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57화 (357/740)

357화 71층 클리어

게이트 클리어.

클리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단 말이지.

층 클리어, 퀘스트 클리어, 게이트 클리어. 이것들이 좋은 이유는 적을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것도 있지만.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결과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다는 것 때문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아이템.

일반적인 게이트도 아니고 에이션트 몬스터가 있던 곳이니 더 좋은 물건을 주겠지?

난 살짝 기대를 해 봤고…….

“오? 게이트 보상으로 이 등급을 준다고?”

[점멸 단검 (SS)]

-단검과 위치를 바꿉니다.

-상대방이 단검을 쥐었다면 상대방도 함께 위치가 바뀝니다.

-하루 3번 충전 (3/3)

SS급 아이템. 그것도 상당히 효과가 좋은 물건이다.

변수를 만들기 충분한 옵션이었으며,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단검을 쥔 사람도 함께 이동시킨다라.”

이건 상황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다.

당장 머리에 떠오르는 전략만 서너 개. 숙련도가 오른다면 훨씬 다양하게 활용될지도 몰랐다.

이건 내가 써야지. 팔아 버리기에는 아깝다.

허리춤에 검을 꽂았다. 귀속 아이템이 아닌 게 좀 아쉽지만 누군가 훔쳐 가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면 되는 거니까.

-촤악

빙글 검을 돌려 피를 털어 내고 검집에 넣었다.

힐끗 파무스를 살폈으나 미동도 없다.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만…….

의외로 파무스의 본체는 대단한 능력이 없는 거 같았다. 쓰기 전에 내가 죽여 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건 그거고…….

“과거 어쩌고 했었지?”

파무스가 아니라 시스템이 직접 언급했으니 나름 중요한 게 아닐까.

서버 최초로 진입했다고도 하고. 50층 이후부터는 서버가 통합되니 사실상 전 서버 최초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도 타락한 천사의 검이 없었다면 진입하지 못했을 테니. 원래라면 꿈속의 녀석을 처치해서 클리어하는 형식이 아니었을까.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중요한 게 있다면 확인해 보면 그만이다. 녀석이 반응해 준다면 말이지.

인벤토리에서 꺼낸 물건.

[비어 있는 영혼석 (AA)]

-영혼이 깃들지 않은 영혼석입니다.

-상대방의 동의가 있다면 영혼을 담을 수 있을지도?

현재 진행 중인 부활 사업의 핵심 아이템.

영업도 뛸 겸 나도 몇 개 가지고 있다. 이거면 어떻게 될 것도 같은데.

녀석을 향해 영혼석을 내밀었다.

-우우우우웅

마력을 불어넣자 저절로 작동한다.

일단 에이션트 몬스터니 자아도 있을 거고, 나름 삶의 의지도 있을 거다.

“방금 내 손에 죽은 녀석은 바로 튀어나온다, 실시.”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모르겠다. 써 봤어야 알지.

다행히 크게 상관없는지 반응이 왔다.

놈의 시체에서 솟아오르는 희끄무레한 무언가.

죽었음에도 느껴지는 존재감.

이윽고 연기가 합쳐지며 인간의 형상을 만들었으니.

-나를 부른 게 그대인가.

반투명한 형태의 파무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꿈의 세계서 봤던 모습은 아니다, 본체와 비슷하지. 몸에 있던 상처가 안 보여서 그런가 오히려 이쪽이 좀 더 상태가 좋아 보인다.

다만 내가 죽인 녀석한테 지금 때깔이 더 좋다고 말하기도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따악!

신성력을 담아 놈의 머리통을 때렸다.

파하아앗!

이팩트처럼 퍼져 나오는 빛무리.

-크하아아악! 성불한다!

파무스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튼다.

효과 확실하네. 팔짱을 끼며 놈을 내려다봤다.

녀석의 말대로 성불하는 일은 없다. 나도 놈을 없애려고 때린 건 아니어서 적당히 조절했으니까.

