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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321화 (321/740)

321화 신도

잠깐의 뇌 정지.

-콰앙!

난 바로 문을 닫았다.

“상급자님?”

“잠깐만…….”

이 장면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어디더라.

아!

프램버그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때는 핥짝이랑 냥펀이 같이 있었지.

얜 왜 문 열 때마다 있냐.

얼굴을 쓸어내렸다. 핥짝이가 여기 있는 이유는 알 거 같았다.

‘신성력이 없잖아.’

이미 나와 탈모맨과 합을 맞춰 데이본드와 싸웠다.

심지어 바로 전 층에서. 그때 신성력이 없어 공격에 이런저런 제약이 생겼던 만큼 신도가 되면 신성력을 준다는 말에 혹했겠지.

일단 들어가자. 이쪽 교단은 정상적인 곳이 아니다. 괜히 이상한 곳에 핥짝이가 잡히게 둘 수는 없다.

-삑

잠시 숨을 고르고 문고리에 반지를 댔다.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세게 닫아서 그런가 내 쪽으로 시선이 모였다.

“이분은?”

“위에서 지령받고 오신 상급 신도십니다.”

안내자가 웃는 낯으로 빠르게 상담사한테 다가가더니 입 모양으로 불시 검문이라고 알려준다.

눈을 동그랗게 뜬 상담자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일어날 필요 없다.”

“아, 예. 감사합니다.”

손을 들어 막았다. 상담사한테는 관심 없다. 핥짝이를 빼내기만 하면 된다.

옷차림은 바뀌었지만 목소리도 그렇고 전체적인 윤곽은 그대로인 만큼 핥짝이도 내 정체를 파악했겠지.

“네가 왜 여기…….”

눈을 살짝 찌푸린 핥짝이가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핥짝이가 입을 다물었다. 역시 눈치가 빠르다.

내가 옷을 바꿔 입고 이러는 것만 봐도 대충 상황을 알아차린 거겠지.

“하하하. 이번 새내기분은 운이 좋군요. 상급자께서 방문해 주셨습니다. 흔치 않은 기회죠. 좋은 말씀 들어 보세요.”

“뭔 새내기, 나 아직 여기 들어온다고 안 했어.”

“어허! 일단 들어 보세요.”

핥짝이의 말에 안내자가 엄한 표정을 짓는다.

주변에 있던 모든 NPC가 자리에서 일어나 핥짝이를 바라보자 압박감이 대단하다.

아무리 핥짝이라도 동시에 여러 명의 NPC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을지언정 돌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핥짝이가 다리를 꼰 채 날 바라본다. 어디 한번 떠들어 보라는 얼굴.

안내자 역시 기대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다.

좋은 말씀이라… 이런 걸 해 봤어야 알지.

툭. 녀석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자, 복창합니다. 바르고 착하게 살지어다.”

“바르고 착하게 살지어다!”

큰 목소리로 복창하는 신도들.

잘한다, 옳지.

“정수리를 탐하지 말지어다.”

“정수리를 탐하지 말지어다!”

“같이 복창하지 못할까! 흠흠!”

신도 중 한 명이 호통을 쳤지만 매섭게 노려보는 핥짝이에게 기세가 죽었는지 시선을 돌린다.

왜 눈에 살기를 띠고 그러냐.

나도 살짝 쫄렸지만 이왕 뱉은 거 마저 말해야지.

“2등도 잘한 거다. 꼬우면 1등 해라.”

“꼬우면 1등 해라!”

말이 이어질 때마다 핥짝이의 표정이 다이나믹하게 변한다.

이게 은근 재밌네.

좀 더 하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내 생명이 위험해질 거니 이쯤에서 끝내자.

난 적당히 마무리를 지었고.

“…그으래. 즈은 그믑드, 이따 브즈(조언 고맙다, 이따 보자).”

핥짝이가 이를 악물며 싱긋 웃었다.

움켜쥔 주먹이 두려웠지만 괜찮다, 왜냐…….

난 지금 상급자 신도니까!

신도들이 내 편이다.

“역시 상급 신도십니다! 하하. 직접적인 메시지보다 은유와 상징을 하시는 말씀!”

“신앙의 깊이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겠군요. 정수리를 탐하지 않는다라… 저의 얕은 식견으로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아직 저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요.”

봐라. 개떡같이 말해도 감탄하는 신도들을!

은유와 상징은 딱히 없지만, 그냥 핥짝이라서 그런 거다.

자고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교단에 빠져 있는 이들은 그런 쪽으로밖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거 같다.

이런 감동을 본인들만 느낄 수 없는지 신도 하나가 핥짝이에게 말을 걸었다.

“어떠십니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샘솟지 않습니까? 새내기 신도님?”

“새내기 아니라고. 속에서 뭐가 올라오기는 하네. 열불이 그냥!”

“뜨거운 열정이 솟아나셨군요! 좋은 자세입니다. 자자, 그 마음 그대로 정식 신자가 되기 위한 절차를 진행해 보죠.”

역시 사이비. 그 찰나에 영입을 시도하네. 감탄이 절로 나온다.

물론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들어갈 핥짝이도 아니거니와…….

