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34화 (334/740)

334화 옥토 선생

68층에 올라온 난 이마를 긁적였다.

월광의 옥토 선생.

대충 의미만 따지자면 ‘달빛의 달토끼’라는 뜻이었으며, 나와는 약간이지만 인연이 있는 재앙이었다.

“정체가 뭐지. 이번 녀석도 영물 같은 건가?”

지금까지 겪어 온 바로는 그럴 거 같은데 실상은 어떨지 모르겠다.

[옥토 선생이 당신을 위해 준비한 게 있다고 합니다.]

[옥토 선생이 자신은 복슬복슬한 걸 좋아한다고 전합니다.]

[옥토 선생이 68층에서 심심했다며 버둥거립니다.]

다른 놈들과 달리 이 녀석은 말이 많아서…….

달칸이나 메스토카도 메시지를 전하기는 했지만 이러지는 않았다.

그거야 겪어 보면 알 거 테니 그렇다 치자.

일단은 내게 호의적인 것도 같고.

재앙의 호감이라, 이게 좋은 걸까? 비교 대상이 없으니 판단하기가 힘드네.

나랑 인연이 있던 놈들은 하나같이 악연이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멀뚱히 서 있는다고 해결될 건 없으니까.

“필드가 특이하네.”

“그에에.”

탑의 필드는 종류가 다양했지만 자연경관이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몇몇 황폐한 곳도 있었으나 그곳들은 멸망한 세계의 흔적이었던 적이 대부분.

반면에 68층의 필드는…….

“뭐가 없다. 그치?”

무채색의 공간이었다.

정말 아무런 색이 없다기보다는 회색빛 암석과 흙먼지만 가득하다고 해야 하나.

군데군데 시커멓게 타들어 간 흔적도 보였다.

간혹 보이는 나무도 바짝 마르고 타 버려 크고 검은 이쑤시개 꼴.

하늘 역시 뿌옇다. 구름? 그러기에는 좀 탁하다. 공기에 먼지도 많이 섞여 있고.

“몬스터는 없어서 좋다만…….”

뭘까, 이 위화감은.

이곳에도 NPC가 있을까.

잡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기던 중 하늘에서 익숙한 존재가 내게 날아왔다.

독수리처럼 허공을 한 바퀴 돌고 내려앉은 녀석.

“안녕하세요, 고객님! 갈매기에서 나온 갈매기입니다!”

“그래, 반갑다. 뿔은 다 전해 줬냐?”

“그럼요! 신속 정확 서비스! 고객님, ‘이 사원을 칭찬합니다’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칭찬 좀.”

뻔뻔하게 내게 종이를 내미는 녀석.

그래. 세상 사는 게 다 힘들지. 볼펜을 받아 칭찬 목록에 대충 끄적여 줬다. 갈매기는 끼룩끼룩. 이 정도면 되겠지 뭐.

뭐라 적었는지도 모르고 방긋 웃으며 서류를 챙긴다.

이 녀석이 왜 왔을까.

“헤헤. 감사합니다! 여기, 저번에 말씀드렸던 신규 고객 이벤트 상품입니다!”

어디서 꺼냈는지 갈매기가 그려진 에코백을 건네준다.

[갈매기 에코백 (A)]

-갈매기의 신규 고객에게 주는 상품!

-아공간 아이템입니다.

-갈매기가 좋아하는 과자가 들어 있습니다.

사은품 주제에 아공간 아이템? 의외로 좋다.

안을 뒤적거리니 새우 맛 과자가 들어 있었고.

“꿀꺽.”

갈매기의 눈이 과자에 고정됐다.

야야, 고객의 과자를 탐하는 배달부가 어디 있냐.

과자 하나로 인색하게 굴기도 뭐해 봉투를 뜯어 녀석에게 던져 주자 냉큼 받아먹는다.

누가 훔칠세라 바로 입에 넣는 것이 먹성 좋은 덕춘이도 뺏어 먹을 생각을 안 할 정도다.

[갈매기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이런 쉬운 녀석 같으니. 뭐든 호감도가 오르면 좋지.

적당히 과자를 나눠 먹은 후.

“여기, 하얀뿔에서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본론이 이거였군.”

“그럼요! 저는 가 보겠습니다. 언제든 불러 주세요!”

편지를 건넨 갈매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건 과자 얻어먹어서 해 주는 말인데, 고객님은 지금 털이 너무 적어요. 여기선 위험하답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녀석.

