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52화 (352/740)

352화 벨브레그

제2 천계 수도 동부지역 긱센.

동부 전선과 이어지는 교통로였으며 나날이 무너져가는 동부 전선의 보급을 담당하던 도시.

규모에 비해 군사력이 강한 곳이었으며, 북쪽에 위치한 숲 덕에 비교적 방어선을 만들기 용이한 곳이었다.

북쪽과 수도 쪽을 제외한 두 방위에만 군부대를 배치하면 됐으니까.

페어리가 살고 있는 북쪽의 페루카 숲. 신비한 힘으로 지켜지는 곳은 몬스터라 하더라도 통과할 수 없는 인 외의 것이었으나.

“빌어먹을.”

그곳이 뚫렸다. 긱센 지역이 빠르게 상황이 안 좋아진 이유.

다르게 말하면…….

“제기랄, 페어리 퀸이 당할 줄이야.”

“솔직히 그동안 버틴 게 용하지. 상성도 안 좋았고.”

“애초에 이쪽에 자리를 튼 것도 기존에 있던 곳이 함락당한 탓이잖아.”

“지금 그딴 게 중요해? 다 죽게 생겼는데!”

페어리가 몬스터 무리에 패배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천계 또한 하나의 세계. 다른 종족도 일부 살고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 자취를 감췄지만.

길거리만 걸어도 느껴지는 혈향.

상처를 입은 이들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신음을 내뱉었으며, 노약자들은 무너진 집에 웅크려 앉아 오늘 하루도 죽음 없이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조악한 장비라도 들고 몬스터에 저항하기 나서는 이들도 있었으며, 직접 싸우지 못하는 이들은 돌멩이라도 주워 날랐으나.

“이야, 생각보다 너무 빡센데?”

여전히 몬스터는 많았고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성루에 올라간 탈모맨이 머리를 긁적였다.

몬스터의 사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대지를 적셔 붉은 진흙탕이 되었다.

약간의 소강기. 막대한 피해를 입은 몬스터들이 잠시 물러났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수가 줄어서 공간이 남은 것뿐이야. 뒤에서 또 몰려오면 앞에 있는 놈들은 다시 들이박겠지.’

94특임대에 있으며 여러 상황을 겪었던 그다.

해외 파병을 나가 몬스터 웨이브를 직접 경험한 일도 있었다.

무각성자던 시절이었기에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94특임대는 비공식 특수 조직이었으며 해외 특임대와 연계 훈련을 병행했기에 가능했던 일.

일반 헌터들은 모르는 부분도 알고 있었다.

시선을 멀리 던졌다. 끝을 모르고 뻗어 있는 몬스터 무리.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사실상 끝날 일도 없었다. 게이트를 없애지 않는 이상 몬스터는 계속 튀어나올 테니까.

영역 싸움에서 진 놈들은 밖으로 향할 것이며, 몬스터 웨이브는 다시 시작될 거다.

“저거라도 없애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

지금은 불타 사라진 숲. 그 너머에 보이는 대형 게이트가 보였다.

4일 전부터 끊임없이 몬스터를 토해 내는 비상식적인 게이트. 지구에는 없던 종류였고, 사실상 이번 일의 원흉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기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안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을뿐더러 몬스터가 뒤덮인 필드를 뚫을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쿠르르

성벽 아래, 천족 몇 명이 성벽을 따라 쌓인 몬스터 사체 일부를 걷어차 굴러 떨어트렸다.

몬스터 사체를 치울 여력도 없다. 그런데 쏟을 체력도 없거니와 치워 봤자 다음 웨이브가 시작되면 금방 쌓이니까.

그저 성벽이 무게에 짓눌려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만 정리하는 중.

“탈모맨 예상이 맞았어. 여긴 봉쇄됐다고. 개새끼들, 우릴 버렸어!”

“영주 새끼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저기 있더라. 하여간 귀족 놈들은… 퉤! 지도 못 나가면서.”

탈모맨을 향해 걸어온 천족 두 명.

계속된 전투에 장비에는 피와 살점이 가득했지만 무기만큼은 제대로 정비한 이들.

레지스탕스, 하얀뿔. 긱센 지부의 대원.

로랑과 로슈.

쌍둥이 형제였고, 탈모맨과 함께 전투의 선봉을 서는 이들이었다.

함께 생사를 넘나들면 지금은 꽤 친해진 상태.

영주가 숨으며 실질적으로 하얀뿔이 전장을 지휘하는 상태. 전투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워낙 소규모 집단인지라 영지 단위의 운영에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특이점은 없어?”

