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50화 (350/740)

350화 하얀 나무 진입

짐은 많지 않았다. 최소한의 물건들만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물건은 인벤토리와 아공간 아이템에 들어 있기도 하고.

“자네, 어디 가나?”

“아, 페그리도.”

푸줏간 주인이다. 말없이 편지 하나 남겨 두고 떠날까 했는데 마주칠 줄이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외지인을 받아 줄 정도로 정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언제 범죄자로 돌변할지 모르는 이를 가게에 들인 거니까.

다르게 말하면.

‘혹시 모를 상황이 있어도 대응할 자신이 있다는 거지.’

불편함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인정을 놓지 않는 건 같지만.

나이가 들어 구부정한 허리. 뒷짐을 지었고 한쪽 눈을 잃어 안대를 썼다.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저녁 식사는 항상 같이했기에 어느 정도 아는 게 있었다.

퇴역 군인 출신이라고 했던가. 꽤 높은 직위까지 올랐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런 양반이 어째서 빈민가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떠나려 했는데 들켰네요.”

“어디로 갈 생각인가?”

“글쎄요.”

정해 둔 곳이 있기는 했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만큼 주변인들이 엮이게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특히나 내 목표는 왕관. 하얀 나무와 직접적으로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건실한 청년이 왔는데 아쉽게 됐어.”

눈썹을 문지른 그가 오라며 손짓한다.

따로 할 말이 있는 걸까.

“갈 곳이 없다면 군에 지원하는 것도 방법이지.”

그가 품을 뒤지더니 뭔가를 꺼낸다.

“요즘 같은 시국에는 군대만큼 신분 상승 가능성이 높은 곳도 없어. 위험하기는 하지만 공만 제대로 세우면 삶이 달라지지. 게다가…….”

옆으로 다가온 페그리도가 투명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죄가 있는 자도 군에 들어가면 죄가 사라진다네. 범죄자, 하층민, 신분을 숨겨야 했던 이들이 군대로 향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야. 자넨 아직 젊어. 밝은 곳에서 살아야지.”

“아.”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페그리도는 날 신분을 숨긴 고위 천족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범죄든 숨겨둔 자식이든 어떤 일로 인해 신분을 밝히지 못하는.

그것도 그럴 것이.

[조현수]

-쁘찡 연합의 핵심 쁘띠공듀!

-최고 등반 층 71층.

-현재 임시 천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백작 이상의 신성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성력으로만 따지면 귀족들과도 비빌 수 있다.

버프를 받으면 왕족이랑도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천계는 분명한 신분제 사회. 그 척도가 되는 것은 부모의 신분과 신성력이다.

대체로 신성력이 높은 이들이 신분도 높고, 또 그들끼리 결혼을 하니 신성력이 대물림 되는 구조라 보면 됐다.

다르게 말하자면 노예로 태어나더라도 신성력이 특출나게 높으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

모두의 인정을 받을 만한 업적을 쌓거나, 귀족들의 눈에 띈다면 말이지.

‘생각보다 천족들의 신성력이라는 게 대단치는 않더라고.’

프램버그에서 신성력이 700을 넘는 건 천족 정도나 가능하다고 했었나.

느껴본바 모든 천족이 그렇지는 않았다.

탑을 겪은 이들은 좀 낫지만 그렇지 않다면 신성력 스텟이 700이 안 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하층민은 평균 500 이하라는 거 같다.

“가져가게. 내 동기 녀석이 도와줄 수도 있어. 무운을 빌지.”

페그리도가 툭, 들고 있던 뭔가를 내게 건네고는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돌돌 말려 있는 문서. 난 내용을 살폈다.

“추천장이라.”

한때 대령 자리까지 올랐던 건가. 그의 직인이 찍힌 곳에는 전 대령 페그리도라고 적혀 있었다.

받는 자는 벨브레그. 흐릿하지만 앞에 준장이라 적었다 지운 흔적이 있다.

지금쯤 계급이 더 올랐겠지. 준장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높은 신분 아닌가, 원스타인데. 계속 군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투스타도 달지 않았을까?

‘일단 챙기자.’

뭐가 됐든 필요할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사실 군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이렇게 되면 상황이 다르지.

그럼 움직여 보실까.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그곳이다.

‘하얀 나무.’

핥짝이와 냥펀이 있는 곳.

