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화 저 나무는 태워야 하는 나무다
내가 군대에 있을 당시 부조리가 심했다.
먼 과거에는 훨씬 편했다고 듣기는 했지만 내가 군대에 간 것은 대격변 이후의 일이라…….
정말 지원을 나가 먼발치에서나마 몬스터를 보고, 쏘고,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일을 했었다.
군 생활 중 몇 번 없는 일이기는 했지만 실전은 실전이었고, 누군가의 목숨이 달린 역할이었다.
실수는 곧 누군가의 생명을 대가로 요구했고 당연히 위계질서가 강조됐다. 훈련병 시절부터 가장 많이 했던 게 있다면 역시 대가리 박아.
난 그때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고 있었다.
“이런, 개 같은.”
“제대로 박자. 요령 피우지 말고. 천족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근성이 없어서야.”
부들거리며 바닥에 뿔을 박고 엎드려 뻗친 루아르.
이름하여 뿔 박아!
제2 천계의 천족에게 뿔은 소중한 것. 그걸 땅에 박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운데 뒷짐을 진 채 머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니.
힘든 것과는 별개로 자존심이 뭉개지는 일이다. 루아르의 얼굴이 시뻘게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충직한 녀석일세. 편한 길을 마다하고.”
놈은 재앙을 피하는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결과는 보다시피.
베니카는 레지스탕스 쪽에 붙었다. 66층 지부장이었던 미네르도 이곳으로 왔다.
“레지스탕스 생활이라고 크게 다른 건 없어, 베니카.”
“으응. 그런 거 같긴 해. 설거지하고 그럼 된다구? 비 새는 거 고치고 요리하구.”
“유지 보수가 가장 중요하니까.”
둘이 고향 친구라더니 확실히 대하는 게 부드럽다.
다른 대원들도 친근하게 대해 주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게 진짜 친구지.
그런 의미에서 베니카는 이미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친구였다.
하얀 나무 소속일 때부터 남들 모르게 도움을 줬으니. 본인은 단순히 정이 많아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사소하지만 배반은 배반이었고, 들킨다면 하얀 나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그동안 위험 부담을 안고 이들을 도와줬다는 거다.
“루아르를 잘 감시해. 갈매기를 이용 못 하게 지켜보고, 등반가와 접촉하는 것도 막고.”
“알겠습니다, 성자님!”
루아르를 죽일 생각은 없다.
원한이 쌓인 레지스탕스와 신도들도 가만히 있는데 내가 나서는 건 좀 아니지.
다만 안전 조치는 취해야 한다.
66층을 시작으로 두 집단의 균형이 기울었다.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지만 이게 쌓이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얀 나무가 이 사실을 최대한 늦게 알수록 우리가 유리해진다는 말.
하는 짓과는 별개로 루아르의 충성심은 진짜다. 자발적인 의지인지 오랫동안 이어진 정신 교육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떤 식으로든 하얀 나무와 접촉하려 하겠지.
“너희들 두고 봐라! 절대 윗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독방으로 끌려가면서도 소리를 지르는 녀석.
저기는 신도들한테 맡기도록 하고.
“재앙을 피하는 방법이 생각보다 쉽네.”
“조건만 맞으면 어렵지 않아요.”
난 베니카가 말해 준 재앙 극복 방법을 되뇌었다.
66층의 재앙, 참을 수 없는 충동과 잊히지 않는 욕망.
비슷한 듯 다른 힘을 지닌 놈들이었지만 공통된 것이 있었으니…….
‘뭐가 됐든 하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해.’
충동이든 욕망이든 뭘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성립된다.
재앙을 극복하는 건 충동과 욕망을 이겨 내는 것이고.
나처럼 혼돈 수치로 재앙의 능력을 찍어 누르거나, 엄청난 정신력으로 버티는 게 아니라면 방법은 크게 두 가지.
“나태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하거나.”
후자의 경우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신자가 모든 잡념을 지우고 기도에 집중한다면 충동과 욕망의 휘둘리지 않는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니까.
뭔가에 집중할 때 주위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
집중할 게 없다면 쓸 수 없는 방법이었고, 사람마다 집중력의 수준이 다르기에 함부로 쓰기에는 부담이 있는 방법이었다.
“간단하네. 오랜만에 스파이크 연습이나 해 볼까.”
