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51화 (351/740)

351화 출전

하얀 나무. 그 안에서 나와 냥펀, 핥짝이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71층에 떨어진 지 일주일이 넘게 지난 시점.

매 층마다 클리어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습관이 남아 있어서일까, 상위층처럼 명확한 클리어 조건이 없는 곳에서 떨어져도 가만히 있질 못하겠다.

누군가는 이때다 싶어서 나태해질지도 몰랐으나…….

“보면 알겠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아. 수도권은 괜찮지만 다른 쪽은 괴멸 가까운 타격을 입은 곳도 있징.”

“아, 저기가 그곳이군. 동부전선. 지하 상인을 통해 본 적 있어.”

“그것도 말해야지. 저번에 서신 온 거 있다며. 마궁 열렸다고.”

“맞다, 역시 핥짝이야.”

적어도 나와 멤버들은 달랐다.

가만히 있어 봤자 성장하는 건 없으니까.

이 녀석들만 그런 게 아니라.

[니머리 탈모]: 와, 여기 몬스터 겁나 많아.

[냥냥펀치]: 너, 어디 지역이랬지?

[니머리 탈모]: 동쪽인데. 긱센 지방인가 그럴걸.

[냥냥펀치]: ㅇㅎ! 거기 옆 동네 게이트 터짐.

[니머리 탈모]: 아니, 왜요. 왜 내 옆에서 터지는데요 ㄷㄷ.

[정수리 핥짝]: 니 팔자가 그렇지 뭐ㅎㅎ.

[니머리 탈모]: 네 팔자가 노ㅇ…ㅖ인 것처…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정수리 핥짝]: 뭐, 시키야!

탈모맨도 고생 꽤 하고 있었다. 긱센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수도권이 아니면 개판 났을 게 분명해서.

가늘게 눈을 떴다. 묘하게 찝찝한 이 기분.

‘탑은 항상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해.’

아무리 힘들고 답이 없는 상황이라도 돌파구는 있었으며, 아무것도 아닌 척해도 뒤로는 따로 점수를 매기고 있다.

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냈을 때 보상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위층은 그동안 겪은 층과는 결이 다르다.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명확하지 않은 지금, 최대한 자신의 영역 내에서 활동을 해야 한다.

내가 지하 상인을 통해 정보를 모았던 것처럼 냥펀과 핥짝이 하얀 나무에서 영향력을 키워 나갔고.

“내가 같이 일하는 하인들한테 들었는데, 조만간 징집을 할 거라는 소문이 있어. 가족들 몰래 빼내려고 하던데. 가면 죽는다고.”

핥짝이는 왕족과 귀족 아래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통해 온갖 소문과 소식을 물고 왔다.

“확실히 분위기가 빠르게 흘러가고 있징. 나쁜 쪽이기는 하지만. 귀족 서열이 바뀌었거든. 하켄 백작이 평야 게이트에서 죽었어. 비공식 처리하기는 했지만 명부에서 빠져나간 거 보면 무조건이지.”

냥펀이야 귀족 신분으로 스타트를 끊은 만큼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하는 내부 정보를 캐냈다.

군인뿐만 아니라 귀족들까지 알게 모르게 죽어 나가고 있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귀족들이 관리하는 영토에 게이트가 나타나면 알아서 해결하거나 주변 영지에 지원을 요청하니까.

그것도 힘들면 수도에 병력을 요청하는 건데.

‘하얀 나무에 있던 귀족, 그것도 백작이 직접 내려갔다면 그만큼 위험한 게이트라는 거지.’

다르게 말하면 귀족이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로 인력난에 시달린다는 것이기도 했다.

“읏차. 야, 난 빨래하러 간다. 너희 회의 잘하고.”

잠시 짬을 내 집무실에 들렀던 핥짝이가 빨래가 가득한 바구니를 번쩍 들어 올리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현재 신분이 노예라 일이 계속 있다. 그나마 냥펀이 뒤를 봐줘서 이렇게 떠들 시간이라도 있는 거라나.

“빨래터에서 얌전히 있구. 괴롭히는 놈들 있으면 나한테 꼭 말해!”

“어, 일단 줘패고 뒷수습 맡길게.”

