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33화 (333/740)

333화 68층

모두의 시선이 트윈에게 쏠렸다.

발자칸의 새로운 지배자 자리에 오른 인물.

방금까지 함께 레비아탄을 상대했던 인물.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건 당연했으며, 트윈의 모습으로 변장한 제르바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것도 잠시.

“괴상한 수작을 벌이는구나, 이블아이. 가짜 트윈을 만들어 이 상황을 모면해 보겠다는 건가!”

-콰아악!

태연한 표정을 지은 녀석이 검을 치켜들더니 그대로 내리꽂았다.

단번에 자신을 진짜 트윈으로 몰아가는 판단.

한쪽을 없애 분란을 막겠다는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으나.

-까아아아앙!

놈의 검은 내게 막혔다.

팔이 욱신거린다. 이 녀석,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으면서 검에 스킬로 도배를 해 놨네.

설마 막힐 줄은 몰랐는지 놈의 얼굴이 구겨졌으며, 진짜 트윈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낚시 삼 형제가 뛰쳐나와 둘 사이를 갈랐다.

“어이, 잠깐. 다짜고짜 그러면 안 되지.”

“누가 진짜인지는 우리가 판단해.”

“바로 죽이려 한 걸 보니 쫄리는 게 있나 본데?”

삼 형제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대치하던 모습이 바뀌었다. 푸그리드 해적단을 압박하던 이들이 한발 물러선 것.

평소 하는 짓만 보면 멍청한 해적이었지만 이들 또한 NPC다.

상위층까지 탑을 올랐다는 뜻이었으며,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파악할 눈치 정도는 있었다.

내 옆으로 푸그리드가 선다.

“이블아이, 탑 숭배자라고 했지?”

“어. 이 녀석 실버 등급이야. 조심해야 해.”

정체뿐만 아이라 등급까지 내 입에서 나오자 놈의 입가가 꿈틀거린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만…….

‘지금은 놈을 처리하는 데 집중해야지.’

내가 턱짓하자 바다낚시 삼 형제가 진짜 트윈을 풀어 줬다.

구타를 당해 멍이 몸을 뒤덮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니다.

“빌어먹을!”

욕설과 함께 재갈을 뱉어 낸 녀석이 눈알을 굴린다.

살벌한 표정의 해적들이 그를 내려다본다.

트윈은 원래 그리 대단치 않은 해적이라고 했던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에는 그보다 선배거나 서열이 높았던 해적도 다수 섞여 있을 것이다.

“헛!”

그래서인지 단번에 주눅이 든 녀석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지만 그것도 잠시.

등 뒤에 서 있던 푸그리드에 막혔다.

손에 쥔 단검을 손바닥에 두들긴 그가 사납게 웃는다.

서로 좋은 감정이 있을 리가 있나. 뭐가 됐든 감옥에 처넣고 처형을 주도한 게 트윈인데.

“어느 쪽이 진짜 트윈인지 내가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자, 잠깐! 내가 진짜다. 내 진짜아아악!”

-빠아아악!

단검을 갖다 버린 푸그리드가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스킬 따위는 쓰지 않는 거칠고 무자비한 폭력.

“휘이이익! 그래, 일단 패 봐야지!”

“트윈도 생각해 보면 별 볼 일 없었잖아? 저게 맞지.”

“레비아탄 일대일 할 수준은 아니었단 말이야. 푸그리드! 더 때려 봐!”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 역시 휘파람을 불며 동조한다.

레비아탄을 상대로 활약하던 모습과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는 모습은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이이익! 크학!”

트윈 역시 발악했지만 그뿐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푸그리드는 발자칸의 최강자 중 한 명.

해적들을 지휘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나 개인의 무력 역시 보통이 아니었고.

-뻐어어억!

시원한 어퍼컷에 트윈이 대자로 뻗었다.

가뜩이나 엉망이었던 몰골이 더 뭉개진 건 덤.

스트레스가 풀렸는지 잇몸이 드러나게 웃은 푸그리드가 제르바를 노려봤다.

“이쪽은 내가 아는 트윈이 맞는 거 같은데 넌 뭐 하는 놈이지?”

우리를 포위하던 해적들도 제르바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주먹과 욕설, 거짓말과 허세가 난무하는 것이 해적의 세계지만 이번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발자칸의 지배자 자리가 엮여 있는 동시에 푸그리드를 해치우려 했으니까.

외부 세력이 수작을 벌여 발자칸을 집어삼키려 했다는 의미였으며, 해적은 자신의 영역에 민감했다.

“하! 하아, 이 덜떨어진 새끼.”

관자놀이를 누른 녀석이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스스로가 가짜임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 놈들이 순순히 인정할 리가 없잖아.’

수틀리면 칼질 먼저 하는 놈들이 탑 숭배자다.

특히나 정체가 밝혀지는 상황이 오면…….

“이래서 나서기 싫다니까!”

-콰화아아악!

“으아아악!”

“저 새끼 잡아!”

“넌 진짜 죽었다!”

같은 NPC라도 거리낌이 없이 공격했다.

빠르게 옆에 있던 NPC를 베어 넘긴 녀석이 기세를 끌어올린다.

