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28화 (328/740)

328화 해적 식으로

손질하고 버려지는 생선 찌꺼기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골목.

냄새나고 음침한 곳이었으나 말없이 그곳을 거닐었다. 따로 선택지가 없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

“그에에.”

내가 절벽 감옥에서 탈출한 지 며칠이 지났다.

발자칸을 집어삼킨 세력의 관심사는 푸그리드였기에 나를 찾는 움직임은 소극적이었지만 언제까지고 방치해 둘 수는 없는 법.

그들에게도 체면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요 며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던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지금은 해적으로 보이는 이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나를 찾고 있다.

나와 마주친 놈들이 섞여 있어 대놓고 나가기에도 애매한 상황.

일단 펠라인 세트는 벗었지만 녀석들도 어지간히 멍청한 게 아닌 이상 옷을 갈아입었을 거란 건 알고 있을 터.

지금도 후드나 가면 등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을 붙잡아 확인하고 있다.

은신 스킬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필요할 때 써야지.”

쓴다 하더라도 완전히 따돌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다른 곳에 비하면 해적들이 전반적으로 허술한 건 맞다. 실력도 고른 편이 아니고.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허접한 놈들이 있는 반면에 대단한 실력자도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NPC라는 게 워낙 다양해서…….

이번에 만난 바다낚시 삼 형제 봐라. 동층대에 머무는 NPC들과 비교해도 월등히 강하다. 해적 중에도 그런 놈들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삼 형제도 직접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고 봐야 해.”

무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니까.

물론 다른 이유들이 겹쳐서 직접 나설 수 없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들이 평소 쌓아 온 업보가 많았다.

벽에 바짝 붙어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 감옥에서 탈출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내 나름대로 조사를 해 본 결과 푸그리드의 처형 일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알음알음 소문으로 돌아다니던 이야기가 점차 형태를 갖추더니, 어느 순간 푸그리드가 처형돼야 하는 이유들이 붙은 채 기정사실화돼 버렸다.

소문은 언제나 부풀려지는 법이었고 어느새 푸그리드는 천하의 쓰레기가 되었는데,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실태 없는 모함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선동질하는 이들은 정해져 있다. 모두가 욕하는 것 같지만 진짜 목소리를 내어 헐뜯는 놈들은 소수.

나머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서 동조하는 수준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푸그리드가 진짜 쓰레기였으면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반발이 일어날 수 있었을 테니까.

“애들은 잘하고 있나.”

거리를 순찰하는 해적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뒤 커뮤니티를 켰다.

67층에 올라온 건 나뿐만이 아니다.

핥짝이와 탈모맨은 다른 해상 군도로 떨어져 이곳으로 오는 중이었고.

[쁘띠공듀]: 냥냥! 펀펀! 치치! 상황 어때요?

[냥냥펀치]: 아직까지는 다른 거 없음! 근데 공듀… 진짜 레비아탄 이리로 와? 우리 죽는 거 아냥?!

무사히 66층을 클리어한 냥펀이 발자칸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팔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조국의 일원으로 활동 범위까지 넓으니 정보 수집에는 최적.

나를 대신해 정보를 모으며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

[쁘띠공듀]: 걱정 마세욧! 푸그리드와 개노답 삼 형제가 해결해 줄 거라구요.

[냥냥펀치]: 이름부터가 믿음 안 간다구…….

[쁘띠공듀]: 떼끼! 이름으로 그러는 거 아닙니닷!

[냥냥펀치]: 그치. 쁘띠공듀도 있었징… 냐아…….

갑자기 뼈 때리네.

달칸과 싸우더니 전투력이 올랐나?

하지만 이 정도 기습 공격으로는 끄떡없다. 난 정신 보호 SSS등급이니까!

등급이 이만큼이나 올려 버린 게 가장 슬프지만 아무튼.

[냥냥펀치]: 공듀우, 잔존 세력이랑은 만났음?

[쁘띠공듀]: 지금 만나러 갑니닷!

[냥냥펀치]: 흑흑. 그동안 즐거웠어. 이제 골목길에서 싸늘하게…….

[쁘띠공듀]: …죽을 일 없거든요?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사람을 보내려 하네.

냥펀의 말도 일리가 있다.

양지에서는 냥펀이 움직였고, 모습을 숨겨야 하는 난 음지에서 작전을 진행 중이었으니까.

나와 마찬가지로 숨어야 하는 이들을 찾는 것. 푸그리드의 부하들과 접선하기 위해 움직였다.

