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올라오다
하이덴과의 결투. 결투가 맞나 싶기는 하지만 어쨌든 싸우기는 싸웠으니 결투라고 하자.
뒷마무리가 영 찜찜했으나 다시 불러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도전할 때마다 랜덤으로 파편의 흔적이 등장한다고 하니 계속해서 도전하다 보면 또 만나게 될 거다.
그때는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 줘야지.
일단 시험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혼돈의 파편도 호감도가 오를 줄이야.”
“그에에.”
예상치 못한 결과에 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맞나 싶기는 하지만 일단은 좋게 넘어가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겠지.
따지고 보면 재앙들도 비슷하지 않았던가.
나한테 원한이 있는 놈도 있었고, 깡총이 같은 경우에는 쌍두귀를 잡을 때 나와 우호적인 관계가 됐다. 지금은 주종관계지만.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퇴장하시기 바랍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1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니까.
탐색전을 줄이고 서둘렀으면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모르겠다.
있어 봐야 더 할 것도 없는 관계로 방에서 나왔다.
여전히 복도 중앙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사. 꿀꺽, 침을 삼켰다.
‘봤을까?’
떡하니 옵져버가 있었는데 못 봤을 거 같지는 않다. 심지어 MAX 레벨 아니었던가.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었으니.
‘하이덴이 내 과거를 본 건 심상 세계에서였어.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않을까? 그럴 거 같은데, 분명 그럴 거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옆으로 다가갔다.
여러 화면을 분주히 살피던 아이사가 나를 반겼다.
“1등으로 끝냈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혼돈의 파편이 알아서 물러날지는 나도 몰랐지.
안 보는 척 아이사의 표정을 살폈지만 이상한 구석이 없다.
여전히 친절한 얼굴로 싱긋 웃고 있다.
다행이다. 못 본 거 같다.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와,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데. 혼돈의 파편의 인정을 받는다라… 게다가 호감도? 이런 케이스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나쁜 건 아니겠죠?”
“그건 모르겠네요. 비교 대상이 없어서.”
“등반하다 보면 알겠죠. 하하하!”
마음이 놓여서 그런가 대화가 편하다.
“바로 다음 도전할 거예요? 상처는 없어 보이는데 다른 쪽으로는 어떤지 모르니까요.”
멘탈이 살짝 아프기는 했지만 괜찮다.
하이덴은 사라졌고, 아이사는 못 본 모양이니 목격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적당히 쉬다 다시 들어가야죠. 아직 컨디션이 괜찮아서.”
“무리하지는 마요. 꼭 오늘 다 돌지 않아도 되니까. 한 번 사용한 방은 9시간은 못 쓰기도 하고요.”
무한정 이용할 수는 없는 모양. 아직 비어 있는 방이 많으니 크게 상관은 없다.
마력도 채울 겸 잠시 쉬다 다음 파편의 흔적에 도전할 생각.
자연스럽게 홀로그램으로 시선이 갔다. 다른 녀석들은 어떤 놈을 만났을까. 크게 걱정은 안 되지만 어떤 식으로 싸울지 호기심이 생긴다.
“친구분들도 무사히 끝낼 거 같네요. 다들 수준이 높아요. 이제 막 70층에 올라온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요.”
내가 잘 볼 수 있게 아이사가 몸을 옆으로 빼준다.
확실히 멤버들 실력이 좋기는 하다. 동층대 헌터들과 비교하면 더 그렇지.
물론 그 정도에 만족해서는 안 되지만. 100층이 목적이라면 상대평가는 의미 없다. 절대평가로 가야지. 정상에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 결국에는 둘 중 하나다.
4개의 화면이 떠올라 있었지만 이미 탈인간적인 스펙을 지니고 있는 만큼 동시에 봐도 문제없었다.
“보송송이가 싸우는 건 처음 보네.”
그나마 볼 기회가 있었던 68층 깡총이네에서도 난 운석이랑 노느라 타이밍을 놓쳤다.
뭐랄까, 싸우는 모습이 뭐랄까.
“터프하네. 말투는 안 그런데.”
마주칠 때부터 느꼈지만 보송송이는 탈모맨과 같은 육체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문성. 탈모맨은 출신 자체가 94 특임대다. 탑에 올라오기 전부터 인간병기였다는 것.