“뭘 처음 보는 척이야. 방금까지 신나게 싸워 놓고.”

-죽은 직후에는 기억이 원래 혼미하거든?

“오? 처음 죽는 게 아닌가 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지. 영겁의 시간 동안 이어진…….

“안 죽었다는 거네.”

내 말에 파무스가 입을 다문다. 표정이 띠꺼운 것이 괜히 덕춘이 생각나네.

게이트가 클리어됐으니 조만간 붕괴될 거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시간이 아직 넉넉하기는 하지만 같이 들어온 군인도 있고 레지스탕스 일원도 있어서.

“됐고, 정해. 영혼석에 들어올래, 아니면…….”

-화륵

파이어로 신성력을 머금은 불꽃을 피워 올렸다.

“따땃하게 보내 줄까?”

-…인격이 비틀린 자인가. 이 얼마나 잔혹한 놈인지.

“빨리. 시간 없어.”

-고통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농락당할 바에는 성불을……!

성불하지 못하게 성물을 사용했다.

[홀리 크랩 (AAA)]

콰직!

냅다 놈을 잡아 버리는 신성한 집게발.

고작해야 영혼인 녀석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터, 터진닷! 터져엇!

놈의 영혼이 그대로 붙잡혔다.

“안 터져. 걱정 마.”

아닌가? 터질 것 같기도 하고.

괜찮겠지, 영혼인데. 왠지 막 다뤄도 멀쩡할 거 같잖아.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원한이 있는 거냐고!

“다른 건 아니고 썰 좀 들으려고.”

썰?

입을 벙긋인 녀석이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란 표정으로 바라본다.

뭐. 왜. 뭐.

“크흠.”

눈으로 욕하는 녀석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오케이, 나도 그냥 맨입으로 해 달라는 건 아니고.

“보니까 본체 상태가 말이 아니던데.”

-거기에는 기나긴 사정이 있어. 고대라고 불리는…….

“알겠고,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아직 말 안 끝났는데.

나도 알아, 자식아.

녀석 앞에 릴카가 만들어 준 팸플릿을 펼쳤다.

조악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지만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다.

“내 말 들으면 아프지 않은 몸으로 부활시켜 줄게.”

-오, 개소리가 제법이었어.

꾸구구국!

홀리 크랩에 힘을 더했다.

-으가아악! 개 같은 놈아!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녀석.

어디서 말대꾸를.

“현자가 호문쿨루스로 만들어 줄 거야.”

-서, 설마 52층에 있다는 자를 말하는 건가?

“알고 있네?”

사실 모를 줄 알았다. 상위층은 좀 특이해서. 하나의 세계관을 통째로 가져온 만큼 NPC들도 본인이 NPC인지 모르고 움직였다.

연기인지, 진짜 모르는 건지, 자아를 잃어서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긴, 이상하기는 했어.’

전에 빛의 성소에서 싸웠던 탑 숭배자도 본인이 NPC인 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빙의할 정도로 강력한 놈이었고, 못해도 80층 이상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놈이었다.

즉, 모든 NPC가 층에 동화되어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는 것.

그 기준은 모르겠다. 어떤 NPC가 그런지도 모르겠고, 왜 이런 경우가 생기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죄다 자아가 없으면 깔끔했을 텐데. 탑이 굳이 이런 형태를 만든 데는 이유가 있을 거다.

아무튼…….

“현자를 알고 있다니 말이 통하겠네.”

난 녀석에게 부활 사업에 대해 이야기를 건넸다.

처음에는 불신에 찬 표정이었던 녀석이지만 시간이 지나며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고.

“어때? 관심 있어?”

-네! 할래요!

“옳지, 잘한다.”

지금은 소중한 호갱님이 되었다. 말 잘 듣는 강아지한테 그렇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가서 호문쿨루스가 되면 네가 겪었던 일들, 과거들 다 적어서 보내 줘야 한다?”

-네! 열심히 쓰겠습니다!