“그건 쫌.”

익살맞게 웃은 핥짝이가 방을 나섰고, 나와 냥펀도 외투를 걸치며 회의실로 움직였다.

냥펀의 직속 부하가 되며 보좌관 직책으로 귀족 회의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흘낏 뒤를 돌아보며 냥펀에게 말을 걸었다.

“핥짝이한테 시비 거는 애들이 있어?”

“지금은 없는데 또 몰라. 말 안 하는 걸 수도 있구. 애들 갈구는 것들이 은근히 많거든. 요즘 들어 더 그런 것 같아.”

-짜아악!

바로 그때, 살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근처, 한 여인이 보였다. 척 봐도 귀족인 것이 틀림없는 옷차림.

흥분했는지 숨이 가쁘고 어깨를 들썩인다.

어째서 눈물이 고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말해 보거라! 누구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지도 모르고!”

-콰악!

뺨을 맞고 쓰러진 하인을 걷어찼다. 따로 훈련을 받은 것 같지는 않지만 귀족은 귀족.

월등한 신성력을 기반으로 강인한 신체를 지녔고, 배를 차인 하인이 꺽꺽거리면서도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입을 함부로, 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발길질이 이어졌다.

감정이 실려 있다. 일개 하인을 향해 쏟아내기에는 깊은 감정이.

“너희, 네깟 놈들 때문에 백작님이!”

“그만. 그만하시고 진정하십시오, 백작 부인!”

“이거 놓으세요! 누가 지켜 주는지도 모르는 놈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도 모르는 금수란 말입니다!”

“일단 진정을… 뭐 하느냐, 얼른 사라지지 않고!”

회의실로 향하던 군복을 입은 남자가 그녀를 붙잡는다.

빨리 사라지라고 턱을 까딱이자 얻어터지던 하인이 부리나케 도망간다.

그대로 울음을 터트린 여인과 그녀를 달래며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냥펀이 작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야, 그 지원 나갔다가 죽은 백작 부인. 옆에는 동부전선 2성 장군 벨브레그.”

아, 그 출전 나갔다가 죽었다는 사람. 죽은 백작을 대신해 회의에 참가하러 온 모양이다.

저 하인은 조심성 없이 떠들다가 잘못 걸린 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냥펀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장군도 마찬가지.

나도 서둘러 냥펀을 따라갔다.

그건 그거고.

‘벨브레그면 그 사람이네.’

추천장에 적혀 있던 사람. 2성 장군인 걸 보니 확실하다.

보고와 회의를 위해 동부전선에서 복귀한 건가.

찰나지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 시간이 됐다.

* * *

귀족 회의.

앞으로의 향방을 거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여 그간 상황을 보고하고 회의를 하는 시간이다.

아무나 올 수 있는 건 아니고 어느 정도 직위가 있거나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가능한 많은 귀족이 모이는 것을 지향하지만 워낙 게이트가 많이 터져서 불참하는 이들도 상당한 편.

냥펀도 직위 자체는 남작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전쟁 물자를 관리하기에 참가 자격이 있었다.

‘대략 18개의 가문에서 온 건가.’

수행원과 하인들이 섞여 사람은 훨씬 많았지만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는 건 20명이 살짝 넘었다.

부부 동반으로 오거나 자식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어서.

복도에서 봤던 백작 부인처럼 모종의 이유로 대리인이 참석한 경우도 있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중앙으로 물자를 옮기고 배분하는 건 너무 늦습니다. 지방에서 자율적으로 물자를 공급하는 게 빨라요!”

“그건 남쪽 상황이지. 다른 곳은 자체적으로 충분한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기 힘들단 말이요.”

“행정이 부실한 게 자랑입니까?”

“뭐라? 전선에서 몬스터를 막고 있는 게 누구라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무너지면 그쪽은 무사할 거 같은가!”

언성이 오고 가는 회의장.

여유가 없는 건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수도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절박하다.

물자 관련된 부분은 냥펀이 조절하고 있는지라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장난 아니다.

눈에 라이트라도 꼈나. 부담스러워 죽겠다.

“기존 체제 유지로 결론. 땅땅.”

