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71층
목록을 보자마자 선택을 해 버렸다.
자신의 조언은 듣지도 않은 채 결정을 내린 게 불만인지 릴카가 등짝을 두들겨 댔다.
“이 송충이보다 못한 똥멍청이! 벼룩 더듬이 같은 놈!”
“아니, 막 고른 게 아니라.”
“고블린 코딱지! 뿔늑대 이빨에 낀 찌꺼기이이!”
“에라이, 녀석아.”
-따악!
“꿱!”
이때다 싶어 입을 놀려 대는 녀석의 정수리를 때려 줬다.
뒷목을 잡아 올려 상품 목록과 시선을 맞추었으니.
“봐 봐, 이게 있다고.”
“엥?”
내가 선택한 물건을 확인한 릴카의 눈이 커졌다.
“이게 여기 있었엉?”
“그런 거 같네.”
마지막 펠라인 세트. 그게 여기 있었으니까.
[펠라인의 초록색 망토 (S)]
-펄럭펄럭!
-초록초록합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멋지게 휘날릴 수 있죠!
S등급. 예상하건대 바람 속성을 지니고 있을 파츠.
역시나 일반 S급 아이템에 비하면 낮은 스펙이었으나 그건 중요하지 않다.
펠라인 세트는 합쳐졌을 때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펠라인 세트는 총 7개. 각 파츠마다 속성도 다르고 등급도 다르다.
보라색 왼팔이 A급.
남색 왼쪽 다리가 B급.
빨간 머리통이 C급.
파란 오른팔이 D급.
노란 몸통이 E급.
주황색 오른 다리가 F급이다.
남은 하나는 S급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 차원 상점에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동안 못 찾은 이유가 있었네.”
“우우웅. 설마 차원 상점에 넘어가 있었을 줄이야. 나 때는 없었는데.”
릴카가 차원 상인으로 활동할 때는 없었다고 하니 이후에 NPC가 된 이후에 누군가가 팔아 버렸다고 봐야 한다.
누군지는 모르겠다. 의도적인 뭔가가 있는 걸까. 아니면 아무거나 안 쓰는 걸 팔아 버린 걸까.
그것도 그건데.
힐끗. 릴카를 내려다봤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은데.’
릴카와 NPC, 차원 상인. 거기에 몇 가지 키워드를 섞으면 묘하게 순서가 꼬인다.
등반을 계속하면서 릴카에 대해서도 제법 많이 알게 되었다. 중간중간 대화하다 얻어들은 것도 있고.
녀석은 대림원 출신이며 소원 들어주는 연못의 대가로 차원에 버려졌다.
그때 소속을 잃고 차원 틈을 떠돌다 차원 상인을 활동했고 지금은 탑의 NPC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말이지.
‘전에 밖에서 동료들이랑 혼돈의 파편을 잡고 다녔다고 했단 말이야.’
프램버그에서 혼돈의 파편 델버튼과 마주하고 카오스 박스를 얻었었다.
이를 릴카에서 말하자 자신이 열었던 카오스 박스를 보여 주며 위험한 물건이라고 설명해 줬지.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이들 중 한 명은 이미 만났다고도 했었다. 짐작하건대 킬더레스다. 99층까지 같이 등반했다고 했었으니까.
이상하다. 릴카의 이명은 차원에 버려진 아이. 말 그대로 어릴 때 차원 틈으로 떨어졌다. 그때 혼돈의 파편을 잡고 다녔을 리가 없다. 당시에는 어렸을 테니까.
그럼 혼돈의 파편은 언제 잡은 건지?
‘차원 상인으로 활동하다가 다른 세계에 정착한 적이 있던 건가. 그때 탑을 올랐던 거고.’
단순히 생각하면 이게 맞기는 한데.
70층에 머물며 릴카한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자신은 소속된 세계가 없다고. 소원 들어주는 연못의 대가는 완전한 이별.
그때를 기점으로 릴카는 어떤 세계에도 소속되지 않은 외톨이가 되었다고 했다.
한 세계에 정착했었다면 당연히 그쪽 세계에 소속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워낙 특이 케이스인 녀석이라 확신이 안 든다. 나름 많은 걸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녀석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
뭐, 나도 나에 대한 모든 걸 이야기한 건 아니니까. 굳이 숨겼다기보다는 말할 기회도 이유도 없었다는 게 맞다.
