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봉합
66층. 두 개의 재앙이 존재하는 동시에 하얀뿔과 하얀 나무가 영입 전쟁을 벌이는 곳.
60층대까지 올라오는 등반가가 많지 않았기에 각 소속의 NPC들은 뉴 페이스를 끌어모으기 위해 분주했다.
하얀 나무의 천사들을 숭배하는 교단, 다섯 날개.
그곳의 66층 지부를 관리하는 천족 루아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썩고 있어야 하는 거지. 거지 같네.”
훤칠한 키. 위로 솟은 두 뿔과 하얀 의복은 신비로웠지만 막상 내뱉는 말은 딴판이었다.
하얀 나무 소속의 천족.
왕족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모든 구성원이 상위 계층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중을 드는 이들 역시 필요했으니 비율로만 따진다면 중위층 이하 계급이 더 많았다.
똑같이 허드렛일을 함에도 중위층과 하위층의 대우는 전혀 달랐으며, 각 계층 내부 안에서마저도 차별이 존재했다.
귀족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단된 차별과 부조리.
본인들의 권력이 고착화되기 위해서라도 신분제는 밑바닥에도 뿌리 깊게 심어져 있어야 했다.
“확 씨, 그냥 위로 올라가 버려? 등반가 하나 잡아다가 재앙만 극복시키면 올라가는 건 쉽다고. 가서가 문제지.”
콰직.
애꿎은 몬스터를 밟아 죽인 루아르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그 역시 하위 계층이었다. 다만 66층에 배정받고 윗선에서 임무를 부여받았고.
“이제 2명 남았다.”
등반가 신도 100명을 채우면 중위층으로의 신분 상승도 함께 약속받았다.
이후 안전지대로 올라간다면 그곳에 있는 하위층 천족 위에 설 수 있을 터.
혹은 66층에 계속 남아 있는 방법도 있다.
“흐흐. 베니카, 두고 봐라.”
그와 함께 교단을 관리하는 천족, 베니카.
신성력만 따진다면 그가 미세하게 우위에 있었으나 66층은 고립되어 있었고, 베니카의 도움이 있어야 정상적으로 교단을 운영할 수 있었다.
은근슬쩍 자신과 맞먹는 모습에 내심 못마땅해하고 있었으나 그것도 곧 끝이다.
등반가 2명만 더 신도로 만들면 그는 중위층이 될 것이며, 하위층인 베니카는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때부터 무엇을 할까 상상하니 루아르는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정보통에 의하면 최근 60층에 올라선 이들이 많아졌다고 했다.
신분 상승의 때가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하얀뿔의 방해가 있기는 하겠지만 루아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뿔도 잘린 놈들이 까불어 봤자지. 쯧.”
레지스탕스는 밑바닥 중의 밑바닥.
하층민 중에서도 빈민가 출신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가볍게 땅에 발을 비빈 루아르가 신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도 때울 겸 신도 NPC들이나 갈구려는 생각.
루아르가 휘파람을 불며 계곡으로 향했고.
“어?”
예상치 못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뭐, 뭐야! 신도들! 넌 또 뭐 하는 건데!”
교단의 상징물 대신 엉뚱한 것들이 신전에 올라가 있었으며, 그와 함께 일하던 천족 베니카는 신전 입구에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들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훌쩍거리기까지.
레지스탕스의 기습? 도발? 루아르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아, 드디어 오셨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입구에서 신도 NPC들이 걸어 나왔다.
평온한 표정의 NPC들.
“너희, 이 자식들! 신전 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어! 전부 징계방에 갇히고 싶어?”
열이 뻗친 루아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허, 징계방이라니요. 무슨 그리 험한 말씀을.”
“피곤하실 텐데 저희가 마사지라도 해 드리겠습니다.”
“어디 보자. 이게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
평소라면 잔뜩 움츠러들었을 텐데도 허허 웃으며 다가오는 이들.
그들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몽둥이를 꺼냈다.
“신성력 떼고 한 판 붙어 봅시다.”
그들 또한 NPC.
교단의 규율에 벗어나 순수한 전투력을 따진다면 결코 루아르에 밀리지 않았다.
* * *
나와 핥짝이는 의자에 걸터앉아 신도들이 하는 일들을 지켜봤다.
테이블 위에는 상큼한 무알코올 칵테일이 놓여 있었고, 신도 중 한 명은 옆에서 부채질까지 해 준다.
서비스 좋네, 여기.
“악! 으억! 자, 잠깐! 뼈 맞았어! 야! 아, 아니. 선생님!”
“우리를 속이고 무사할 줄 알았냐!”