“끄응.”

“사실 더 나은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

냥펀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른 귀족의 의견을 기각해 버렸지만.

그나저나 회의에서 저런 말투 써도 되는 건가.

됐다. 핥짝이도 은갈치 복장으로 하인 일을 하는데.

시스템이 적당히 보정해 주고 있을 거다. 그러니 냥펀도 귀족으로 활동하지.

물자 관련된 내용은 이걸로 끝. 이어 다른 안건이 나왔다. 흥미롭지만 재미는 없는 시간의 연속. 이어 익숙한 얼굴이 앞으로 나섰으니.

“대략 한 달 내로 수도까지 몬스터 웨이브가 몰아닥칠 겁니다.”

벨브레그가 다짜고짜 폭탄 선언을 해 버렸다.

수도가 함락된다는 말에 일순간 정적이 깔렸고.

“보다시핍니다.”

그가 회의장 벽에 걸린 커다란 지도를 가리켰다.

제2 천계를 보여 주는 지도 아티팩트.

그곳에 초록색으로 표시된 몇 개의 지역이 있다.

수도를 포함해 그나마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영지. 최소한의 안전과 경제 활동이 보장되는 곳.

그 수가 많지는 않다. 14개. 그중 2개는 초록빛을 잃기 직전이다. 위태위태하다는 뜻.

이곳들을 제외한 지역은 다른 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위험도에 따라 노랑, 주황, 빨강.

마지막으로.

‘검정.’

완전히 파괴되어 회복이 불가하거나 현재로서는 수복이 불가능한 지역.

그중 하나는 혼돈의 파편이 있던 곳이다.

문제는 이거다.

“이곳이 뚫리면 다음은 수도입니다.”

수도에 인접한 붉은 지역.

조금씩 색이 검게 변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다.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변수가.

흠. 헛기침을 한 번 한 벨브레그가 보고와 함께 앞으로의 작전을 설명했다.

어디서 어떤 부대가 오는지, 방어진을 구성해야 하는 위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플래B와 보급로 등등.

하나같이 심각하고 복잡한 이야기였지만 결론은 그거다.

“긱센을 봉쇄하고 완충지대로 삼아야 합니다.”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해당 지역을 막아 버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긱센은…….

‘탈모맨이 있는 곳이야.’

몬스터가 많다기에 그냥 앓는 소린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냥펀 역시 표정이 구겨졌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다른 귀족들의 표정도 굳었다.

한순간에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아직 대피령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시간도 없었지, 빌어먹을.”

“지금이라도 지원 부대를 넣는 건 아닌지.”

“그럼 방어선 구축을 못 해. 흩어진 부대를 모으는 것만 해도 빠듯하다고.”

“결국 저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겠다는 거 아닙니까!”

쾅!

귀족 중 한 명이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다른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찰나.

“맞습니다.”

벨브레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변명도 없었다.

“모든 비난과 책임은 제가 집니다. 이미 인수인계는 마쳤습니다. 제 빈자리는 부사령관이 맡을 겁니다.”

“그 말은 설마…….”

“방어선이 만들어지는 동안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뒤를 부탁합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을 한 벨브레그가 깊게 고개를 숙이더니 회의장을 떠났다.

열린 문 사이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린다.

이미 출전 준비를 마쳤다는 거겠지. 굳이 회의에 참석한 건 자신을 따라 사지로 갈 부대를 모으고 앞으로의 일을 통보하기 위함이었다.

침묵만 남은 회의실, 사실상 회의가 끝난 시점이었고.

“냥펀, 나도 갔다 올게.”

“어?”

“탈모맨 데리고 와야지.”

“갈 거면 같이 가!”

“여긴 너랑 핥짝이가 남아야지, 일이 어떻게 될지 알고. 방어선 빨리 만들어 줘, 혹시 모르니까. 그건 너만 할 수 있어.”

“야!”

툭. 냥펀의 어깨를 두들기고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가는 벨브레그를 따라잡았다.

“장군.”

“음? 자네는 아까.”

인벤토리에서 추천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낯익은 이름에 살짝 놀란 듯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후회해도 모르네.”

“안 합니다.”

난 그의 부대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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