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49화 (349/740)

349화 제2 천계

71-73층의 배경은 제2 천계. 쉐핀을 비롯한 천족들이 있던 세계다.

NPC가 됐다는 건 그들의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완전히 멸망하기 전인 시점이라 이거지.”

“그에에.”

우리 세계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도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들었으니까.

어찌 보면 우리의 미래나 다를 바 없는 상황.

물론 세계관이 다른 만큼 다른 점도 많지만.

[임시적으로 종족 값이 천족으로 바뀝니다.]

[71-73층의 NPC 모두가 당신을 천족으로 인식합니다.]

먼저 이곳에서는 천족으로 활동하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조치일지도 모른다. 멸망 중인 세계에서 외국인도 아니고 이계인이 버젓이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테니.

완전히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우리 세계는 딱히 그런 게 없는 거 같은데 다른 세계는 주변 차원과 엮여 있는 경우가 제법 되는 거 같아서.

킬더레스도 마계와 천계의 경계를 뚫었고, 예전 28층에서 만났던 리치 푸레고스도 인간계에 있던 녀석이었다. 계약을 통해 킬더레스가 있던 마계로 가려고 했다니까.

멸망한 세계를 피해 다른 차원으로 피신하는 건 이미 수많은 이가 시도했다.

결과적으로는 전부 망했지만. 잠재적으로 그 방법은 답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다. 엮여 있는 세계는 동시다발적으로 멸망의 길로 접어드니까.

그건 그거고.

“오늘도 열심히구만.”

“예. 먹고 살려면 일해야죠.”

“늘 말하지만 젊은 나이에 여기 오래 있을 필요가 없어. 차라리 군에 지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하하하. 염두에 두죠.”

마을 외곽, 허름한 복장의 천족이 내게 손을 흔들었다.

사냥한 몬스터를 해체하던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웃었다.

제2 천계 수도 네스첼. 그곳의 위성 도시 중 하나에 머물고 있다.

다른 곳에서 흘러들어온 외지인이라는 신분이었고, 도축 스킬이 있는 만큼 사람들이 기피하는 푸줏간 일을 하는 중.

이곳에서 무엇을 하느냐.

“나날이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군.”

흐름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있다.

레지스탕스에 섞여서 따로 임무를 하고 있느냐? 그건 아니다.

그렇다고 하얀 나무에 들어가 어떤 놈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지도 않다.

내가 고른 선택지는 그냥 제2 천계로 진입하는 거였으니까.

무소속. 이방인. 그게 지금의 내 입지다.

대외적으로는.

-스윽

고기와 지방, 뼈와 가죽을 깔끔히 나누어 정리한 뒤 해체 도구를 벽에 걸었다.

[클린 (A) Lv.7]

-쏴아아아아

앞치마를 벗고 클린을 사용하자 몸에 밴 피 냄새와 노린내가 씻겨 나간다.

몸과 옷의 노폐물이 사라지고 산뜻한 느낌이 감돌았다.

펠라인 세트는 인벤토리에 넣어 둔 상태. 아무래도 그건 너무 눈에 띄어서.

선반 아래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꽤 묵직한 무게. 안에는 제2 천계에서 사용되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다.

깡총이에서 뜯어낸 아이템이랑 화조국과 거래하며 모은 물건들을 팔아 돈을 모았다.

도축자는 일종의 위장 직업. 흉흉한 분위기, 이방인이 일도 안 하고 어슬렁거리면 괜한 오해를 사기 딱 좋아서.

허름한 로브를 꺼내 두르고 후드까지 뒤집어쓰자 얼굴이 가려진다.

얼핏 수상한 자로 몰릴 수도 있었으나…….

‘나 같은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이들이 많거든.’

이유는 다양했다. 멸망이 진행 중인 곳인 만큼 범죄가 끊이질 않아서. 여인들과 노인, 아이는 범죄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남자들은 인신매매단에 잡혀 군에 팔려 가지 않기 위해. 혹은 탈영병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수도 근처에 있는 위성 도시인데도 이 모양이다. 다른 도시는 사실상 무법지대나 마찬가지라나.

“신선한 과일이 있습니다!”