“그동안 쌓아 온 업보의 대가를 치르거라!”
개 패듯이 루아르를 두들겨 패는 이들.
그보다 먼저 신전에 왔다가 혼쭐이 난 천족 베니카는 오들오들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어허, 팔 귀에 안 붙이냐.”
“히익!”
내 언질에 베니카가 번쩍 손을 든다.
그래도 얘는 사정이 좀 낫다.
루아르가 횡포를 부릴 때 베니카는 은근히 신도들을 챙겨 줬다고 한다.
다만 속인 건 속인 거라 신도들한테 둘러싸여 꿀밤을 몇 대 맞기는 했지만 몽둥이 찜질은 안 당했으니까.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너도 사기 참 잘 친다?”
“어허, 사기라니. 순수한 마음에서 도움을 준 거지. 신성력도 진짜고.”
“말은 잘해요.”
쪽쪽, 빨대로 음료수를 마신 핥짝이가 턱을 괸다.
과정이 어찌 됐든 이곳은 얼음과 불의 교단이 장악한 상황.
신도들 모두 신성력을 획득했다. 어디까지나 내 신성력을 기반으로 주입된 거라 신성력이 따로 성장하지는 않아야 정상인데.
[칭호, 부활한 교단의 성자가 빛납니다.]
-얼음과 불의 교단을 일으켜 세운 당신! 당신은 성자입니다!
-신도들이 늘어날 때마다, 믿음이 커질수록 신성력이 성장합니다.
-신도들 역시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신성력이 성장합니다.
-신성력 초월 시 얼음과 불의 교단의 능력 일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칭호가 업그레이드되면서 옵션이 바뀌었다.
신도들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그만큼 신성력이 늘어난다.
이게 진짜 교단이지.
겸사겸사 나도 신성력이 늘고.
살짝 피라미드식 다단계 느낌이 나지만 뭐 어떤가, 내가 꼭대긴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쁘찡 연합 사람들도 끌어들여 봐?
이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그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성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니까.
옆에 있는 핥짝이도 이번 기회에 신자가 됐다.
특별히 신경 써서 신성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데까지 넣었고, 현재 200대까지 올라갔다.
꽤나 만족스러운 상황.
신도들을 끌어들인 덕에 다섯 날개 교단과 하얀 나무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예상은 했다만 70층대에 하얀 나무가 있다고 했지. 하얀뿔이랑 같이.”
“넌 레지스탕스에 붙을 거고.”
“그치. 이 난리를 피웠는데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나도 선택지가 없으니 그쪽에 붙어야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얼음과 불의 교단이 드러난 이상 이쪽 신자들은 레지스탕스 쪽에 붙어야 한다.
하얀 나무에서 곱게 보고 지나갈 리가 없으니까.
지부로 돌아가 알려 주면 좋아할 거다.
“적당히 했으면 안으로 들어옵시다.”
“예! 성자님!”
내 말에 루아르를 두들기던 이들이 그와 베니카를 끌고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신전 내부는 이미 재단장을 해 둔 상황.
기존에 있던 액자와 조각상 등은 모두 버리고 얼음과 불의 신전과 관련된 것들로 채웠다.
사실 나도 잘 몰라 적당히 꾸며 둔 거나 마찬가지지만.
은근슬쩍 쁘징 연합 관련된 것들도 넣어 뒀다.
신도들한테도 언질을 줘서 연합 사람들이 오면 도움을 주라고도 해 뒀고.
“크으윽! 인간 따위가!”
“말조심하지 못할까!”
-빠악!
괜히 입을 함부로 놀리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루아르가 날 노려본다.
노려보면 어쩔래. 내 옆에는 든든한 신도들이 함께 있는데.
교단을 접수하면서 알게 된 건데 여기 있는 이들 역시 재앙의 영향을 받았다.
구름과 바람.
다른 이름으로 참을 수 없는 충동과 잊히지 않는 욕망.
이들이 신앙생활에 미쳐 있는 이유기도 하다.
반면에 잡혀 온 천족들은 달랐다.
[루아르]
-제2 천계의 하층민.
-하얀 나무 소속입니다!
-재앙의 영향에서 벗어났습니다.
[베니카]
-제2 천계의 하층민.
-재앙의 영향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얀 나무 소속이지만 미네르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모두 재앙에서 벗어났다.
여기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으니.
“재앙을 극복할 방법을 말하도록.”
“그냥 날로 먹겠다는 거냐!”
“어. 정확해.”
겸사겸사 공략법도 뜯어 갈 계획이다.
사실 난 크게 걱정이 없다.
이미 혼돈 수치가 100을 넘어가서 재앙의 규칙에 저항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든 영향을 받겠지.