피지컬도 피지컬이지만 전투 기술 쪽으로도 조예가 깊다. 평소 하는 짓이 얼빵해서 가끔 잊기는 하지만 전투할 때 보면 그렇다.
반면에 보송송이는 테크닉 쪽은 평범한 편인데…….
“오우, 저걸 그냥 맞고 들어가?”
“그에에에.”
맷집이 엄청나다. 특별한 스킬이나 권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탱커로 확실히 포지션을 잡은 거 같다.
하기야 운석 파편 떨어졌을 때도 탈모맨이랑 몸으로 막았으니 할 말 없다.
냥펀이야 도망치는 와중에도 할 건 다 하고 있고. 탈모맨은…….
“왜 팔씨름을 하는 거죠?”
“어, 음. 모르겠네요. 저런 경우도 처음 봐서.”
혼돈의 파편 흔적과 팔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해하려 하지 말자. 그냥 그런 놈이다.
남은 건 핥짝인데.
“곧 끝나겠네요.”
전투가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기세를 잡고 몰아붙이는 녀석. 한번 흐름을 탄 공세는 멈출지 몰랐고 상대의 방어는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손을 털어 냈다. 오케이. 덕분에 혼돈의 파편에 어떤 놈들이 있는지는 파악했다.
“벌써 들어가게요?”
“예. 핥짝이 나오면 1등이라고 해 줘요. 전 아직 끝나려면 한참 멀었으니까.”
나야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목표가 14종의 흔적한테 이기는 거기도 하고.
그런 내가 의외였는지 아이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러면서 주먹을 쥐며 응원해 준다.
“어머, 배려심. 파이팅하세요! 제가 본 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봤구나!
얼굴을 가린 난 비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 * *
70층에 올라온 지 3주가 지났다.
예정보다 오래 머무른 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이거 맞냐? 맞냐고! 말 좀 해 봐!”
“난 하라고 안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챌린지. 14종의 혼돈의 파편 흔적을 클리어하는 걸 멤버들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계속 도전하고 있자 관심을 보인 녀석들이 자기도 해 보겠다며 달려든 것.
결과적으로 난 모두 클리어했고, 보송송이는 4번까지 하고 포기. 냥펀은 8번까지 클리어한 후에 사업이 바빠 접었다.
릴카와 제네타를 필두로 한 부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릴카를 꼬드기는 데 성공해 지금은 화조국과도 어느 정도 지분을 나눈 상태.
아무래도 릴카 혼자서 자원 수급과 홍보, 판매를 도맡아 하는 건 힘들어 가지고.
덕분에 실적이 올랐다며 냥펀이 좋아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이 챌린지를 접은 이유는 이거 때문인 거 같다.
[혼돈의 스티커 (C)]
-14종의 혼돈의 파편 흔적 클리어 시 획득 가능.
-붙이면 문양이 랜덤하게 바뀝니다!
-그게 다인데요? 뭐.
아이사가 말했었다. 전부 클리어하면 선물이 있을 거라고. 아직까지 받아 간 사람이 없다고.
뭔가 했더니 정말 기념품 같은 물건이었다.
이러니까 냥펀이 흥미를 잃지.
탈모맨이야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다 18일 차에 두 번째로 챌린지에 성공했고, 핥짝이는 승부욕 때문에 계속하고 있다.
마지막 하나를 두고 고전 중. 실패 시 혼돈 점수가 깎이는 만큼 서로의 경험을 토대로 전략을 짠 뒤 신중히 도전할 예정. 여럿이서 하니까 이건 좋네.
챌린지 하면서 스킬 레벨도 꽤 올랐다. 의도한 바는 아닌데 시험장은 스킬 레벨 올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보상으로 한계 돌파 스킬북도 얻었으나 아쉽게도 쓰지는 못했다.
[한계 돌파 스킬북 (SS)]
-80층 진입 시 익힐 수 있습니다.
-한계까지 강화된 스킬의 레벨 제한을 풀 수 있습니다.
-레벨 10으로 고정.
습득 제한이 붙어 가지고. 당장은 가지고만 있어야 한다.
여관 식당 의자에 앉아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릴카와 냥펀을 바라봤다.
나도 엮인 문제라 마무리돼야 위로 올라갈 거 같은데.
‘대략 일주일이면 위로 갈 수 있겠군.’
대략 예상하는 시간은 그 정도다. 더 빠를 수도 있고.
