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67층
탈모맨은 나태함의 물약을 마시고 늘어진 상황, 남은 건 날뛰고 있는 가니안이다.
“나무는 태우는 게 아니야! 자르는 거지!”
“어차피 땔감으로 쓰는 거잖아!”
“난 추위를 안 탄다!”
정신 나간 대화를 하는 것과는 별개로 가니안과 휘쉔의 전투는 격렬했다.
도끼와 검이 스치고 스킬이 난무한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반응합니다.]
“수준이 높아.”
휘쉔, 어떤 놈인가 했는데 검술이 굉장하다.
나 또한 알리오스를 계승하며 검술에 대한 능력이 늘어났기에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부웅!
“가니안, 그때는 내가 졌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널 만난 기억이 없다고!”
“그렇겠지. 네 관심사가 아니니까.”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도끼를 피해 낸 휘쉔이 안으로 파고들며 검을 찌른다.
근거리로 들어가려는 속셈이었으나.
“어딜!”
도끼날을 붙잡은 가니안이 그대로 휘쉔을 긋는다.
그립에 따라 달라지는 리치.
가니안 역시 전쟁 영웅이었으며, 전장을 함께한 애병을 다루는 데서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우우우우웅!
휘쉔의 검이 진동한다.
퍼져 나오는 신성력.
곧게 뻗은 뿔도 은은하게 빛난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뿔을 되찾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거든.”
[SS급 권능, 천상검제가 빛을 내뿜습니다!]
-쩌어어어엉!
한 줄기 빛.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격이 가니안을 강타했다.
쾌검!
따라잡기 힘들 수준의 속도로 찔러 넣은 검이 가니안의 도낏자루를 쳤다.
간신히 막아 낸 가니안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밀려났고.
[S급 권능, 전쟁터의 나무꾼이 대항합니다!]
가니안 역시 기세를 올렸다.
숨통을 조일 정도의 투기.
지금까지는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걸까.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에 땅까지 흔들린다.
‘못해도 80층 중반 이상.’
어쩌면 90층대에 올랐을지도 모르겠다.
나와 핥짝이, 탈모맨이 동시에 덤벼야 이길 수 있었던 데이본드. 빙의 페널티를 받았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데이본드에 밀릴 거 같지는 않은데.’
그만큼 가니안과 휘쉔의 전투는 수준 높았다.
끼어들까? 그럼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거 같기는 한데.
“둘 다 원하는 거 같지 않단 말이지.”
“그에에.”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순수하게 전투를 즐기는 것이.
제삼자가 끼어들기에는 좀 민망하달까.
그것도 그렇고.
“언제 또 이런 싸움을 볼 수 있겠냐고.”
털썩, 바닥에 앉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일단은 지켜볼 요량.
위험하다 싶으면 그때 끼어들지 뭐.
겸사겸사 도시락도 꺼내 덕춘이랑 나눠 먹었다. 아직 점심을 안 먹어서.
-콰앙! 콰아아앙!
-까드드득!
-카앙!
정신없이 교차하는 냉병기.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스킬.
스킬의 조합과 활용.
칭호 옵션.
경험에서 나오는 반격과 전략.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의 싸움이다.
하나도 놓치지 않을 거다. 나보다 위에 올랐던 이들의 전투다.
앞으로 싸워야 할 이들 또한 이만한 저력을 보일 터.
흡수할 수 있는 건 무조건 흡수한다.
두 사람의 발걸음과 무기를 쥐는 위치, 공격 타이밍, 무게 중심의 이동 모든 것을 머리에 새겼고.
[수준 높은 전투!]
[수면 전투 복기 (S)가 두 강자의 전투를 기억합니다!]
“어?”
그동안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스킬이 발동되었다.
수면 전투 복기.
알리오스가 내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주었던 스킬이다.
본인의 전투 기억을 주입해 준 덕에 잘 때마다 알리오스가 겪었던 전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하루도 편히 잔 적이 없지만 그만큼 실력은 늘어났다.
그런 스킬이 지금 발동했다는 건…….
[알리오스의 기억 파편을 모두 소화했습니다.]
[새로운 전투 기억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다 했구나.”
알리오스의 기억을 모두 겪었다는 뜻이었다.
권능 정보를 떠올렸다.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
-동화율(100퍼센트)
-당신의 검은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동화 완료!
-알리오스 페르노의 혼돈 수치 일부를 계승합니다.
[혼돈 수치 +5점]
드디어 알리오스의 권능을 온전히 흡수했다.
-구구구구구궁
그동안 겪었던 경험과 알리오스의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수면 전투 복기는 어디까지나 수면 중에 이루어지는 가상의 전투.
꿈과 마찬가지로 흐릿한 느낌이 강했었는데.
-파지지지직!
“크흡!”
짜릿한 통증과 함께 희미했던 기억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몸에 익었던 검로와 움직임의 이유가 떠올랐다.