푸그리드의 처형 날짜가 잡힌 지금, 그들 역시 한껏 예민해졌을 터.

위험할 수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다. 특히나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사람이라면 더욱 경계하겠지.

그 부분은 감수해야 한다.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즉

[깔끔하게 지워진 발자국]

-푸그리드의 부하 게라의 발자국.

-전문가도 알아보기 힘든 흔적입니다!

다행히 이쪽 분야는 내가 전문이라서.

남들은 볼 수 없는 걸 보며 흔적을 쫓았다.

* * *

며칠간의 노력 끝에 이들이 있는 곳으로 예상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레지스탕스와 어울리며 숨어 지내는 세력이 어떤 곳에 정착하는지 배운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덕춘아, 긴장하자.”

“그에에.”

나와 덕춘이가 멈춰선 곳은 반쯤 쓰러져가는 낡은 술집의 뒷문.

유독 더럽게 버려진 쓰레기와 음식물 찌꺼기.

비위가 좋은 이들도 인상을 찌푸릴 악취와 눈이 시뻘건 시궁쥐가 돌아다니는 곳에 작은 문이 하나 있다.

누가 본다면 술집 주방과 이어진 뒷문 정도로 보이겠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문이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펴보면 전혀 다른 입구라는 걸 알 수 있다.

문이 작은 이유? 간단하지. 반쯤 밑에 파묻혀 있는 거니까.

-텅, 텅

붉게 녹슨 철문을 두들겼다.

그때마다 떨어지는 녹.

반응은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느긋하게 기다렸다.

푸그리드는 일이 터지면 그때 숨어 있던 부하들이 나올 거라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미리 준비를 해야지. 일 터지고 움직이면 늦어.”

다른 것도 아니고 레비아탄을 끌어들이는 계획이다.

어쭙잖은 준비로는 상대가 불가능하다는 말.

사실 지금도 무리하는 거다. 삼 형제한테 듣기로 푸그리드가 원정에 나설 때 이끄는 해적단만 10개가 넘는다고 했으니까.

배로 따지면 스무 척이 넘는다. 어디까지나 메인 함선을 기준으로 따졌을 때의 일이니 실제로는 더 많겠지.

동원되는 인력은 200명가량. 각종 물자와 함정, 장비를 준비하는 기간이 대략 15일.

반면에 우리가 대비할 수 있는 건 푸그리드의 부하들과 삼 형제. 지금 오고 있다는 바다낚시 좋아 멤버들이 전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나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푸그리드의 원정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로 짜여졌어.’

토벌에 참여하는 해적들의 피해가 극도로 적다.

발자칸 내부의 방호 시스템을 이용하지 않은 채 원정에 나섰음에도 말이다.

이번 토벌에 실패해 입은 피해도 다른 해상 군도가 평소에 입는 것과 비교하면 미약한 수준.

배와 방호 시스템이 있는 발자칸에서 놈을 상대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이어 나가는 찰나.

-끼리릭

“누구요.”

철문에 달린 쪽문이 열렸다.

눈만 겨우 보일 정도의 틈.

“푸그리드가 보내서 왔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술 취한 거 같지는 않은데 얼른 꺼지쇼. 얼쩡거리다 뒈지게 맞지 말고.”

그냥 열어 주지는 않네. 나라도 그러겠지만.

난 푸그리드에게 받은 반지를 꺼냈다. 바다낚시 좋아한테 보여 주면 도움을 줄 거라며 줬던 물건.

부하인 녀석들도 보면 알겠지.

“확인해 봐.”

쪽문에 반지를 던지고 잠깐의 정적.

-끼이이익

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건 붕대로 목을 감싼 남자.

옷차림은 추레했으나 눈빛은 날카로웠고.

‘다른 놈들보다 기세가 좋은데?’

느껴지는 기만으로도 상당한 강자임이 느껴졌다.

정돈된 기세. 껄렁거리는 해적과 달리 무게 중심이 잘 잡혀 있었으며, 언제든 무기를 뽑을 수 있게 손을 허리춤에 대고 있다.

괜히 푸그리드가 발자칸의 지배자로 있던 게 아니다. 본인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부하들의 수준도 훌륭하다.

까딱.

녀석이 말도 없이 턱으로 따라오라 제스처를 취했고.

“들어가지. 이름이 뭐지?”

“티무르, 갑판장이요.”

“난 이블아이.”

“관심 없수.”

짤막한 통성명을 하며 아래로 내려갔다.