“수도 쪽에서 군부대가 왔어. 규모가 작은데 다들 실력 좀 있어 보이더라.”

“봉쇄한 놈들이 경례한 거 보니까 관계자 같던데. 지금 영주랑 실랑이…….”

-쿠르르르릉!

로슈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각자 작업하던 이들 모두 한곳을 바라봤다.

숲 너머 게이트.

통칭 지옥 터널.

그곳으로부터 불길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용돌이치는 게이트 안에 번쩍이는 뇌전.

“제길, 저건 쉬지도 않네.”

“다들 움직여! 오기 전에 준비해야 된다!”

로랑과 로슈가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독려한다.

탈모맨 역시 몸을 풀었다.

게이트가 신호가 왔으니 약 2시간 후면 다시 몬스터가 쏟아질 거다.

“이 씨, 공듀한테 소개팅 받아야 하는데. 죽는 거 아닌가 몰라.”

커뮤니티를 켤까 고민했으나 접었다.

괜히 말 꺼내 봤자 봉쇄된 곳에 멤버들이 올 수는 없으니까. 걱정만 늘릴 뿐이다.

탈모맨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순간 번뜩이는 푸른 안광.

[칭호, 초인의 길이 함께합니다!]

[다음 성장이 머지않았습니다.]

-댕! 댕! 댕! 댕!

위험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졌다.

* * *

난 고개를 들었다.

종소리가 들린다.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불안에 떠는 사람들의 중얼거림.

‘예전 생각나네.’

대격변 시기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사람 대신 천족. 장갑차와 총 대시 기마부대와 냉병기를 들고 있다는 건 달랐지만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는 똑같았다.

그리고…….

“당장 비키지 못할까! 난 귀족이다. 네놈들이 막을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특권을 요구하며 혼자 살겠다고 외치는 이도 똑같았다.

당시 임시 대피소에 있던 육군 장성도 비슷한 말을 했었나.

혼자 헬기를 타고 탈출하며 구하러 오겠다고 소리쳤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선생이 학생을 제물로 몬스터를 피해 달아난 적은 있었지.

“쯥.”

괜히 혀가 써서 입맛을 다셨다.

수도에서 출발한 지 3일. 봉쇄는 이미 마쳤다. 먼저 집결해 있던 군부대가 막아섰으니까.

그들의 역할은 하나. 봉쇄된 긱센을 기점으로 몬스터들을 막을 장애물을 만드는 것.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 시간을 끌기 위한 작전이었으며 그 결과 군부대를 통한 길을 제외하고는 모든 길이 파괴됐다.

만약 군부대를 우회해 빠져나가려면…….

‘바닥에 깔린 대괴수용 지뢰와 함정을 통과해야 하지.’

긱센의 영주, 베르코 긱센 남작 역시 그 사실을 알기에 병사들을 상대로 윽박지르는 것뿐이다.

실제 탈영병 몇 명이 얼마 나가지 않아 폭사당한 걸 목격하기도 했고.

봉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주민들을 대피시킬 시간도 없거니와, 지뢰 및 장애물 작업과 동시에 피난민을 유도할 인력도 없다.

무규칙하게 빠져나가면 작업 자체가 제대로 진행되지도 않고.

냉정한 결정이었으나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저 종소리 안 들려? 이제 곧 몬스터가 몰려든다! 빌어먹을, 내가 이딴 곳에서 죽으려고 영주가 된 줄 알아! 비키지 않으면 무력을 써서라도 통과하겠다!”

종소리가 그런 의미였나.

어쩐지 분위기가 한 번에 심각해진다 싶었다.

영주 또한 그냥 한 말이 아닌지 주변에 있던 직속 부하들이 무기를 치켜들었다.

가다 죽으나 남아 있으나 죽는 건 똑같다면 그나마 살 가능성이 있는 쪽에 베팅하는 게 당연.

그들을 막아서는 병사들도 곤란한 눈치.

‘이 양반은 언제 오는 거야.’

미간을 좁혔다. 난 정찰대에 합류해 먼저 도착했으나 벨브레그는 본대를 이끌고 오느라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일단 몇 대 쥐어박기라도 할까 고민하던 때.

“영주가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말이 되나.”

“장군님!”

뒤쪽 길이 트이더니 군부대가 안으로 진입했다. 선봉에선 자는 벨브레그.

“잠시 늦었군. 문을 열어라.”