“여기! 윗분들이 먹다 남긴 음식도 있어요. 곰팡이도 아직 안 폈습니다.”

신선하긴 개뿔. 상품 가치도 없고 물러 터진 과일에 음식물 쓰레기를 주워와 그릇에 올려 둔 뭔가일 뿐이다.

내가 위치한 곳은 위성 도시 외곽, 빈민가다. 이 정도 풍경은 익숙하다.

양지의 사람들이 굳이 찾아올 필요 없는 곳. 다르게 말하면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떳떳하지 못한 이들이 가장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

71층에 떨어지고 3일간 매일 밤 주변을 돌아다녔고.

-끼이이이익

원하던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단골이 됐다.

흔한 폐가의 문을 열었다. 녹슨 철문이 거슬리는 소리를 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소음은 일종의 알림벨이었으니까.

-스스스스

겉으로 보이는 건 없지만 수많은 눈길이 나를 쫓는 게 느껴졌다.

낮인데도 어두운 공간.

-철컥

문이 저절로 닫힌다.

야간 시야가 있는 만큼 어둠은 내게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았으며, 익숙한 몸짓으로 가장 안쪽 테이블이 배치된 곳에 앉았다.

위에 올려진 거라고는 앙증맞은 종 하나.

그것을 흔들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애초에 소리가 나지 않는 종이니. 대신…….

“또 오셨군요.”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보.”

툭.

가져온 금화 주머니를 테이블에 던졌다.

신기루처럼 방 안에 나타난 사내가 빙긋 웃으며 주머니를 챙겼다.

내용물은 확인조차 안 한다. 그동안 거래를 여러 번 해서. 나름의 신뢰 표현이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

[파울로카- NPC]

-지하 상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칭호, 비굴함의 장인 보유.

.

.

.

지하 상인.

개인의 무력은 대단치 않다. 칭호와 스킬이 보인다는 건 나와 동급 이하라는 뜻이니까.

이들이 무서운 건 무력 때문이 아니다.

음지에서 활동하며 장물, 노예, 귀족의 사생활과 같은 정보 등등 안 다루는 게 없다는 거지.

괜히 위협했다가는 언제 어떤 식으로 보복을 가할지 몰랐다.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치안이 개판이니 이런 놈들이 활개를 치지.’

다르게 말하면 정상적인 루트로는 먹고살 수 없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는 높으신 양반들도 이들과 접점이 있다고 하는데 나야 이쪽 사람이 아니니 정확한 건 모르겠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

“여기, 주문하신 거 준비했습니다.”

미리 준비했는지 바닥에 내려두었던 상자를 테이블에 올린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수정체 13개.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고객님은 취향이 독특하시군요.”

“내가 관음증이 좀 있어서.”

“하하하! 농담도.”

대꾸하지 않고 수정 구슬에 손을 올렸다.

-파아아앗!

빛무리와 함께 머리로 영상이 들어온다.

영상 저장 장치. 제2 천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영상이다.

아무거나 받은 건 아니고.

‘동부 전쟁터. 새롭게 생겼다는 게이트 사냥 영상. 저건 재앙인가? 처음 보는 형태인데. 귀족들은 복장부터가 다르군. 레지스탕스 녀석들은 오늘도 고생이네.’

이곳에 나타나는 괴물들과 현상. 각 세력의 동향 등을 담은 것들이다.

지하 상인의 연결망이 하얀 나무의 하인들과 군인, 하층민 등등 광범위하게 뻗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끼익.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금까지 확인한 재앙만 6개. 그중 2개는 나도 모르는 놈들이고 혼돈의 파편은 하나 발견. 5성급 이상 몬스터가 나오는 고위험 게이트 발생 빈도도 꽤 많아.’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정리했다.

먼저 재앙. 50층대에서 겪었던 것들과 다른 놈들이 섞여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 봤는데, 제2 천계의 탑에 나타난 재앙들은 내가 오르고 있는 탑에서 나타난 재앙과 종류가 달랐다.

아무래도 해당 탑에서 나타난 재앙들만 그 세계에 튀어나오는 모양.