뜬금없이 ‘내가 지구에 있었을 땐 말이야’이러는 것도 웃기니까.
이건 나중에 물어보든지 하자. 뭐가 됐든 난 릴카를 신뢰한다. 계승자로 엮여 있기도 하고.
“흠흠.”
차원 상인이 헛기침한다. 장사꾼 앞에 두고 딴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카르카였나.
“그래서 카르카, 이 망토는 얼마지?”
“다른 건 보시지도 않는군요.”
“이유는 알 텐데 뭘 물어봐.”
차원 상인은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차원 틈이라는 불가사의한 곳에서 활동하는 것도 있지만, 온갖 상품의 가치를 파악하고 이윤이 남게 파는 것 또한 기본 소양.
정보를 읽는 능력이 뛰어날 게 분명했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이 세트 아이템인 것 정도는 파악했을 거다.
녀석을 살폈다. 공손한 자세로 있지만 느껴지는 압박감이 남다르다. 아우라가 있다고 해야 하나. 전투력도 수준급일 게 뻔하다.
그도 그럴 것이.
‘차원 상인을 공격하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란 말이지.’
물론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이다. 차원 상점은 차원 상인을 통해서만 거래할 수 있으니까.
욕심은 눈을 멀게 하는 법이라 누군가는 차원 상인을 협박해 거래하려 했을 거다.
문제는…….
‘당장 릴카도 99층에 올라갈 정도의 능력이 있었어.’
대충 계산해도 알리오스나 킬더레스와 동급이다.
한쪽은 혼자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간 녀석이고, 다른 한쪽은 천마대전에서 승리한 대악마다.
각자의 세계에서 최강자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이들.
-츠즈즈즈즉
혹시나 싶어 카르카를 상대로 권능을 발휘해 봤다.
[카르카]
-차원 상인.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속담을 아시나요?
-카르카의 호기심은 대륙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역시나 제대로 된 설명은 나오지도 않는다.
나온 설명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으며…….
“이런 이런, 그래도 제가 선배인데 이런 식으로 훔쳐보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미안, 습관이라.”
“하하하! 차원 상인이 다 그렇죠. 무엇을 보든 알아보려고 하거든요. 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권능을 통해 그의 정보를 읽어 냈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동안 없었던 일. 아니지. 딱 한 명, 현자 존 트레일러를 제외하면 이런 경우는 없었다.
싸울 생각은 없다. 해봤자 손해일 뿐이니까.
“이블아이, 차원 상인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네가 얻은 칭호도 그럴 자격이 있어서 생성된 거징. 성격 나쁜 애였으면 공격할 수도 있었다구. 그래서 내가 옆에 있는 거지만.”
옆에 다가온 릴카가 속닥인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뜻.
게다가 또 하나.
‘차원 상인은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군.’
심지어 이들은 NPC도 아니다. 페널티 걱정도 없다.
그런 놈들이 일하는 곳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실감 했다.
릴카가 차원 상점을 이용하는 걸 걱정한 이유도 알 거 같고.
지금이야 도와줄 녀석이 옆에 있지만 필드로 넘어가면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그때는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으면 열지도 말아야지, 아무튼.
“펠라인 세트라, 아주 좋은 물건이죠.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만. 초록 망토를 얻고 싶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카르카가 날 가리킨다.
“당신이 모은 펠라인 세트 전부와 바꾸도록 하죠.”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녀석.
이거 참.
“노골적인데?”
“티 났나요?”
녀석의 눈에 욕심이 가득하다. 어디까지나 판매 물건의 가치를 정하는 건 상인과 구매자.
내가 반드시 살 거라는 걸 아니까 저렇게 나오는 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갑옷을 벗고 있는 건데.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힘 뺄 필요는 없다. 굳이 놈이 정한 대가를 치를 필요는 없으니까.
“카르카, 나빠! 그냥 저기 굴러다니는 먼지떨이나 가져가라고.”
“하하! 그럴 수야 있나요.”
“오랜만에 봤는데 깎아 달라고오오.”
릴카가 생떼를 부렸지만 카르카는 웃을 뿐이었다.
“다른 걸 떠나서 릴카랑 친하게 지내는 것이 마음에 안 드네요. 질투가 난달까요?”
내 옆으로 다가온 녀석이 입꼬리를 올린다.
“흐음, 어떻게 릴카랑 친해졌으려나. 그 친구랑 묘하게 닮아서 그런가? 장비도 그렇고.”