NPC들도 영향을 받는데 등반가라고 다를까.
커뮤니티에서 사는 탈모맨도 최근에는 말이 없다. 높은 확률로 재앙에 당했을 거다.
이 미친놈이 뭘 하고 돌아다니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네.
공략을 쓰기 위해서라도 이 정보는 필수다.
‘하얀뿔도 방법을 모르는 거 같거든.’
지부장인 미네르가 말했지. 바람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입구를 막아 두라고.
당장 전쟁 영웅인 가니안도 미쳐서 나무란 나무는 죄다 박살 내고 있다.
지금은 또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지부에서 나온 후에는 갑자기 다른 곳으로 달려가 버려서.
같이 이곳으로 왔다면 도움을 좀 받을까 했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잘 풀렸지만 말이다.
“말 안 할 거야?”
“내가 왜 말해야 하지?”
“안 하면 이 친구들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툭툭. 신도들이 손바닥에 몽둥이를 두드린다.
와, 이제 보니 그냥 몽둥이가 아니라 쇠몽둥이였네.
이미 맞아 봐서일까, 루아르가 움찔했으나 기세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너희가 이러고도 무사할 거 같으냐! 내 뒤에는 하얀 나무가 있다! 날 건들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아무래도 뒷배를 믿고 있는 모양.
그럴 수 있지. 그럴 수는 있는데.
“걔네가 무슨 수로? 66층으로 넘어오기라도 한데?”
“네놈이 수작질을 벌인 걸 알고 있다! 위로 올라가면 하얀 나무와 마주치겠지. 깊이 반성하면 내가 상부에 보고를 올려 특별히 좋게 끝내 주마. 어쩌면 은혜를 입어 귀족분들의 도움을 받을지도 몰라. 둘도 없는 기회라고.”
이 상황에서 합의를 보려고 하네. 사이비 특징인가.
그런데 어쩌나…….
“난 이미 레지스탕스 소속인데. 위로 올라가도 바뀔 거 없어.”
“하하하하! 우습구나! 그딴 반푼이들 편에 붙어서 뭘 한다고! 뿔이 잘린 이들은 무슨 수를 써도 윗분들께 대항할 수 없다. 그분들도 필요 없지. 나한테만 걸려도 그냥……!”
“그냥 뭐?”
“어?”
신나게 웃으며 떠들던 루아르가 멈칫한다.
나 역시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에 고개를 돌렸고.
“너무 안 와서 찾으러 나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놈이 무릎 꿇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은 좋네.”
“휘쉔!”
66층 지부 대원 휘쉔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펑퍼짐한 옷에 검을 든 모습이었으나 하나 바뀐 점이 있었으니.
“어, 어떻게!”
잘렸던 뿔이 붙어 있었다. 곧게 뻗은 한 쌍의 뿔.
이전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세가 느껴진다.
녀석이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선물 잘 받았다, 이블아이.”
“잘 붙었네요. 미네르는요?”
“미네르는 봉합 중. 오늘 내로 붙을 거야. 다른 대원들 것도 왔는데 한 명은 상처가 오래돼서 붙이진 못해. 대신 전용 장비를 만들 예정이지.”
“장비로 만들 거면 프램버그에 연락 넣어 줄까요? 베힐탄이랑 친한데.”
“프램버그의 수장? 너 인맥 좀 있구나! 그럼 고맙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를 보는 루아르의 표정이 썩어 간다.
66층 교단은 뺏겼고, 무시하던 레지스탕스는 뿔을 되찾았다. 앞으로 들어올 이들 역시 레지스탕스에 붙을 가능성이 크다.
머리에 비상벨이 울릴 만한 사건이었고.
“저, 저기. 저도 재앙 피하는 방법 알고 있는데. 저도 레지스탕스에 받아 주시면 안 될까요?”
“베니카! 우릴 배신할 생각이냐!”
베니카가 은근슬쩍 손을 들었다.
어쩔까, 난 휘센을 바라봤고.
“베니카면 환영이지. 우리 힘들었을 때 종종 도와줬거든.”
휘쉔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너, 너, 너! 진작부터 내통하고 있었단 말이냐!”
“내통까지는 아니구. 그냥 가끔 먹을 거나 그런 것만 조금. 미네르랑 고향 친구란 말이야.”
“그게 내통이다! 멍청아!”
울화통이 터지는지 루아르가 소리를 질렀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이렇게 됐는데.
슬며시 놈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자. 딱 한 번만 다시 물을게. 재앙을 피하는 방법은?”
싱긋 웃으며 질문을 던졌고 놈의 눈은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