하기야, 혼돈의 파편도 14종이지만 실제로 나오는 놈들은 반도 안 된다고 릴카가 말했었다.

“상황이 안 좋군.”

“예. 아무래도 탑의 부름을 받는 이들이 적어서 전사들이 충원되지 않으니까요.”

이미 우리 세계도 시작됐다. 탑에 소환되는 이들이 줄어드는 중이니까.

그 결과가 이거. 헌터가 생기는 것보다 죽는 속도가 빠르다. 그러니 일반인도 잡아다 군인으로 만들지.

천족인만큼 다들 기본 스펙이 있으니 더 부려 먹는 걸 수도 있고.

“오늘은 이만 가지.”

“헤헤. 물건들은 바로 처분하겠습니다. 그, 다음 거래 물품은 어떻게 하실는지? 똑같은 것들로 준비할까요?”

“아니. 이만 됐어. 다음에는 다른 걸 주문할 거야.”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굽신거리는 녀석을 방에 두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내가 굳이 하얀 나무와 하얀뿔 양쪽을 고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원하면 갈 수 있으니까. 이미 레지스탕스와는 한배를 탔고 하얀 나무에 진입할 방법도 있다.

귀족의 유품도 있고 날개도 있다. 신성력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고.

굳이 스타트 지점을 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것도 그렇지만…….

“멸망 중인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 싶었단 말이야.”

“그에에.”

만약 지구가 이 상태가 되면 버틸 수 있을까?

‘절대 못 하지.’

당장 60층에 올랐다고 S급이라고 신나 하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6성급 몬스터로 이루어진 게이트 10개만 열려도 무너지는 나라가 있을 거다.

아직은 과도기 초반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다음으로.

‘70층대는 클리어 조건이 따로 없어.’

시스템도 말하지 않았던가.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세계를 마주하라고.

친절하기도 하지. ‘너희도 이렇게 될 거니까 잘 봐 둬.’이러는 거랑 뭐가 달라.

어쩐지 70층에 올라온 이들 중에 밖으로 나간 사람이 없다 했다. 그냥 얌전히 있기만 해도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구조니까.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식으로 층을 꾸몄다는 건 뭔가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것이었고, 직접 참여하고 있는 이상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발버둥 쳐보라는 거겠지. 더 나은 결과가 나오도록.

뚜둑. 몸을 풀었다.

“가자, 덕춘아.”

“궥.”

푸줏간에 들러 짐을 챙겼다. 정보는 모을 만큼 모았다.

세상이 어떤 꼴로 돌아가는지도 알았고. 다른 사람들은 방향성을 잃고 이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수도 있지만 난 아니다.

해야 할 게 분명히 있다.

왕관을 빼앗는 것.

커뮤니티를 켰다. 71층에 올라온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쁘띠공듀]: 님들, 님들 모해영?

가볍게 운을 띄었고.

[냥냥펀치]: 핫핫핫! 움직여라 노예들아! 이 몸에게 맛난 음식과 음료를 대령하렷다!

[정수리 핥짝]: 왜… 왜 내가 노예?

[니머리 탈모]: 평소 업보 때문 아닐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수리 핥짝]: 내가 뭘 했다고!

[냥냥펀치]: 어허! 손이 노는구나. 채팅칠 시간에 부채질을 하도록!

[정수리 핥짝]: ㅂㄷㅂㄷ… 예, 예히. 알겠사옵니드.

[니머리 탈모]: 냥펀 님! 방금 이 악물었어요! 혼내 줘요!

[정수리 핥짝]: 넌 꼭 토벌당해라^^ 아니지. 내가 직접 갈게 ㅎㅎㅎㅎ.

이때다 싶었는지 멤버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나야 선택지가 있지만 다른 녀석들은 40층대에서 결정된 유형에 따라 스타트가 갈린다.

냥펀은 하얀 나무 소속 고위 간부 직위로 시작.

핥짝이는 그 밑에 노예1.

탈모맨은 레지스탕스 소속으로 처리됐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것도 같고.

뭐, 나야 잘된 거지. 두 세력 양쪽에 연결다리가 있다는 거니까.

그럼, 어디 보자.

“거기부터 가 볼까.”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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