심지어 냥펀은 스타트 신분이 높다. 내부로 침입하기 딱 좋은 상태.

커뮤니티가 있기는 하지만 직접 만날 수 있는 루트를 만들어 두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

내부 사정이 어떤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들이 있고.

다 떠나서…….

“아직 레지스탕스는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도 못했단 말이지.”

“그에에.”

레지스탕스로 가기에는 뭐가 없다.

규모도 작고, 체계도 없다. 사실상 천족 몇 명으로 이루어진 소모임 느낌이다.

이제 막 만들어진 상태라고 해야 하나. 하얀 나무와 맞부딪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지금은 윗사람들과 갈등할 때가 아니라서. 당장 먹고사는 게 바쁜데 뭔 투쟁이야.

‘내가 만나 온 레지스탕스는 규모가 있었어. 능력 있는 녀석들도 있었고.’

71층은 레지스탕스가 그 정도의 규모가 되기 전의 시점인 거 같다.

소규모 집단이 어떤 계기로 하얀 나무와 싸울 정도로 덩치가 커진 걸까.

분명 계기가 있을 거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거리로 나가 마차를 탔다.

“수도로.”

“예, 알겠습니다. 이럇!”

금화를 튕겨 주자 마부가 머리를 조아리며 마차를 몬다.

마차보다는 땅굴 이동이나 파이어 밤으로 날아가는 게 더 빠르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중간에 병사들이 달라붙기라도 하면 귀찮아진다. 이방인이라 신분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냥펀을 만나려는 이유 중 하나다. 제대로 된 신분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핥짝이와 냥펀 역시 가만히 놀고먹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입지를 확실히 다지든 뭘 하든 할 테지.

-달그락달그락

포장이 벗겨진 도로.

승차감이 빈말로도 좋지는 않았으나 내색 없이 창문을 바라봤다.

하수도를 기준으로 나뉘는 도시. 빈민가의 어둑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위성 도시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건 다 있는 곳.

병사들이 돌아다니며 최소한의 치안을 지키고 있었으며, 상점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아닌 멀쩡한 식재료와 물건을 팔고 있었다.

돈이 좀 있는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천족이 거드름을 피우고, 아직 어린아이는 부모를 도와 양동이를 끌고 간다.

나름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풍경.

‘다른 지역은 개판이지만.’

얼마 남지 않은 평화다.

지하 상인을 통해 본 다른 지역은 전쟁터였으니까.

무법천지.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은 곳. 몬스터만큼이나 사람이 무서운 시기.

나도 잘 안다. 아니, 등반하고 있는 이들 모두가 잘 알겠지.

이미 한 번씩 겪어 봤으니까.

대격변. 세상이 바뀌던 날을 기점으로.

이곳도 마찬가지일 거다. 잘 봐 두자.

턱을 괸 채 상념에 빠져들었다.

* * *

제4 천계 수도, 네스첼.

그 규모가 작은 왕국 전체와 맞먹는 곳.

다른 세계와 달리 천계는 왕국이란 개념이 없다.

세계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져 계급에 따라 활동하니까.

화려한 공간. 위성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게 높은 건물들과 깔끔한 복장의 사람들.

제대로 된 갑옷을 입고 근무를 서는 군인들과 귀족들을 모시는 하층민이 부지런히 돌아다닌다.

복잡할 수도 있었으나 큰 거리가 워낙 잘 정돈되어 있어 혼잡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들어가려는 곳은 수도 중앙, 하얀 나무.

왕족과 귀족들이 활동하는 곳이었으며, 주요 기관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철저하게 신분이 증명된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만큼 보안이 철저하다.

“손님, 여기까지밖에 못 들어갑니다요.”

“이 정도면 충분해.”

팅. 팁으로 금화 하나를 더 건네고 마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이런 걸 다. 좋은 하루 되십쇼!”

마부의 표정이 밝다. 금화 두 개면 하층민이 한 달 동안 먹고 살 정도의 금액이니까.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준 건 아니다.

이곳의 금화는 나중에 가면 쓸 데가 없기도 하거니와.

‘그래. 봐 줘야지.’

쉽게 금화를 주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도 있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그들 입장에서는 돈이 꽤 많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저기, 입구에 서서 신분을 확인하던 병사도 날 훔쳐보는데.

겉모습은 허름하지만 뭔가 있을 거 같은 인상을 풍기는 정도면 족하다.