조명조차 없는 어두운 통로. 야간 시야 덕에 앞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고.

“허튼수작 부리면 목이 달아날 거요. 헤센, 선장의 손님이다.”

“선장? 아직 안 죽었구만. 끌끌. 명줄이 길긴 해.”

녀석의 말에 제대로 된 잠금장치가 달린 문이 열렸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알코올 냄새와 땀내. 그리고…….

‘기름과 화약 냄새.’

기름 램프로 밝혀진 공간,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위로 온갖 무기가 놓여 있다.

관리가 잘된 것이 숨어 있는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은 거 같다.

하나같이 술 냄새가 나는 게 해적답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규율이 있다는 건 알겠다.

-차캉

-스르릉

-철컥

내 모습이 보이자마자 검과 총이 나를 향한다.

살벌한 분위기였으나 가볍게 나를 노리고 있는 총구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어디 전쟁이라도 나가?”

“나가지. 선장을 구하러 갈 거니까.”

오, 의리 좋네.

그런데 말이지.

“이 정도로?”

못할 거 같은데. 피식 웃음을 흘리자 놈들이 발끈한다.

상태 좋은 거 인정한다. 개개인 실력도 좋은 거 같고.

다만…….

“감옥을 지키는 이들이 몇 명인지는 알아?”

“트윈 해적단이랑 따까리들이겠지.”

“모른다는 거네.”

침묵하는 이들. 그렇겠지. 밑에 숨어 있는 놈들이 무슨 수로 알아.

특히나 이번에 푸그리드를 감옥에 처넣은 트윈은 급 부상한 해적이다. 정보가 많지 않다는 것.

“절벽 입구에 50명, 내부에 40명, 선장급 책임자 4명, 대기조 80명. 상대 가능해?”

“…쓸 수 있는 인원은 거의 다 넣었다는 거군. 푸그리드를 그렇게 죽이고 싶은 건가.”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가 탈옥하면서 경계가 삼엄해졌다더라고.”

탈출이라는 말에 해적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내가 있을 때만 해도 경계가 허술했어서, 정확히는 푸그리드한테만 집중하고 있었지.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조력자가 있어. 바다낚시 좋아, 너희도 알겠지?”

도울 세력이 있음을 알렸다.

“그놈들이 돕는다면 승산이 있겠군.”

“기습적으로 쳐야 하는 거 아닌가? 양쪽에서 밀고 들어가면 될 거 같은데.”

“그냥 배 끌고 가서 절벽 폭격하자니까? 그럼 알아서 나오겠지.”

“배가 없잖아, 병신아.”

“병, 뭐? 뒤질래!”

“뭐, 이 씨. 금니 몇 개 더 박아 줄까!”

“금 좋지! 아가리 털지 말고 들어와!”

“악! 쳤냐? 이 새끼가!”

지들끼리 떠들어 대더니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에효. 그래, 뭘 바라냐. 이 녀석들은 해적이지 군인이 아니다.

어째서 푸그리드가 일을 벌이지 말고 가만히 있길 바라는지 알 거 같다.

의욕만 앞서고 중구난방이다.

푸그리드라는 구심점을 잃으니 바로 개판 나는 거 봐라.

“덕춘아.”

“그에에에.”

-짜악!

내가 손짓하자 덕춘이가 싸우는 놈의 뺨을 때렸다.

그대로 돌아가는 턱.

-콰앙!

-콰르르르르.

테이블을 내려쳐 박살 냈다.

어지럽게 떨어지는 무기들.

시선이 내게 모인다.

이제야 좀 조용해지네.

“다 닥치고 내 말 들어. 기습? 해야지. 배? 뺏으면 돼. 푸그리드를 구출하고 싶다고 했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단검 하나를 들어 손끝으로 칼날을 비볐다.

-까드드드득

강철의 의지로 단단해진 엄지가 지나갈 때마다 칼날이 부서져 무뎌진다.

“너희처럼 개판으로 하면 절대 못 구해. 놈들이 푸그리드를 풀어 줄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어,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야.

난 마그나로크의 왕관을 머리에 썼다.

[마그나로크의 왕관 (???)의 효과]

[위엄이 서립니다.]

[집단 통솔이 강화됩니다.]

“곧 레비아탄이 온다! 그 전에 배를 빼앗고 방호 시스템을 점령한다! 멀뚱히 서서 뭐 해! 움직여 버러지들아!”

빠악!

난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나.

해적들을 움직이려면 놈들 식으로 행동해 줘야지.

부산스러워진 놈들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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