머리가 트인 느낌.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었고.
“보여.”
아까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가니안과 휘쉔의 전투.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공격 하나하나에 담긴 의도가 느껴진다.
실수라고 보이던 부분 역시 실수가 아니다.
정직하다고 생각했던 검로에는 수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가니안의 투박한 도끼술은 강점으로 단점을 덮은 그만의 절기였으며, 휘쉔의 검 끝은 언제나 목적을 가지고 움직였다.
순간 손이 떨렸다.
‘주도적인 싸움.’
상황에 따라가기 급급했던 나와는 다른 경지의 싸움이다.
상대에 맞추지 않고 자신의 흐름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보다 유리한 쪽으로.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게.
-콰아아아앙!
휘쉔의 검이 도끼를 쳐 내며 안으로 파고든다.
목을 노리는 듯했지만 진짜 목표로 하는 건…….
‘손목.’
-꽈드드득!
가니안이 검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고육지책.
도끼로 쳐 내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
“으랴아아!”
가니안 역시 보통은 아니다. 핏물을 흘리면서도 검을 고정했다. 힘은 가니안이 앞선다.
-부웅!
-콰득!
거대한 도끼를 한 손으로 휘둘러 버렸으나 휘쉔 역시 도끼를 붙잡았다.
서로가 서로의 무기를 붙잡은 상황.
서로의 무기가 봉해진 상황.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완력은 가니안이 앞서지만 손바닥이 찢어진 상황. 키가 더 큰 휘쉔이 몸으로 누르며 버틴다.
“크흠! 잘 싸우는군.”
“너야말로. 솔직히 뿔이 다 나으면 쉽게 이길 거라 생각했거든.”
“하하하하! 나보다 강한 놈은 언제나 있었지. 늘 그렇듯 승부란 단순히 강한 놈이 이기지는 않잖아?”
“새겨듣지.”
뿔이 봉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휘쉔과 탈모맨을 상대하면 시스템적 페널티를 받은 가니안.
둘이 온전한 상태에서 싸우면 어떻게 될까.
궁금하기는 했으나 일단은 접어 두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즐긴 거 같은데, 다들 동의하죠?”
난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적수.
둘의 싸움이 완전히 끝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다.
누군가 승리한다 하더라도 크게 다치거나 심하면 사망이다.
적이면 모를까, 이 상황에서 생사결까지 치를 필요는 없지.
“아쉽지만 끝내야겠네. 이블아이, 부탁하지.”
“누구 마음대로 끝을 내!”
“조심해!”
-파아아앙!
이를 드러낸 가니안이 순간적으로 발을 박찼다.
붙잡았던 검을 놓는 동시에 걷어차기.
반발력으로 밀려나는 휘쉔을 무시한 채 도끼를 붙잡아 내게 휘둘렀다.
대단한 압박감.
산조차 반으로 갈라 버릴 위력이 느껴졌으나.
[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스릉
“엇?”
검 끝으로 비스듬히 도끼날을 흘렸다.
잠깐이지만 느려진 광경.
합이라도 맞춘 듯 도끼날과 칼날이 평행을 달린다.
까득! 검을 도끼날과 자루 사이에 끼워 고정한 뒤 그대로 턴.
무게 중심을 옆으로 빼며 검을 크게 횡으로 그으니.
-깡! 까가가강!
힘의 흐름에 따라 도끼가 가니안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을 나뒹구는 도끼.
가니안의 손이 찢어지지 않았다면 놓치지는 않았을 거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수준에 놀란 탓일지도 모르고.
“…너!”
휘쉔이 눈을 부릅뜬다.
손에 남은 감각.
내가 한 일이지만 현실감이 없다.
몸이 저절로 움직인 느낌.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행동이 떠오르는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그동안 현실과 꿈속에서 겪었던 일들이 진짜 경험이 되어 발현됐다고 해야 하나.
“재밌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좀 더 살펴보고 싶지만 당장은 다른 일이 더 급하다.
“나, 너, 이 녀석! 60층대를 오르고 있던 거 아니었나!”
“맞아요, 가니안. 그런 의미에서, 아.”
“업!”
가니안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내 손이 더 빨랐다.
휘쉔이 뒤에서 가니안을 붙잡는 사이 재빨리 나태함의 물약을 입에 부었다.
추욱. 가니안의 몸에 힘이 빠진다.
“아… 인생. 나무도 생명이야. 으어어.”
친환경주의자가 된 가니안이 바닥에 엎어졌다.
이거 효과 좋네. 사실 최강의 포션 아닌가?
살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칭호, 불굴의 의지가 불타오릅니다.]
“아니, 지! 나무는 베어야 한다!”
“그냥 좀 누워 있어요! 왜 이리 끈질겨!”
“어그그그극! 우웁!”
아무래도 사람마다 효과가 다른 모양.
가지고 있던 물약을 연달아 들이부었다.
