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하이덴
연달아 날아오는 광휘의 검. 여덟 개의 빛줄기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사각지대는 없다. 그때마다 놈이 따라붙었고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공격이 이어졌으니까.
숨 쉴 틈도 없이 가파른 속도전.
일방적으로 밀리는 느낌도 들었으나.
‘확실히 진짜 혼돈의 파편과는 다르군.’
다운그레이드를 여러 번 한 느낌이랄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는 안다. 혼돈의 파편이 얼마나 위험하고 강력한지.
프램버그에서 만났던 델버튼은 독가스 한번 뿌리는 것으로 내 목숨을 앗아갔다.
그에 비해 이놈은…….
【돌아가, 지 못할까!】
힘들기는 해도 공격을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칼질이라도 멈추고 말해라, 나쁜 놈아!”
-카아아앙!
놈의 검을 쳐 냈다. 누가 위선 아니랄까 봐 물러설 틈을 안 주면서 물러서라고 그러냐.
하여간 혼돈의 파편은 죄다 나쁜 놈들이다. 말이랑 행동이랑 따로 놀아.
【튕겨, 내?】
자신의 검이 막힐 줄 몰랐는지 놈이 움찔한다.
그럼 두들겨 맞기만 할 줄 알았나.
놈이 열화판인 것도 있고, 내가 강해진 것도 있지만 다른 조건도 놈과 싸우기 좋게 구성되어 있다.
먼저 이거.
[빛 내성 (AA) Lv.7]
61층에서 얻었던 스킬. 빛 내성.
하이덴은 빛을 다룬다. 혼돈의 파편이라고 모두 시커멓지는 않은 모양.
어느 정도 데미지를 경감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고.
“나도 검은 좀 쓰거든.”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알리오스에게 계승받은 권능 덕에 검으로 하는 건 자신 있다.
변화무쌍하게 들어오는 여덟 개의 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어지러운 광경이었으나 내 검은 정확히 타격점을 노렸으며.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빛납니다!]
-츠즈즈즈즉
[빛의 검]
-하이덴이 만든 빛의 검.
-네, 그냥 빛입니다. 반짝반짝!
[광휘의 검]
-하이덴이 만든 광휘의 검.
-이건 진짜 검이네요. 서걱서걱!
중간중간 들어오는 허초는 다른 권능을 통해 걸러 냈다.
똑같이 빛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뭐가 진짜인지 육안으로는 분간할 수 없다.
나처럼 분명한 정보를 읽을 수 없다면 예민한 감각과 경험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아니면 대응을 빠르게 하든가.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방법이다. 처음 겪는 사람들은 고생 꽤 하겠는데.
-파하아아아앗!
“크윽!”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느낀 걸까. 녀석이 강렬한 빛을 뿜었다.
8개의 구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은 한순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했고.
【흙으로, 돌아가, 라!】
이 비겁한 자식은 그때를 노렸다.
돌아가라는 뜻이 흙으로 돌아가라는 거였냐!
으득. 이를 악물며 오감에 집중했다.
어디로 공격이 올까. 왼쪽? 오른쪽? 그야 당연히…….
“사방에서 오겠지!”
정직하게 한쪽으로만 공격할 리가 있나.
-콰아아아앙!
-콰과과과광!
연달아 바닥을 두들기는 폭발음.
놈의 공격이 연달아 들어왔다는 걸 뜻했고.
[안개화를 종료합니다.]
-촤악
방향을 알 수 없던 난 안개 질주로 자리를 피했다.
빛이고 나발이고 무적기는 못 뚫지.
그나저나 곤란하네. 이번에는 피했지만 다음 것도 피하리란 보장이 없다.
눈뽕 공격이 효과가 있다는 걸 파악한 이상 놈은 집요하게 시도를 할 테니까.
천리안이나 심안 스킬이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난 없다. 그렇다면…….
-파밧!
놈을 향해 돌진했다.
부끄럼쟁이가 시선을 피하며 외친다.
【오지, 마라!】
-파아아아아앗!
역시나, 바로 빛을 내뿜는다. 이어서 검이 날아오겠지.
그래서 생각한 건데.
“눈에는 눈, 눈뽕에는 눈뽕!”
나도 같은 전략을 쓰는 건 어떨까.