핥짝이도 그 안에는 챌린지를 마칠 거다.
나도 릴카한테 장비 제작을 배우는 등 할 게 많다.
그중에서도 신경 써서 하고 있는 게 이거지.
“스킬 합성.”
스킬북도 많이 쌓였다. 쿨 타임도 지났고.
주력으로 사용하는 스킬들은 챌린지를 하며 대부분 10레벨을 찍었다.
80층에 오르기 전까지는 강화할 방법이 없는 만큼 새로운 스킬을 얻을 요량이었고 그 결과.
“잡다하다, 잡다해.”
꽤 많은 양의 스킬북을 얻을 수 있었다.
대략 30개 정도 만든 거 같은데 성과가 영.
“생활 스킬은 상점에도 파는 거고. 이건 이벤트용. 등급이 낮은 것도 그렇고.”
대부분은 꽝이다.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은 것도 제법 있는데 상점에서 팔거나 스킬 박스로 얻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눈이 높아진 탓도 있다만 그보다는 보유 중인 스킬들과 겹치는 게 많다.
파이어 밤이 있는데 굳이 파이어 스트라이크를 익힐 필요는 없으니까. 일렉트릭 쇼크가 있는데 스파크 스킬을 익힐 필요가 없는 것처럼.
시작 등급은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S급까지 올리면 비슷비슷하다.
그렇다고 성과가 아예 없느냐? 그건 아니다.
“두 개라도 건진 게 어디냐.”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스 월 (C) Lv.1]
-땅을 일으켜 벽을 세웁니다.
어스 월. 말 그대로 벽을 만드는 스킬인데 은근 범용성이 좋다.
방어용으로도 쓸 수 있고 간단하게 건축물 만들 때도 좋고.
상황에 따라서는 상대방의 시야를 가릴 때 사용할 수도 있다.
등급이 낮긴 하다. 그럼에도 이걸 고른 이유는…….
“은근히 구하기 힘들단 말이야.”
흔하게 굴러다닐 거 같은데 의외로 없다. 상점에서 팔지도 않는다.
운이 나쁜 건지 그동안 모은 스킬북 중에도 없었고.
나름 만족한다. 어차피 메인은 다음 거니까.
[데몬 스피어 (S) Lv.1]
-대악마의 창을 소환해 찌릅니다.
-마기가 강할수록 강력해집니다.
67층, 바다 삼 형제 중 곤이 사용하던 스킬이 있다.
해왕의 창이라고 무려 SSS등급의 스킬이었는데 레비아탄을 뚫어 버리는 걸 보고 감명받았다.
등급은 그보다 못하지만 메리트가 있었으니.
“어둠 속성 스킬이라고.”
내가 가지고 있는 펠라인 세트는 파츠마다 속성이 존재하며 그에 따른 보정치를 부여한다.
불 속성인 펠라인의 빨간 머리통을 쓰고 있으면 파이어 밤의 대미지가 올라가는 것처럼.
펠라인의 보라색 왼팔. 이게 어둠 속성인데 지금까지 어둠 속성 스킬이 없어서 사실상 별다른 버프를 못 받고 있었다.
그동안 빛 속성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신성력만 썼는데 이제는 선택지가 넓어졌다.
이것도 위로 올라가기 전에 시험장에서 레벨을 높여 둘 생각.
-후두둑
쌓인 스킬북을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팔 건 팔고 애매한 건 일단 놔둘 생각.
당장 할 건 끝났고.
“으읏차. 바로 가 볼까.”
“그에에.”
난 여관을 나섰다. 방에 박혀 있어 봤자 나아지는 건 없으니까.
바로 가서 사용해 볼 생각이다.
냥펀은 릴카랑 사업 준비 중이고, 핥짝이는 탈모맨과 보송송이와 함께 파편 흔적을 상대할 작전을 짜고 있다. 제네타야 영혼석을 만드는 중.
혼자 갔다 오는 편이 낫겠지.
“시험장 가나?”
“예. 몸 좀 풀려고요.”
“하하! 건강 챙기면서 해. 그러다 훅 간다.”
오래 봐서 그런가, NPC 몇 명이 말을 걸어왔다.
적당히 인사를 나누며 광장을 지나는 타이밍.
-우우우우웅!
“어?”
새로운 등반가들이 70층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