“밑에 세 줄 요약 쓰는 거 잊지 말고.”

녀석이 계약서에 손가락을 대자 저절로 계약이 이루어졌다.

언제 썰을 다 듣고 있냐. 나중에 보고서 받듯 보면 되지.

이걸로 한 건 끝났고.

[상대방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파무스의 영혼이 영혼석에 깃듭니다.]

영혼 상태인 녀석이 영혼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 덕분인지 파무스의 표정이 밝았다.

좋은 일을 한 거 같아서 기분이 좋네.

게다가…….

“좋은 실험체를 얻었어.”

-응?

“아무것도 아냐. NPC로 호무쿨루스 만드는 게 처음이라. 아하! 넌 NPC도 아니지?”

아직까지 아무런 데이터가 없다. 가능한지도 의문.

잘됐네. 몬스터였던 녀석이니까 일이 틀어져도 업보겠거니 하면 되잖아.

-그건 미리 말했어야지, 나쁜 새끼아아악!

그 말을 끝으로 파무스가 영혼석에 깃들었다.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이동했다.

* * *

“살아 있냐?”

“아니, 시첸데.”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탈모맨.

접전을 펼쳤는지 온몸이 넝마나 다를 바 없다.

그래도 앓는 소리에 비해 몸 상태는 나름 괜찮아 보였는데.

‘뭔가 더 강해진 거 같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기운이 예전과 달랐다.

좀 더 정갈하고 단단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칭호, 초인의 길이 성공적으로 성장을 마쳤습니다.]

역시나, 탈모맨도 한층 성장했다.

좋은 소식이다. 전력이 강해지는 건 언제나 환영이니까.

녀석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힘을 꽤 썼는지 다리가 후들거리기는 했으나 걷는 데는 문제없어 보였다. 적당히 포션 하나를 쥐여 주고 출구로 향했다.

“그에에엑!”

“덕춘아!”

그런 나를 반기는 덕춘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난 본체와, 탈모맨은 가짜와 싸운 만큼 나머지 몬스터들은 덕춘이한테 맡겼다.

녀석의 뒤로 서로를 부축한 채 걸어오는 천족들이 보였다.

꽤 사이 좋은 모습. 자잘한 상처가 있는 걸 보니 중간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같이 싸운 모양.

나와 탈모맨에 파무스의 신경이 쏠려 있어서 정신 공격이 약해졌던 거 같다.

“레지스탕스에 대해 듣기는 했는데 직접 보니 괜찮은 친구들이야.”

“하얀 나무에도 좋은 녀석들이 있었다고, 탈모맨.”

“이야, 아까는 진짜 죽을 뻔했지. 안 그런가? 하하하하!”

위기는 있었지만 결국 이겨 냈다. 이미 통성명을 끝낸 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미안하다만…….

“자, 좀 더 힘냅시다. 아직 안 끝났어요. 밖에 몬스터가 우글우글할 겁니다.”

게이트를 벗어나고 몬스터 웨이브를 정리해야 쉴 수 있다.

다들 컨디션은 안 좋았지만 사기는 높았다.

[게이트에서 퇴장합니다.]

탈출구로 빠져나가자 문구와 함께 시야가 바뀌었다.

* * *

그동안 지겹도록 봐 왔던 전장. 다른 점이 있다면…….

“와아, 많이도 잡았네.”

“장군님!”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몬스터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

활약을 한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를 믿고 악착같이 버텨 낸 이들이 있었으니.

“무사해서 다행이군, 이블아이. 너희도 수고했다.”

벨브레그가 이끄는 군대와 긱센의 영주민들이었다.

처음의 경계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전우애가 가득했다.

피해가 적지는 않았다. 우리 쪽 인원도 많이 줄어들었으며, 벨브레그 역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긱센은 우리가 지킨다!”

“하얀 나무가 우릴 버린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싸워 줄 줄이야.”

“이봐, 그쪽은 농사일보다는 군인이 더 어울려. 이번 전투 끝나면 우리랑 같이 하얀 나무로 가지 그래?”