중간에 맛없어 포션도 하나 들어간 거 같기는 한데 착각이겠지 뭐, 아님 말고.
“우우욱! 토하는 것도 귀찮, 웁!”
부르르 떨며 바닥에 엎어진 가니안을 잠시 내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이걸로 할 건 끝났다.
시간이 지나면 재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지.
“후우. 오랜만에 뜨거웠다.”
“뜨거운 중에 미안한데 가니안 좀 들어요. 여기 그냥 놔둘 수는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읏차.”
난 탈모맨을 어깨에 짊어졌고 휘쉔 역시 가니안을 들었다.
일단은 지부에 놔둘 생각.
한동안은 얌전히 여기서 머물 생각이다.
나도 그렇고 휘쉔도 그렇고 아직 재앙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66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도 재앙이 다가와야 한다.
핥짝이가 무사히 재앙을 넘길지도 지켜봐야 하고.
우리는 지부로 향했다.
* * *
66층에 들어선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
“후우. 실력이 그새 늘었군.”
“열심히 해야죠. 앞으로 가니안 같은 사람들도 마주칠 텐데.”
“그렇긴 하지! 하하하! 넌 잘할 거야!”
가니안과의 대련을 마친 후 검을 정돈했다. 가니안뿐만이 아니다. 휘쉔과도 대련을 이어 나갔다.
강자와의 대련은 언제나 도움이 되는 법. 두 NPC도 내게 관심이 있던 터라 일주일간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마무리 지어야 하지만.
나를 비롯해 가니안과 레지스탕스 대원 모두 재앙에서 벗어난 상황.
핥짝이와 탈모맨도 무사히 재앙을 넘겼다.
[66층 클리어]
[계약에 따라 바람과 구름은 더 이상 내기 대상에게 간섭할 수 없습니다.]
[포탈이 생성됩니다.]
아무래도 한 번 건든 대상에게는 다시 충동과 욕망을 불어넣을 수 없는 모양.
“아, 죽겠네. 망할 재앙들. 할 거면 진작에 하지 뜸 들여 가지고.”
“간만에 푹 쉬었다!”
핥짝이와 탈모맨도 올라갈 채비를 한다.
이미 포탈을 생성되었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미네르에게 받은 퀘스트도 클리어했고 보상도 받았다.
하얀뿔 본부 위치 단서랑 천상의 가루.
[천상의 가루 (S)]
-천족의 뿔을 갈아 만든 가루.
-성물 재료로 쓰일 수 있습니다.
-먹을 수도 있죠!
-고위 천족들도 탐내는 물건입니다.
이건 어디다 쓸지 잘 생각해 봐야겠다.
아무튼.
“우리는 이만 가보죠.”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작별 인사를 했다. 66층에서 얻은 게 많다.
얼음과 불의 교단을 부활시키며 칭호도 업그레이드되고, 레지스탕스와의 관계도 돈독해졌다.
가니안과 휘쉔과 대련하며 깨달은 것도 있고.
“맞다, 가니안.”
“음?”
난 가니안에게 은수저를 던졌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가니안이 숟가락을 확인했고.
“이, 이건!”
“가니안 거 맞죠? 선물이에요.”
[NPC 가니안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쿵. 쿵.
가니안이 내게 다가온다.
왜 저래. 무섭게.
슬쩍 뒷걸음치려는 찰나.
“역시 좋은 녀석이었군! 무지개!”
“이블아이라고요! 아!”
가니안이 나를 와락 껴안았다.
힘 봐라. 몸이 찌그러질 거 같다.
정강이를 걷어차 녀석을 물리쳤다.
“전쟁터에서 썼던 숟가락인데. 내겐 행운의 상징이지. 전쟁이란 게 사람 미치기 딱 좋거든. 이런 거라도 없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 너한테도 행운이 깃들면 좋겠지.”
나한테 행운 스텟이 있다는 걸 알고 하는 말일까.
“받아. 70층에 올라가면 헤밀리아가 있을 거야. 나랑 같은 전쟁 영웅이지. 도움을 줄 거라고.”
“주면 고맙게 받죠.”
가니안이 두루마기 하나를 건네줬다.
준다는데 안 받을 이유가 있나.
“잘 가라고.”
“오오! 성자님! 가시는 길 꽃길만 걸으십시오!”
“잘 가, 무지개.”
“쫄쫄이랑 헬멧도 무사히 등반하고.”
그걸 끝으로 가니안과 레지스탕스, 신도들의 배웅을 받으며 포탈로 올라갔다.
-우우우우웅
[67층에 진입합니다.]
익숙한 울렁거림을 지나 눈을 뜨자 새로운 필드가 나타났다.
솨아아아.
시원한 바람과 짠 내.
[67층]
[해상 군도 발자칸]
[재앙을 극복하시오.]
그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
“잠깐만.”
해상 군도 발자칸? 내가 아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