[SS급 권능, 천의 얼굴이 발휘됩니다!]

[대상의 능력 일부를 흉내 냅니다!]

놈의 모습이 바뀐다.

바다낚시 좋아 사람들의 모습으로, 해적들의 모습으로, 푸그리드의 모습으로.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해왕의 창- 레플리카 (SS)]

-콰아아아앙!

상대방의 능력까지 사용했다.

해왕의 창은 바다낚시 삼 형제, 곤이 사용한 스킬.

[유령 대포-레플리카 (S)]

-콰과과광!

지금 사용한 폭격은 푸그리드의 스킬이다.

등급과 위력은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위협적이었으며…….

“어디로 숨었어!”

“야, 너지? 너, 방금까지 어디 있었어!”

“쥐? 왜 여기 쥐새끼가 있냐!”

난전을 유도한 뒤 사람들 사이에 뒤섞이기까지.

겉으로 분간하는 건 불가능할 정도의 완벽한 위장. 아니, 변신.

심지어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도 변할 수 있었다.

“비켜!”

난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는 놈들을 밀쳐 내며 앞으로 달렸다.

녀석이 노리는 게 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아직 원래 얼굴이 들통나지 않았으니 내빼려는 거겠지. 내가 저놈이 제르바가 범인이라고 외쳐 봐야 실질적인 증거가 없으니까.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하나.

“물고기로 모습을 바꿀 거야.”

아무리 해적이 바다를 제집처럼 오간다고는 하지만 진짜 물고기처럼은 못 한다.

지금 놓치면 못 잡는다. 최악의 경우 발자칸을 벗어나 다른 해상 군도로 들어갈 수도 있다.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으니 잠입하는 건 문제도 아니겠지.

혹여나 놈의 위치를 알아내도 다른 해상 군도를 뒤지겠다는 건 군도간의 전면전을 치르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 사실상 불가능하다.

“어디냐, 어디!”

“그에엑!”

빠르게 주변을 살필 때, 덕춘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번뜩입니다!]

권능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 그 안에서 정답을 찾아냈다.

서로 뒤엉킨 해적들 사이로 지나가는 물뱀 한 마리.

[제르바- NPC]

-앙증맞고 멋진 뿔!

-용각물뱀으로 변신했습니다!

-변신할 수 있는 최소 사이즈입니다.

놈의 변신도 만능은 아닌 모양.

변신 가능한 사이즈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 상황에서 물뱀까지 신경 쓸 사람은 없다.

푸그리드가 진정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냥펀! 바다낚시 삼 형제!”

난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불렀고.

“저 뱀 잡아아아아!”

[SS급 권능, 천의 얼굴이 빛납니다!]

[엘릭피쉬로 변신!]

-푸더덕!

물고기로 변해 바다로 뛰어드는 놈을 향해 몸을 던졌다.

팔을 뻗었지만 짧다. 몇 미터는 더 가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

“가라! 덕춘몬!”

“그엑! 그엑!”

슬라이딩하는 추진력을 더해 덕춘이를 앞으로 던졌다.

물 만난 물고기라고 했던가? 내게는 물 만난 개구리가 있다.

거의 동시에 녀석과 덕춘이가 바다에 들어갔다.

“공블아이, 어디야!”

“찾았어?”

“바다! 덕춘이가 쫓아갔어!”

내 손짓에 냥펀과 바다낚시 삼 형제 역시 바다로 뛰어든다.

[환상의 보물선 (SS)]

나와 냥펀은 보물선을 탔으며 에게르와 루건은 도플라밍고 튜브를, 곤은 직접 바다로 뛰어들었다.

“봉인 해제!”

허공을 집어 던진 구명조끼.

“오오.”

그 모습을 본 루건과 에게르가 감탄했고.

-파아아아앙!

녀석이 오리발을 차는 것과 함께 파공성이 들렸다.

한순간에 사라지는 모습. 그가 지나간 길로 물거품만이 올라왔다.

봉인 해제인지 지능 상승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리발도 신은 녀석이니 물속에서는 잘하겠지.

난 바다를 살피며 집중했다.

어느 쪽에 있을 것인가. 그쪽으로 위치해 대비해야 한다.

-파핫

바닷속, 미약하지만 빛이 보인다.

덕춘이의 특성, 화염. 그것으로 신호를 보내 주고 있다.

“앞으로 전진. 살짝 오른쪽으로!”

내 지시에 맞춰 냥펀과 에게르가 배와 튜브를 몰았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을까.

-쿠르르르르

바다가 끓기라도 하듯 물거품이 치솟았으며.

-푸화아아아악!

“크하압!”

작살을 붙잡은 제르바가 바다를 뚫고 나왔다.

뒤이어 나오는 덕춘이와 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곤의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으나 눈빛은 살아 있다.

이거면 충분하다. 물 밑에 있던 놈을 끄집어냈으니 뒷일은 우리의 몫.

보물선에서 탈출한 냥펀과 난, 부상을 입은 곤과 덕춘이를 챙겨 에게르의 플라밍고로 옮겨 탔다.

“도망쳐, 공블아이! 으아아아!”