“평생을 여기서 살아서 좀 걱정되는데.”

“뭐 어때. 가족들도 하얀 나무에 있을 거 아니야, 영주가 직접 이끌고 갔으니. 여기보다는 그쪽이 더 안전할걸?”

“그것도 그렇군!”

희망이 보였다. 승리가 가까워졌다.

영주민들과 군인들의 대화가 이어지고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가 올라갔다.

벨브레그는 굳이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중요하니까.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니까.

“다들 조금만 더 힘내게. 평원까지만 밀어 버리면 놈들도 뿔뿔이 흩어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다들 긴장 놓지 말고! 막판에 죽으면 억울해서 눈 감겠냐!”

“쉴 만큼 쉬었지, 이놈들아! 그럼 진격해!”

벨브레그를 선두로 영주민과 군인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피식. 웃음이 났다.

우리도 움직여야지. 그 전에…….

“갈매기는 끼룩끼룩!”

하늘을 보며 울음소리를 냈다.

“공블아이, 드디어 인권을 내려놓고 짐승의 길로 가는 거야?”

“아니거든.”

측은한 눈길을 보내는 탈모맨을 무시했다. 하늘을 빙 돌며 내게 날아오는 갈매기 하나.

“예! 갈매기에서 온 갈매기, 갈매기입니다!”

“알겠으니까 이거 52층 현자한테 가져다줘.”

영혼석을 건네고, 팁으로 전에 먹다 남은 과자를 던져 줬다.

냉큼 받아먹고 날아오르는 녀석.

“다음에 또 불러 주세요!”

할 건 하더라도 물건은 보내야지.

준비는 이걸로 끝, 시선을 돌렸다. 선두로 나선 이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중.

게이트가 클리어되어 더 이상의 몬스터 충원은 없다. 이곳까지 전선을 밀어 버린 것만 봐도 그렇다.

지금 타이밍에 확실히 정리를 끝내야 한다, 다른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

꾸욱. 혼돈검을 꺼내 쥐었다.

“가자, 탈모맨!”

“오케이. 다 쓸어버리자고!”

나와 탈모맨이 파이팅 넘치게 앞으로 달려갔으나 몬스터와 맞부딪칠 일은 없었다.

앞으로 돌진하는 그 순간 세계가 멈췄으니까.

흐릿하게 암전되는 세계.

[71층 클리어]

층이 클리어됐다는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변했다.

세계와 한 발짝 떨어진 기분. 시커먼 공간, 마치 영화를 보듯 필드가 스크린으로 변해 움직인다.

전투가 벌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아무래도 긱센 전투가 71층에서 72층으로 넘어가는 기준이었던 모양.

그러고 보니 상위층은 챕터 별로 진행된다고 했지.

“신기하네.”

“그에에에.”

포탈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다음 층으로 넘어가는 건 처음이다.

이왕 이런 거 느긋하게 쉬면서 봐 보실까.

팔짱을 낀 채 스크린을 바라봤다. 휙휙 바뀌는 장면들, 이내 마지막 장면이 펼쳐졌고.

“…뭐야 이게.”

난 표정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들고 일어선 천족들. 참담한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 있는 벨브레그.

수도 외곽 사람들이 뭉쳐 소리를 지른다. 하늘 위로 펄럭이는 깃발. 깃발에 새겨진 건 하얀뿔의 상징이었다.

-하얀 나무는 각성하라!

-귀족들은 우리를 고기 방패 취급할 뿐이다!

-징집할 거면 너희도 똑같이 하라고!

-하층민의 목숨은 목숨도 아니냐!

-긱센에서 죽은 자들에게 애도를!

성난 군중의 외침 속.

[챕터Ⅰ-봉기蜂起 종료]

챕터가 종료되었다.

암전되는 공간.

[보다 나은 미래의 가능성이 열렸습니다.]

[혼돈 수치 +10점]

다른 메시지를 본 거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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