[파이어 밤 (S) Lv.10]
[러브 앤 피스 (S) Lv.10]
-파하아아아앗!
-콰아아아앙!
신성력을 머금은 파이어 밤을 면전에서 터트렸다.
하얗게 타오르는 불길. S급 만렙을 찍은 만큼 범위는 거대했다.
동시에 폭발의 반발력으로 자리를 벗어났으니.
-콰직!
-카가가가강!
나를 노리고 들어왔던 광휘의 검이 애꿎은 바닥만 헤집었다.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바로 따라 배우는 이 영특함! 난 씨익 웃으며 착지했고.
【부끄러운 줄 알아라, 비겁한 자여!】
분노한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아니,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보다 너 말 잘한다? 더듬는 거 아니었어?”
【닥, 쳐라!】
이런 선택적 말더듬이 같으니라고. 어이가 없네.
화나면 말을 잘하는 스타일인 건가.
-후웅
검을 돌리며 흘낏 홀로그램을 살폈다.
[승리까지 남은 시간- 21:43]
벌써 40분 가까이 싸운 건가. 21분만 더 버티면 이긴다.
승리 조건에는 1시간 동안 버티는 것도 존재하니까. 쉽게 가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만…….
고개를 돌려 천장 구석, 반투명한 물체를 바라봤다.
[옵져버 (S) Lv.MAX]
복도에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아이사.
그녀에게 당당히 말하지 않았던가. 여기 있는 14개의 파편 흔적을 상대로 이겨 보겠다고.
단순히 시간 끌기로는 만족할 수 없다. 이 정도도 못 해서는 진짜 파편을 상대로는 까불지도 못할 테니까.
눈뽕 작전은 지나간 상황. 탐색전도 할 만큼 했다.
이제는 육탄전으로 간다.
놈도 같은 생각인지 정공법으로 들어왔고.
-카아아아앙!
-촤아아아악!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검을 휘둘렀다.
안으로 파고들며 올려 베기. 내가 생각해도 예리한 공격이었으며.
-주륵
놈의 몸에 첫 번째 상처가 생겨났다.
놀란 눈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녀석.
【어째, 서?】
“뭐가 어째서야. 베일만 하니까 베이는 거지.”
혼돈의 파편을 상대할 때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무엇인가.
그 자체적으로 사기적인 능력을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혼돈 수치가 100을 넘어섰습니다!]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지 않으면 놈들에게 제대로 된 상처조차 남길 수 없다.
100점도 말 그대로 최소한의 수치에 지나지 않고. 난 이미 100점을 뛰어넘은 상황이다.
게다가 여기 있는 건 열화판. 놈의 혼돈 수치는 그리 높지 않을 거다.
혼돈검이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 데미지가 더 들어간 걸 수도 있지만 체감상 느끼기로는…….
“70점 간신히 될까 말까 할 거 같은데. 더 아래거나.”
놈에게 무리 없이 상처를 입혔다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이게 참 억울한 게. 등반가는 혼돈 수치가 암만 높아도 놈들 같은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
그랬으면 이미 난 무적이었지. 놈들처럼 100점 넘겼다고 딜이 안 박혔으면.
아쉽지만 난 혼돈의 파편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싸우는 수밖에.
-콰아아앙!
-콰과과광!
연달아 폭발을 일으켰다.
놈의 검은 강력하다. 날카롭고 빨랐으며 절삭력도 좋다. 혼돈검이 아니었다면 검 자체가 잘려 나갔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약점이 없느냐…….
‘범위 공격에 약해.’
광휘의 검을 넓게 펼쳐 방패로 사용하고 있었으나 공간이 있다.
빈틈 사이로 폭발의 여파가 들어가 데미지를 계속해서 주고 있고.
태생이 괴물인지라 화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구겨지는 얼굴을 보자니 확실히 영향은 주고 있다.
남은 건 확실한 한 방.
“가자.”
“궥!”
덕춘이와 함께 달렸다. 굳이 나 혼자 싸울 필요 있나. 내게는 덕춘이가 있는데.
-촤아아악!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수평 베기.
슬라이딩으로 공격을 피하고 놈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녀석이 방패를 거두고 광휘의 검을 연거푸 내질렀다.
안개 질주를 쓸 생각은 없다. 여러 번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워서. 그렇다고 구사일생을 이런 데다 소모할 수도 없으니.