-끼이이이익

그의 명령에 결코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문이 열렸다.

이때다 싶어 영주가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으나.

“큭!”

벨브레그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같은 귀족임에도 느껴지는 박력이 다르다. 힘 역시 마찬가지.

한 손으로 그를 제압한 벨브레그의 눈에서 불똥이 튄다.

“어찌 그대가 가장 먼저 나오는 거지?”

“그, 그야 난 귀족이고 이들은…….”

“네놈보다 힘없고 희생될 불쌍한 자들이지.”

철퍼덕.

벨브레그가 거세게 그를 밀자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군다.

그런 녀석에게 몸을 숙이는 장군.

“귀족의 본분을 다하라, 긱센 남작.”

낮게 속삭인 그가 당당히 몸을 세웠다.

집중되는 시선.

“동부지역 전 사령관 벨브레그다. 긱센은 내 명령으로 봉쇄되었으며, 우리는 수도 방어진지가 구축될 때까지 봉쇄를 풀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친다.

설마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데.

부랑자나 다를 바 없던 이들의 표정이 사나워진다.

“우, 우릴 고기 방패로 쓰겠다는 거요!”

“이런 쓰레기 같은 놈! 네놈은 일말의 자비도 없냐!”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

“이 아이, 애라도 빠져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 어차피 애들은 있어도 도움 안 되잖아! 보급로를 통해 빠져나가게 해 주면!”

아우성치는 이들을 향해 손을 든 그가 담담히 말했다.

“보급로는 없다.”

“뭐?”

“애초부터 없었지. 우리는 이곳에 있는 보급품으로 끝을 볼 생각이었으니까.”

긱센은 보급을 담당하던 곳. 영주의 창고에는 여전히 보급품이 남아 있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는 것.

“길을 열어라.”

그의 명령에 병사들이 길을 튼다.

넓지는 않지만 충분히 걸을 수 있는 도로.

늙은 군마들이 묶인 빈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약간이지만 식량도 있었으며 의약품도 실려 있었다.

분명 보급로는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건…….

“어린아이와 노인, 싸울 의지가 없는 여인과 부상자는 떠나라. 긱센의 영주! 베르코 긱센이 귀족의 명예를 걸고 그들을 데리고 수도로 향할 것이다!”

벨브레그가 넘어졌던 남작을 일으켜 세웠다.

“그렇지 않은가.”

잠시 눈을 꿈뻑이던 남작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 그렇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나와 기사들이 피난민을 수호하며 왕도로 갈 것이다! 뭐 하느냐, 빨리 움직이지 않고!”

남작의 호통에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분주해졌다.

기사들이 대열을 짜고, 소속 병사들이 주민들의 짐을 뺏다시피 마차에 던지고 환자를 싣는다.

얼떨떨해하는 것도 잠시. 아이를 든 여인과 노인을 부축하는 이, 환자를 등에 업은 자가 서둘러 움직였다.

“빠, 빨리 움직여! 곧 게이트가 열릴 거라고!”

“아버지, 조금만 힘내세요. 마차에 타시면 좀 나을 겁니다.”

“엄마 손 꽉 잡아, 알았지?”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영지 안으로 벨브레그와 그의 군사들이 나아갔다.

갈등하는 이들과 전투를 준비하던 이들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금이라도 저 행진에 합류할까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잡념을 없애려는 걸까.

-콰앙!

그가 발을 내리꽂았다.

폭발하듯 터지는 대지.

이목이 집중된다.

“남은 자들은 들으라. 여기, 그대들의 부모와 자식, 부인과 연인이 수도로 향한다. 그리고…….”

차앙!

검을 뽑은 그가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누군가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이들은 죽겠지. 물어뜯기고 손톱에 찢기고 발에 짓뭉개질 것이다.”

-쿵!

군사들이 발을 굴렀다.

“몸이 녹아내리고, 저주에 사지가 비틀릴 것이며, 형체조차 없는 주검이 될 것이다! 그걸 원하는가!”

-쿵!

“소중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길 원하는가!”

압도적인 패기.

수많은 전장을 헤치며 살아남은 노장의 기세가 뻗어 나간다.

숨 막히는 긴장감.

들떠 오르는 고양감.

그의 연설을 들은 이들이 침을 삼켰고.

“나와 함께 싸우라! 가족들이 피할 시간을 벌어라!”

쿵!

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그대들을 버린 대가는 내 목숨으로 갚겠다!”

와아아아아아!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전투의 서막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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