핥짝이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엘리트 체육인 출신. 탑에 와서도 꾸준히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녀석이니 집중력은 말할 것도 없겠지.
55층, 큐브 플라워 때도 핥짝이는 정신력으로 버텼다. 지금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콰앙! 쾅!
신전 밖으로 나가 돌멩이를 공 삼아 스파이크를 연습하기 시작하는 핥짝이.
재앙은 주변을 돌다 핥짝이를 유혹할 것이다. 거기서 버텨 내는지는 확인해 봐야지.
핥짝이를 바라보다 베니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집중 다음의 방법은 나태함.
“효과는 확실하겠지?”
“그럼요! 으음, 남은 게 있기는 한데 몇 개 없어서 대원들이 쓸 것도 부족할 거예요.”
“상관없어. 레시피만 있으면 돼.”
이번 방법이 가장 쉬웠다.
욕망? 충동?
귀찮은 한 방이면 해결된다.
[나태함의 물약]
-아이템 효과가 그니까…….
-대충 씁시다. 귀찮아!
아이템 설명 봐라. 적어도 효과는 말해 줘야지.
한번 먹으면 몇 시간은 나태해져 퍼질러 있다는 거 같다.
밥 먹을까? 하다가도 귀찮아서 엎어져 있는 다나.
포션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심오하다. 별게 다 있네.
다행히 베니카는 포션 제작 레시피를 알고 있었고, 난 포션 제작 스킬이 있다.
의외로 재룟값이 비쌌지만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면 싼 편이지.
[포션 제작 (S) Lv.1]
이미 S급을 달성한 만큼 포션 제작은 자신 있다.
내 소중한 돈벌이 중 하나기도 하고.
처음 만드는 만큼 시행착오도 몇 번 있었으나 끝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정말 알 수가 없군. NPC 집단과의 인맥, 신성력, 포션 제작까지. 이런 등반가는 처음 봐.”
“더 놀라운 건 이제 60층대를 오르고 있다는 거죠.”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흥미로운 눈으로 날 살피는 휘쉔과 미네르.
둘에게 포션을 넘겼다.
“가지고 있다가 재앙의 영향을 받는다 싶으면 바로 써요.”
“그러지.”
“알겠어요.”
이걸로 할 일은 끝.
나태함의 물약은 커뮤니티에 레시피를 올릴 예정이다.
연합을 통해 뿌리기도 할 거고. 그래야 후발주자들이 66층을 클리어하지.
대충 이쪽에서 볼일은 끝난 거 같고, 남은 건.
“탈모맨을 찾는 거네.”
혹시 몰라 커뮤니티로 말을 걸어 봤지만 대답이 없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안 가는 상황.
“친구를 찾나 본데, 그건 내가 도와주지.”
휘쉔이 입꼬리를 올리며 움직이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번에 접수한 교단은 미네르와 베니카가 관리하게 됐다.
뭐가 됐든 난 위로 올라가야 한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남아서 관리를 해 줘야 한다는 이야기. 이미 레지스탕스와 엮인 만큼 이 부분은 이들에게 맡기는 편이 좋았다.
이후, 계속 올라올 연합 사람들을 위해서도.
“갑시다.”
“나만 따라오라고.”
66층은 휘쉔의 활동 지역. 나보다 필드를 잘 알았다.
레지스탕스 지부와 신전 부근에는 없으니 외곽부터 훑어볼 예정이다.
-파앗!
-타악!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 * *
6시간에 걸친 수색.
필드 동부 평원에서 우리는 찾고 있던 녀석을 볼 수 있었다.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가니안?”
“저 미친놈이 왜 저기에!”
탈모맨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아니, 그보다 소름 돋는 게 있다면.
“공듀는 넘겨 줄 수 없다!”
“그 나무를 내게 넘겨라, 등반가여!”
평원 중앙, 홀로 우두커니 자라난 나무가 있었고 그곳에는 연합 굿즈가 달려 있었다는 것.
그냥 굿즈가 아니다. 쁘띠공듀의 모습을 형상화한 포스터다.
저게 포스터가 맞나? 공듀라면 이렇게 생겼을 거야! 하면서 지들 멋대로 그려 놓은 건데.
집단 지성이란 무서워서 처음에는 온갖 모습으로 그려졌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하나로 통일되었다.
그 모습이 뭐랄까.