“크하아아압!”
[독자무강獨者武强 (S) Lv.8]
[강철의 의지 (S) Lv.8]
[강체强體 (S) Lv.9]
[물리 공격 내성 (S) Lv.8]
[빛 내성 (AA) Lv.7]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건 때우고.
-콰자자차앙!
검으로 쳐 낼 수 있는 건 쳐 낸다.
그사이에 덕춘이가 진입.
“그엑!”
【이, 무슨!】
놈의 얼굴에 달라붙은 덕춘이가 혓바닥을 놀린다.
회복? 그럴 리가.
[특성, 산성 (S)]
[특성, 독 (S)]
강력한 독성 침으로 범벅.
이어 덕춘이가 팔을 쭉 뻗었으니.
[고유 능력, 뺨치기 (S)]
[괴력 (S)]
-짜아아아악!
휙, 놈의 고개가 돌아갔다.
파편의 흔적이라 했던가. 킹갓개구리 덕춘 님은 무려 카오스 속성 영물이다. 급으로 따지자면 놈보다도 높다는 것.
그만큼 데미지가 제대로 박히는 건 분명했으며.
[영혼 찢기 (S) Lv.7]
[절삭 (S) Lv.7]
-촤아아아악!
한순간 놈이 멈춘 틈을 타 검을 내질렀다.
정확히 목을 노리고 들어간 일격. 감각이 확실하게 느껴졌고.
【이, 놈!】
치명상을 입은 녀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팔다리를 묶고 있던 구속이 풀린다.
구속복처럼 감싸져 있던 빛의 막이 사라진다.
일렁이는 공간.
[잊고 싶은 과거의 방에 진입합니다.]
[하이덴은 당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엿볼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은 자 누가 있을 것인가!]
하얗게 빛나는 눈이 나를 관통했으니, 순식간에 세상이 변하며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날아올랐다.
남의 과거를 들추다니. 신사답지 못 한 행동이었으나 놈은 개의치 않았다.
육체적으로 어쩔 수 없다면 정신 공격을 하겠다는 심산. 놈에게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과연 위선과 부끄러움으로 이루어진 파편이다.
정신만이 존재하는 공간. 몸은 움직일 수 없었으나 눈동자는 빠르게 돌아갔다.
학생 시절이 지나고 회사원, 짐꾼 때의 일이 지나 탑에 불려온 이후의 모습이 펼쳐졌다.
-등록한다. 닉네임은…….
-공듀! 밥 한 끼 할까?
-안전지대 광장에 공듀 님의 동상을!
-쁘띠! 사랑! 평화!
-공듀 님! 팬 미팅……!
-하하하하! 프램버그 중앙에 자네의 모습으로 조각상을 세웠지!
놈의 눈이 점점 커진다.
【오, 오오… 이 무슨.】
[하이덴이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순간 울컥했다.
왜 네가 부끄러워하냐? 어? 이거 은근 빡치네.
뭐라 소리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놈은 계속해서 나의 과거를 읽어 내려갔다.
대놓고 집중하며 감상한 지 10분 정도 되었을까.
-또르르
녀석이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잊고 싶은 과거의 방이 종료됩니다.]
[하이덴이 당신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심상 세계가 사라지며 신체 컨트롤을 되찾았으나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눈가가 촉촉해진 녀석이 측은한 눈으로 날 내려다본다.
뭘 봐, 뭘 보냐고.
까득.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무는 타이밍.
【너의 승리다.】
“뭐?”
고개를 떨군 녀석의 몸이 희미해졌다.
신기루처럼 사라지지는 모습.
“야! 누구 마음대로 이렇게 끝내!”
뒤늦게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놈의 육체는 흩어지는 중이었고.
【…파이팅!】
응원을 마지막으로 하이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 내 위로 떠 오르는 메시지.
[하이덴에게 승리했습니다!]
[혼돈의 파편, 하이덴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전 서버 최초! 혼돈의 파편에게 동정, 인정, 응원을 받았습니다!]
[혼돈 +10점]
[하이덴이 당신의 등반을 응원합니다!]
“야이, 씨.”
[정신 보호 (SSS) Lv.2]
[스킬 레벨 업!]
[정신 보호 (SSS) Lv.3]
난 뒷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