그 친구?
미간을 찌푸렸다. 릴카와 관련된 누군가를 말하는 거 같은데.
살짝 흥미가 있었지만.
“거래 얘기나 마저 하지?”
팔을 뻗어 릴카에게 가는 녀석을 막았다.
눈이 마주친다. 눈빛은 맑았지만 내면에 소용돌이치는 광기가 엿보인다.
“그 제안은 거절할게. 난 펠라인 세트가 꼭 필요하거든. 어차피 대가는 상점이 정할 수도 있잖아?”
“맞는 말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고개를 까딱인 녀석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차원 상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차원 상점이 임의로 거래 대금을 지정합니다.]
차원 상점이 움직인다.
무엇을 대가로 원할까. 불안함이 사라지질 않는다.
덕춘이를 달라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를 원할지도 모른다.
상품 목록에는 실체가 없는 것도 있으니 권능이나 기억 일부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차원 상인의 제안을 거절한다는 건 이런 위험성을 담보로 한다.
차악을 피하다 최악을 고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
“걱정 마. 내가 구해 줄 수 있는 건 구해 줄 테니깡!”
듬직하게 말을 거는 릴카. 픽,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느긋하게 결과를 기다리길 몇 분.
-띠링
[거래자의 가능성을 확인]
[해당 품목을 구해 오시오.]
[납품 기간- 30일]
짤막한 메시지 몇 개가 떠오르더니 차원 상점이 사라졌다.
음?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져가는 게 아니었나?
흔한 경우는 아닌지 카르카와 릴카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재밌군요.”
“우우.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난 납품 목록을 살폈다.
딱 하나만 적혀 있다.
[천신의 왕관 (SSS)]
-왕족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천족 집단, 하얀 나무.
-그곳의 왕에게 주어지는 왕관.
-왕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
.
.
여러 효과가 있지만 주목할 부분은 하나다.
하얀 나무의 우두머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
나의 가능성을 봤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획득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해서 이런 대가를 요구하는 거다.
턱. 릴카의 머리를 잡았다.
“릴카, 저거 구해 줄 수 있어?”
“저, 저건 좀…….”
“그럼 그렇지.”
꾸구구국. 바로 손에 힘을 줬다.
“으야얏얏얏! 저건 뭘 줘도 안 판단 말얏!”
내 이럴 줄 알았다. 쉽게 넘어갈 리가 없지.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고.
“30일 내로 가져다주지.”
“좋은 결과가 있길 바라죠, 그럼.”
손을 내젓자 카르카가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고 소용돌이 안으로 사라졌다.
남은 거라고는 납부 품목 한 장.
차라리 잘됐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물건을 찾아오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어차피 레지스탕스와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고.
“올라갈 일만 남았네.”
“이번에도 파이팅하라구!”
방에서 나와 멤버들과 합류했다.
70층에 머물 만큼 머물렀다.
연합 사람들이 뜸한 틈을 타 우리는 포탈로 이동했고.
“어디 한번 봐 볼까. 상위층은 어떤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파아아앗! 몸을 감싸는 빛.
조금은 느긋하게 전송이 끝나길 기다렸다.
* * *
[71층에 진입합니다.]
서서히 잦아드는 빛.
감았던 눈을 떴다.
[상위층은 챕터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71-79층의 테마는 멸망 중인 세계입니다.]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세계를 마주하십시오.]
허, 이번 테마는 뭔가 했더니만…….
“멸망의 과도기라.”
우리 세계랑 같은 시기의 세계를 배경을 잡고 있는 건가.
확실히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는 다른 형식이다.
긴장감을 올리며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71-73층, 하얀 나무와 하얀뿔]
[당신의 유형에 따라 진영이 정해집니다.]
“유형이라면 40층대 때 정해졌던 그건가.”
“그에에.”
40층대, 선택 구간. 49층을 클리어하고 나의 유형이 정해졌었다.
그리고 난…….
[당신의 유형은 새로운 길의 선구자입니다.]
[진영이 결정…….]
-지지지직!
-파즈즈즈즈즉!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란입니다.]
[진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유형을 가지고 있다.
오랜만에 나타난 버그 메시지.
불안하게 흔들리며 깨지는 메시지창을 보며 미간을 문질렀다.
남들과 달리 난 마음대로 진영을 고를 수 있다 이건가.
그렇다면.
“이곳으로 한다.”
난 선택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