털이 적다? 머리카락은 있는데.

슬쩍 덕춘이를 바라봤다. 얘는 털이 진짜 없긴 하지. 탈…….

“그에에.”

“아무 생각도 안 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편지를 살폈다.

시작은 감사의 인사. 내 덕분에 뿔을 되찾은 이들을 대표해 고맙다는 말을 해 왔다.

본부에 오게 된다면 그에 걸맞은 대우와 보상을 약속하기까지.

다음 내용은…….

“지부 수습?”

눈을 가늘게 떴다. 68층에도 하얀뿔의 지부가 있었다. 다만 과거형,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고 다르게 말하면…….

‘이곳에 있던 하얀뿔 소속 NPC가 전멸했다는 거야.’

한 명만 남아도 지부는 유지된다. 62층의 쉐핀이 그러했으니.

하얀 나무에서 공격한 걸까 의심도 해 봤지만 내용은 달랐다.

그곳의 교단도 괴멸 직전이라고, 사실상 68층은 두 세력이 활동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하얀뿔이 원하는 건 지부가 있던 자리에 있을 물건들을 회수해 주는 것.

에코백과 편지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옥토 선생이 당신과의 티타임을 기다립니다.]

[옥토 선생이 깃털도 털이라며 허공을 응시합니다.]

여전히 떠오르는 옥토 선생의 메시지.

가만히 숨을 삼키었다. 지부가 무너진 이유. 어떻게 생각해 봐도 이 녀석이 원인이다.

* * *

하얀뿔 지부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변이 워낙 허허벌판이라 건축물의 흔적은 눈에 띄어서.

벙커 비슷한 건물이었는데 기존에 본 지부와 달리 제법 구색을 갖추었다.

지금은 무너져서 별 볼 일 없기는 하지만 두꺼운 철문과 방호용 무기 등을 보니 요새 수준의 방비를 만들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고전적이지만 위험한 함정도 여럿 보이고. 물론 망가져 쓸모는 없었다.

벙커 내부에서 찾아낸 물건은 2개.

지도 조각과 천사의 깃털로 만들어진 관.

[하얀 나무 지도]

-천족 집단, 하얀 나무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 조각.

-암호로 정보가 적혀 있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의 깃털 관 (S)]

-귀족과 영웅에게 주어지는 관.

-자신이 지배하게 될 이들의 깃털로 이루어졌습니다.

-대상에 대한 지배력 향상.

수습해 달라고 편지를 보낸 이유가 있었다.

두 물건 모두 하얀뿔 입장에서는 잃을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만약 하얀 나무 측 교단도 괴멸당하지 않았다면 진작 챙겼을 거다.

안전하게 인벤토리에 넣고 밖으로 향했다.

남은 건 재앙을 극복하는 것뿐.

같이 올라온 멤버들은 어디에 있으려나.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끼이이익

반쯤 무너진 문을 열고 벙커를 벗어나는 시점.

“너무 안 와서 내가 왔도다!”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수인으로 보이는 존재. 사람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운 느낌.

하얀 털과 길쭉하게 솟은 귀, 붉은 눈을 가진 녀석은 내 명치 정도에 오는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으나.

-사아아아아

놈에게 느껴지는 기운은 결코 작지 않았다.

천진난만함 속에 숨겨진 난폭함.

“68층의 재앙, 옥토 선생 등장!”

빠밤!

자체 효과음을 내며 포즈를 취하는 녀석.

이 녀석, 말을 해?

육성으로 말을 거는 재앙은 지금까지 없었다.

영물보다는 수인에 가까운 생김새기도 하고.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고민이 들었으나.

“이블아이다.”

“쌍두귀를 꺾은 이가 누군가 했는데 과연 그러하구나. 심상치 않아. 이 무슨 모습이란 말인가.”

다행히 다짜고짜 공격해 오지는 않는다.

내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게 거짓은 아닌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주위를 빙글 돌며 감탄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혼돈의 영물까지. 반갑구나, 옥토 선생이다.”

“그에에.”

급으로 보면 덕춘이 역시 밀리지 않는다. 그만한 대우를 해 주려는 것인지 정중한 모습으로 덕춘이와 악수를 한 녀석이 물끄러미 날 올려다본다.

“헌데 그대는 털이 별로 없군?”

“필요해?”

“털이 없는 것들은 징그럽거든. 아, 물론 그쪽 개구리 선생은 예외야. 영물은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지. 그대도 마찬가지!”

