고 성과를 만든다. 그에 따른 보상은 덤.

시스템의 특성상 각자의 포지션에 맞게, 이 세계에 영향을 줄 만한 기회를 적어도 한 번은 줄 거다.

내가 추천장을 얻고, 냥펀이 귀족이 되어 긱센 전투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처럼.

탈모맨은 말할 것도 없지. 초기 레지스탕스 일원으로 긱센에 있었으니.

71층이 클리어되는 기준은 긱센 전투.

실제로 그 전투에 영향을 줬다. 몬스터 웨이브를 막아냈고, 그 결과 더 나은 가능성이 열렸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으니까.

덕분에 혼돈 수치도 많이 얻었고.

반면에 핥짝이는 71층에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혼돈 수치를 4점 받았다는 게 그걸 증명한다.

즉…….

‘상위층에서 바라는 건 멸망한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

묻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이야, 너라면 어떻게 할래?

멸망이 가속되는 계기가 있어. 그걸 파악하고 해결할 수 있는지 봐 볼까?

아마 이 질문들의 끝은…….

‘잘 기억해 뒀다가 너희 세계가 망하지 않게 노력해 봐.’

이게 아닐까.

예행 연습.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탑 구성 자체가 그랬다. 헌터를 훈련시키는 공간.

동시에 멸망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머리를 비웠다. 지금은 72층에 집중하자.

핥짝이와 냥펀이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다.

“야야, 탈모맨한테도 연락해 봐. 이 녀석도 뭔가…….”

그때.

-똑똑

“냥펀 백작, 안으로 들어가겠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벨브레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회복하고 복귀한 모양. 상처도 상처지만 저주에 노출되어 회복하는 데 고생 좀 했다고 들었다.

그가 냥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실례를 용서하게. 급한 용무네.”

“괜찮아요. 그래서 무슨 일로?”

“이블아이를 잠시 데려가지. 긱센에서 활약한 이를 데리고 오라는 명이야.”

벨브레그는 2성 장군 아니, 이번 전투로 인해 3성 장군으로 진급이 확정되었다.

신분 자체도 후작이었으니 그런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옷은 그게 전부인가? 제복을 하나 주지. 군인 신분으로 가는 편이 나을 테니.”

그가 위를 가리켰다.

“왕성으로 가야 하네.”

* * *

왕성.

신분제가 뿌리 잡힌 제2 천계에서 귀족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왕족이다.

하얀 나무 내에서도 특별 취급받는 이들. 그들이 거주하는 곳조차 따로 나뉘어 있다.

가장 안쪽,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었다는 문을 통과해야만 나오는 공중성.

“왕명이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문을 통과한 나는 왕의 직인이 찍힌 서류를 내밀며 안으로 들어가는 벨브레그를 뒤쫓았다.

처음 입는 제복이 영 불편했으나 불만을 표할 때가 아니었다.

귀족인 게 분명한 이가 안내를 한다. 우리가 선 곳은 포탈.

[왕성에 진입합니다.]

[모든 무장이 해제됩니다.]

-우우우웅

빛이 점멸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왕성에 진입했다.

새하얀 대리석과 복도 중앙에 놓인 레드카펫.

“이쪽으로 오시지요. 왕족이 아닌 자는 카펫을 밟을 수 없습니다.”

안내자가 레드카펫을 피해 벽 쪽으로 붙는다.

복도가 워낙 넓어 불편함은 없었다.

하다 하다 이런 것으로도 차별을 두는 건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던 때, 벨브레그가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부터는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함부로 행동해서도 아니되고, 가능한 시선도 마주치지 말게.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 귀족이니.”

“알겠습니다.”

왕성쯤 되면 일하는 이들도 신분이 범상치 않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슈겔 파비아]

-파비아 공작가의 둘째 아들.

-침착한 성격과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애착 곰돌이 인형은 못 참죠!

당장 우리를 안내하는 이가 공작가 자제다.

복도를 돌아다니는 이들 역시 귀족가의 일원, 혹은 귀족 본인이다.

밖으로 나가면 어디서든 대우받을 이들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다들 겸손하다.

‘왕성은 처음 오네.’

냥펀도 왕성에 들어간 적이 없다.

다 떠나서 아직까지 왕족을 본 적도 없다. 아예 정보 자체가 없다. 이름이든 생김새든.

전쟁을 위해 귀족 회의를 했을 때도 마찬가지. 회의 이름부터도 귀족 회의 아니던가.

긴장감을 올렸다. 여기서 실수했다가는 어떤 벌을 받을지 알 수 없다.

“동부 전선 최고 책임자, 벨브레그 후작이 입장합니다.”

그걸 끝으로 안내자가 그 자리에 섰고.

“가지. 내가 말한 거 잊지 말고.”

“예.”

나와 벨브레그는 활짝 열린 알현실로 들어갔다.

시선은 바닥을 향했지만 모든 감각은 주변으로 뻗었다.

기사로 보이는 이들만 수십. 느껴지는 기세로 볼 때 보통 실력자가 아니다.

왕족과 대신으로 보이는 이들의 기척도 느껴진다.

“명에 따라 이블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전하.”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는 벨브레그. 나 역시 그를 따라 무릎을 굽혔다.

“긱센에서 탄생한 영웅이라. 그대를 직접 보고 싶었다. 고개를 들라.”

흘낏 벨브레그를 쳐다보자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내려다보는 왕과 왕비, 옆에는 왕자와 공주가 앉아 있다.

‘확실히 신성력이 남다르군.’

귀족들보다도 강렬한 신성력에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실제로도 은은하게 몸이 빛나고 있다. 위엄을 높이려는 건가. 몸에 신성력을 두른 느낌.

왕의 머리에 올라간 왕관이 눈에 보였다.

내가 챙겨야 하는 물건. 이번 기회에 확인해 두는 게 좋겠지.

“미천한 자를 불러 주어 영광입니다.”

벨브레그의 요청대로 말문을 열며 그들을 눈에 담았다.

그런 내게 눈에 한 청년이 눈에 띄었다.

정면에 있는 걸 보면 왕족인 건 분명한데 홀로 구석진 곳에 서 있는 남자.

[가디슈 크롬벨]

-제2 천계의 왕족.

-셋째 아들입니다.

-사생아.

.

.

.

가디슈.

핥짝이가 말한 천족이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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