당당히 정문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이 보인다.

대부분 평민 이하인 이들. 물건이나 식재료를 납품하려는 이들. 혹은 타 지역에서 찾아온 인사들.

난 그들을 지나쳤다.

일반인들이 통행하는 곳과 달리 한적하기 그지없는 통로.

귀족과 왕족, 혹은 그들이 부리는 부하들이 사용하는 곳.

긴급 서신을 줄 서서 보낼 수는 없으니까.

“잠시 멈춰 주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병사가 길을 막는다.

아까 금화를 튕기는 걸 봐서인지 곧장 쫓아내지는 않는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신원 확인을 위해 후드를 벗어 주시겠습니까?”

“위에서 연락 못 받았나?”

후드를 벗으며 되물었다.

놈의 눈이 돌아간다. 혹시 실수한 게 아닐까 싶은 모습.

급히 품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내 얼굴과 목록을 살핀다.

“어, 그. 방문자 목록에는 없는데.”

없겠지. 들어간 적도 없는데.

그냥 시간 말 섞으며 시간 좀 때우려는 거다.

“죄송하지만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신분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신분증을 요구할까 봐 말이지.

보여 줄 신분증이 없거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됐는데 안 오고 뭐 하는 건지.

괜히 잡혀가면 신원불명자로 감옥에 처박힐 텐데.

“내 신분을 알아서 좋을 게 없을 텐데. 따로 임무를 받고 움직이는 거라.”

녀석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여차하면 돈이라도 찔러 넣어 줘서 통과할까 했더니 그건 안 될 거 같다.

벌써부터 경계심을 올리는 걸 보니 말이다.

“최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어 철저히 경계하라는 상부 지침입니다. 실례지만 잠시 따라…….”

병사가 날 연행하려는 그때.

“왔어?”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냥펀. 그동안 잘 먹고 잘 쉬었는지 얼굴에서 광이 난다.

안 그래도 금색으로 번쩍이는 녀석이 귀족이랍시고 장신구까지 더 늘렸다.

-쿵!

냥펀을 확인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병사.

툭툭. 녀석의 어깨를 두드린 냥펀이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서, 설마 귀족께서 직접 오실 줄이야.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아냐, 그럴 수 있지. 경계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아.”

내게 사과를 하는 병사를 보며 싱긋 웃고 냥펀을 따라 들어갔다.

“왜 일하는 애 괴롭히고 그러냥.”

“괴롭히기는, 그냥 대화 좀 나눈 거지.”

냥펀의 핀잔에 피식 웃었다.

옆에는 직속 하인으로 핥짝이가 서서 부채질을 하고 있다.

“이야. 잘 어울린다, 너.”

“뒤진다.”

“냥펀 님! 저 하인 나부랭이가 절 겁박합니다!”

“지는 신분증도 없으면서!”

핥짝이가 울컥했으나.

“어허! 무엄하도다! 언성을 높이다닛.”

“즈승흡느드.”

냥펀의 말 한 번에 꼬리를 내렸다.

이야. 보기 드문 광경이네. 나중에 뒷수습 어떻게 하려고.

“어쩔 수 없어. 여기서는 이러지 않으면 이상하게 보거든.”

슬쩍 다가온 냥펀이 속닥인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괜히 어색하게 구는 것보다는 이들의 문화에 따라가는 편이 옳았다.

냥펀의 안내에 따라 집무실로 향했다.

책상에 가득한 서류들. 보니까 전쟁 물자에 대한 것들인데…….

“여기서도 상인 일이냐.”

“다행인 거지 뭐. 아예 모르는 일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것도 맞지.”

적당히 자리에 앉자 냥펀이 금으로 만든 신분증을 건넨다.

“말했던 대로 내 직속 부하로 넣어 놨엉. 어지간한 곳은 프리패스일 거야.”

“땡큐.”

“왜 나는!”

핥짝이가 억울해했지만 별 수 있나.

“넌 스타트가 노예라 어쩔 수 없단다.”

“더러운 천족 놈들, 내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거, 대놓고 국가 전복 선언하지 마라 좀.

이걸로 신분은 확보했고.

“내부 상황은 어때?”

“별로 안 좋아. 동부 지역 절반을 봉쇄했어.”

이제는 귀족들만 알 수 있는 정보를 얻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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