옥토 선생의 입이 쭉 찢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간다.

토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송곳니가 빼곡하다.

붉게 번들거리는 눈동자에서 엿보이는 광기.

“자네만큼은 예외야. 큭큭! 멍청한 쌍두귀 녀석, 나한테 진 것도 모자라 인간에게도 지는구나!”

뭐가 그리 좋은지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린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으나 좋은 일은 아니었던 거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옥토 선생의 허리에는 절굿공이가 있었는데…….

[옥토 선생의 절굿공이 (SSS)]

-쌍두귀와의 내기에 승리해 얻은 등뼈로 만들었습니다.

-절굿공이를 찍기 전에 도망치세요!

쌍두귀의 등뼈를 뽑아 만든 물건이었다.

등급도 SSS급, 영물 뼈로 만든 건데 그럴 수 있지.

“자, 가자! 그대와 할 말이 많다!”

“어, 어어? 어디로 가는데!”

“티타임을 즐기러 가지.”

-짝짝!

나를 잡아끌던 녀석이 손뼉을 친다.

그와 함께 등장하는 이들. 가마를 어깨에 얹은 이들이 옥토 선생이 올라탈 수 있게 한쪽 무릎을 꿇는다.

익숙한 얼굴이다. 이마에 자란 뿔. 제2 천계의 천사다.

하얀 나무의 교단도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는 건 편지로 알고 있었다.

남은 생존자들은 뭘 하고 있나 했더니만 잡혀 있던 건가.

옷차림이 괴상하다. 날씨가 춥지도 않건만 온몸에 털이 달린 옷을 걸쳤다.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는데…….

“어?”

“음?”

가마꾼 중 한 명이 구면이다.

혼자 웃통을 벗고 있는 녀석.

“보송송이!”

“어이구, 이게 누구야. 이블아이로군요! 하하하!”

67층 위로 올라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여기에 있을 줄은 몰랐다.

가마에 올라타다 말고 멈춘 날 본 옥토 선생이 귀를 쫑긋거린다.

“오호라, 복실이와 아는 사이였나? 내가 어여삐 여기는 아이지. 뿔쟁이 하나, 둘, 셋, A포지션으로.”

딱악.

옥토 선생이 손가락을 튕기자 얼굴을 구긴 천족들이 자리를 바꾼다.

보송송이는 옆으로 빠지고 남은 셋이서 가마를 들었고, 뒤에서 홀로 바치고 있는 천족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가마가 꽤 무거운 모양.

“가자꾸나. 복실이는 옆에서 손님을 보좌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제 좀 살겠는지 어깨를 돌린 보송송이가 옆에 따라붙는다.

커다란 부채를 꺼내 부쳐 주기까지.

‘어떻게 된 거예요?’

입 모양으로 상황을 묻자 보송송이가 작게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다.

바로 옆에 옥토 선생이 있는 만큼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거겠지.

지금은 가만히 있자. 뭐가 됐든 옥토 선생은 재앙. 일대일로 겨루어 어쩔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보송송이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없고.

가마가 끝없이 오르막길을 오른다.

이제야 느끼는 건데 내가 돌아다닌 곳은 거대한 크리에이터였다.

규모가 엄청나 파악하지 못했을 뿐. 위로 올라오고 나서야 모양이 보인다.

운석이라도 맞은 걸까. 크리에이터 너머는 초목이 자라고 있었다.

“그대는 위로 향하고 있는가?”

옥토 선생이 침묵을 깨고 질문을 던졌다.

위로 향하냐니.

“당연한 소릴.”

“어디까지 오르려 하느냐.”

“100층. 다른 선택지는 없어.”

“100층? 아하하하! 좋구나! 높이 올라야지. 암, 높은 곳에서 내려다봐야지!”

웃음을 터트린 녀석이 내 어깨를 두드린다.

그것도 잠시…….

“그럼 그대는 나를 지나야겠구나.”

표정을 굳힌 옥토 선생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피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이곳을 지나쳐야 한다.

상위층에 오른 이가 있다는 건 68층을 지났다는 말. 나라고 못 할 건 없으니까.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내기 하나 할까? 그럼 내 친히 나를 피할 방법을 알려 주겠노라.”

옆에 바짝 붙은 녀석이 귓가에 내기 내용을 속삭였다.

은밀하지만 분명하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나중에 후회하지 마.”

“훌륭한 자신감이로다.”

난 진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번 내기,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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