“플라밍고 전력 질주!”

[무지개다리 (S)]

-촤아아아악!

플라밍고가 무지개다리를 타고 나아간다.

최대한 멀리 도망쳐야 한다.

왜냐.

하늘로 솟구쳤던 제르바가 하락하는 타이밍.

[골드 익스플로젼 (S) Lv.4]

[스킬 레벨업!]

[골드 익스플로젼 (S) Lv.5]

[칭호, 돈지랄이 빛을 내뿜습니다!]

-쿠구구궁

-콰아아아아아앙!

냥펀이 보물선을 폭발시켰으니까!

황금빛 광채를 내뿜으며 터지는 보물선. 충격의 여파로 해일이 몰아쳤으며, 흩뿌려진 바닷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무거나 잡아!”

“크학! 이게 뭐야!”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해적들이 갑판을 뒹굴고, 서로 부딪친 해적선이 가라앉기까지.

무지개다리를 탄 우리는 그 여파를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런 내 눈에 보이는 한 남자.

거센 파도와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푸그리드가 폭발의 근원지로 나아갔다.

“놈을 포획했다!”

바다로 잠시 잠수했던 그가 제르바의 멱살을 잡고 다시 나왔다.

* * *

제르바를 잡은 지 이주일.

다른 해상 군도에 있던 탈모맨과 핥짝이가 합류했다.

새롭게 등장한 레비아탄은 푸그리드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잡았으며 관련 노하우와 공략법도 전수받았다.

게다가…….

[레비아탄의 심장 (SS)]

-영물의 영약!

-비리다고요? 당연한 소리를 하네요!

-섭취 시 스텟 대폭 상승!

-물에서 활동할 시 보정치가 들어갑니다!

[해적의 보물 상자 (???)]

-뭔가 들어 있을 겁니다.

-아님 말고요!

[반파된 유령선 (A)을 입힙니다.]

[반파된 유령선 (A) Lv.1]

-구멍 숭숭 유령선!

-뜨지는 못하지만 잠수는 가능!

푸그리드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며 보상도 받았다.

SS급 영약을 얻는 건 처음. 바로 먹지는 않았다. 나중에 혹시나 스텟이 모자라면 그때 먹을 생각.

보물 상자에서는 금화만 잔뜩 나왔다.

금화는 냥펀에게 양보했다. 이번에 싸우면서 손해를 많이 봐서 좀 미안하더라고.

그건 그렇고…….

“왜 하필 반파된 유령선이야?”

“잠수함이야, 잠수함. 꽤 유용하다고.”

“…가라앉은 거잖아, 자식아.”

찌릿. 푸그리드를 노려봤지만 녀석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에휴. 됐다. 이것도 사용법에 따라 제법 쓸 만할 거 같으니까.

배는 뭐, 냥펀 거 얻어타면 되지.

골드 익스플로젼으로 날려 버렸던 보물선. SS급 아티팩트를 그냥 날려 먹은 줄 알았지만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 재생된다고 한다. 괜히 이름에 환상이라는 단어가 붙은 게 아니라고.

[67층 클리어]

[혼돈 +3점]

67층도 클리어했겠다, 보상도 받았겠다. 더 머물 이유가 없었지만 굳이 며칠 더 있던 이유는 하나.

제르바를 통해 탑 숭배 집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일그러졌지만…….

“제르바가 죽었다고?”

“어. 심문 중이었는데 중간에 암살당했더군. 정보는 많이 못 얻었어.”

푸그리드가 박스 하나를 건넸다.

간단한 신상정보와 놈의 집과 해적선에서 발견된 문서, 물건, 잡동사니. 심문을 통해 입수한 정보 몇 가지 정도.

시간 날 때 살펴봐야겠다.

“트윈도 심문하기는 했는데 아는 게 없었어.”

“그럴 거 같더라.”

“한동안 발자칸이 시끄러울 거야. 제르바가 암살당했다는 건 아직 이곳에 관련된 누군가가 있다는 거니까. 크게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군.”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나중에 또 다른 걸 알게 되면 갈매기로 연락 주고.”

“그러지.”

이걸로 볼일은 끝.

푸그리드 역시 바쁜 것 같으니 이만 위로 올라가야겠다.

이미 포탈에는 멤버들이 모여 있는 상황.

“아, 꿀 빨았다.”

“레비아탄도 강하긴 하더라.”

“흑흑. 내 보물선. 어서어서 자라랑.”

난 손을 흔들어 녀석들을 불렀다.

“가자, 68층으로.”

“그에에.”

거침없이 포탈로 발을 옮겼다.

67층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근 한 달을 지낸 만큼 조만간 연합 사람들도 우리를 따라올 거다.

[포탈에 진입합니다.]

-우우우우웅!

빛과 함께 몸이 전송된다.

바다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예전에는 포탈을 통과할 때 살짝 울렁거리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

느긋하게 전송을 즐기자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풍경.

[68층]

[재앙을 극복하시오.]

그런 나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으니.

[월광의 옥토선생이 당신의 등장을 반깁니다.]

“쌍두귀와 연관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재앙인지는 몰랐네.”

처음으로 겪는 내게 우호적인 재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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