[정신 보호 (SSS) Lv.2]
설명하길 포기하자.
이준석 이 자식. 저걸 공식 굿즈로 올려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예전에 봤던 굿즈 목록에는 없던 거 같은데 그사이 추가된 건가?
으득. 이를 갈았다.
저거 만든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잡히면 절대 가만 안 둔다.
“대단한 신념!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친구가 됐을지 모르겠군.”
“너야말로. 공듀를 탐하지 않았다면 뜻이 맞았을 거야.”
가니안과 탈모맨이 서로를 인정한다.
이미 한바탕 싸웠는지 일대는 엉망진창.
탈모맨 역시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다. 가니안은 평범한 NPC가 아니다. 전쟁 영웅 출신의 강자지.
다른 NPC들도 미친놈이라며 피하는 놈인데 이제 60층대를 오르고 있는 탈모맨이 어쩔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녀석은 굳건했으니.
“낭만을 위하여!”
“최고의 나무꾼을 위하여!”
두 미치광이가 다시 한번 격돌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공기가 폭발한다.
주먹과 도끼가 마주치고 불똥이 튀어 올랐으며, 땅거죽이 뒤집혀 튀어 올랐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한계까지 몰아치는 공세. 흉악했지만 순수한 전투.
뒤를 돌아보지 않는 두 남자의 전투는 뜨거운 뭔가가 있었고.
“멋진 광경이군.”
그 모습을 지켜본 휘쉔은 감탄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멋지다고? 누군 스트레스로 돌아버릴 거 같은데 말이야.
눈으로 욕하는 내 모습을 본 걸까, 헛기침을 한 휘쉔이 검을 들었다.
“흠흠. 좀 더 지켜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네 친구가 죽을 거 같으니 들어가지.”
“동감이야. 일단 저거부터 찢어 버리고.”
-파아아앗!
나와 휘쉔이 난입했다.
가니안은 아직 본 실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았다.
뭐가 됐든 그는 NPC, 아무런 이유 없이 등반가를 공격하면 시스템적 제약을 받는다.
-치지지지직!
지금도 가니안의 몸에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다.
시스템이 페널티를 가하고 있다는 증거.
그러지 않았다면 진작 탈모맨이 당했을 거다.
“우아아아아압!”
“크하아아아압!”
함성을 지른 탈모맨과 가니안이 주먹과 도끼를 날린다.
척 봐도 위험한 일격.
이번 일격으로 승부를 내려는 것 같다만.
“워워, 가니안. 등반가를 상대로 이러면 안 되지.”
-기이이잉
순식간에 중앙에 파고든 휘쉔이 검을 빙글 돌리며 도끼를 흘려보냈다.
그와 동시에 뒷발로 탈모맨의 허벅지를 밀어내기까지.
두 사람의 공격이 엇갈린다.
그 틈에 난.
[파이어 밤 (S) Lv.10]
-콰아아아앙!
파이어 밤으로 나무와 포스터를 흔적도 없이 불태워 버렸다.
후우. 이제 좀 낫네. 시커먼 것이 아주 마음에 들어.
탈모맨이 털썩 주저앉는다.
“공듀우우우우!”
“공듀 같은 소리 하네. 정신 차려!”
“이블아이, 솔직히 말해. 공듀를 어디다 숨겼냐!”
“이 세상엔 없어, 자식아!”
-빠악!
울부짖는 탈모맨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동시에 만들어 둔 나태함의 물약을 놈의 입에 부었다.
본인도 모르게 꿀꺽 삼킨 녀석이 움찔한다.
“고, 공. 어으으. 미안해. 나 소개팅 할게. 으으.”
그대로 바닥에 엎어지는 탈모맨.
“으으, 왜 사람은 숨을 쉬는 걸까.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아. 으어어. 이블아이. 소개팅은 한 10년 뒤에 하자. 귀찮아.”
“효과 좋네.”
눕기도 귀찮은지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상태 그대로 버르적거린다.
대충 발로 밀어 눕히고 위에 담요 한 장 덮어 줬다.
[충동과 욕망이 귀찮음과 맞붙습니다!]
일단 놔두자.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으니까.
혹시 몰라 나태함의 물약을 한 병 더 꺼내 먹였다.
다음은.
“내 나무를 태우다니! 네 이노오오오옴!”
저 정신 나간 양반을 어떻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