“급할 거 없다. 이번 새내기는 내가 직접 교육하지. 등반가 신도는 늘어날수록 좋으니.”

“아이고, 상급자님께서 나서 주신다면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성물로 안내해라.”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자연스럽게 핥짝이를 데리고 이동했다.

슬쩍 속도를 늦춰 신도들을 먼저 보내고 핥짝이와 함께 복도를 걸었다.

쿡. 내 옆구리를 찌르는 녀석.

“너, 두고 봐. 진짜.”

“이게 다 NPC들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결코 내 의지가 아니었지. 그럼 그럼.”

“나도 본의 아니게 때릴 거 같은걸?”

“…나 대신 탈모맨을 때리는 건 어떨까?”

“말이 되는 소릴! 아오, 그냥!”

잡담을 나눈 것도 잠시.

“그래서 지금 뭐 하는 건데.”

핥짝이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봤다.

설명은 해 줘야지.

등반가들 사이었으면 그냥 메시지를 보냈겠지만 여기서는 안 된다.

커뮤니티를 켜면 NPC들에게도 보이니까.

핥짝이에게만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답을 줬다.

“여기서 신성력 얻을 필요 없어. 뒤가 구려.”

“구려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위에 올라가면 얻을 수 있대. 자세한 건 나중에. 지금은 성물을 훔쳐야 돼.”

대화는 여기까지. 뒤따라 걷고 있자니 신도들이 뒤돌아본다.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여깁니다. 관리는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건 제대로 살피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지.”

66층 교단의 성물은 수정.

보랏빛 나는 수정에는 천사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물건이었으나 성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가 높다.

음수대 안에 놓인 것이 신성력이 깃든 물을 신도들한테 먹이는 느낌.

잘은 몰라도 대단한 물건일 게 분명하다.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권능을 발휘했다.

-츠즈즈즈

조금씩 드러나는 정보.

난 세세하게 집중해서 내용을 읽었고.

“허허허, 이야. 이것 봐라?”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신성력 저장수정 (AA)]

-물속에 넣어 두면 신성력을 뿜어내는 구색 갖추기용 성물.

-오랫동안 복용하면 신성력이 늘어날지도?

-천족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은 효과가 더 뛰어납니다.

-신성력을 주입한 자의 마음에 따라 생성된 신성력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 주의!

이게 무슨 성물이야. 그냥 보조 배터리지.

가성비 좋게 운영하네. 제대로 된 성물을 왜 만드냐. 충전해서 쓰지. 제2 천계 재밌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마지막 설명이 대박이다.

변심에 따라 신성력이 사라질 수도 있다?

줬다가 뺏는다는 거 아니야. 동시에 교단에서 벗어나기 힘든 굴레기도 하다.

어쩐지 여기 신도들도 NPC인데 신성력이 이 모양인가 했다.

‘여길 관리하는 천족이 신성력을 조절하고 있는 거야.’

감질나게 조금씩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말이지.

말 잘 들으면 더 올려 주고 아니면 내리고.

신전 지붕에 묶여 있던 케드락이 착용한 구속 아이템을 봤을 때 눈치챘어야 했다.

그 아티팩트도 신성력을 주입해 작동되는 구조였으니까.

“여기, 한잔하시지요. 크흠! 거기 신입도 조금 챙겨 주겠습니다. 원래는 어느 정도 연차가 쌓여야 한 모금 겨우 얻어 마실까 말까 하는 건데. 상급자님도 오셨으니 특별히 주는 겁니다.”

“이것만 잘 마셔도 몸에 신성력이 생긴단 말입니다.”

“신앙심이 부족하면 신성력이 줄어들 수 있으니 교단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해요.”

허접한 성물 담근 물을 떠 온 안내자가 나와 핥짝이에게 황금잔을 건넸다.

어디서 개수작을.

개수작은 아닌가. 이 사람들도 모르는 눈치다. 알면 이렇게 안 있겠지.

어? 잠깐만.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만. 먼저 할 게 있다.”

-촤아악

물을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입을 떡 벌리는 신도들.

“사, 상급자님! 아무리 천족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이 귀한 것을 어찌!”

“담당 천족께서 보시면 어떤 벌을 내릴지 모릅니다!”

“천족 같은 소리하네.”

발음에 악센트를 주며 음수대에 손을 뻗었다.

[제2 천계 천족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칭호, 성물 약탈자가 빛납니다!]

-쩌어어엉!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손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의 수정.

“저, 저걸 어떻게! 천족분들만 만지실 수 있으실 텐데!”

“설마 천족? 분명 등반가인데 무슨 수로!”

신도들이 경악했지만 무시했다.

충격적인 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난 그대로 신성력을 주입했다.

-우우우우웅!

거세게 진동하는 성물.

이미 들어차 있는 신성력이 내 신성력을 거부하고 있다.

쉽게는 자리를 비켜 주지 않겠다는 거겠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

성물을 쥔 채 신도들을 바라봤다.

동시에 안개 질주와 망자귀환, 밤을 부르는 자 칭호를 사용해 버프를 둘렀다.

[밤이 찾아옵니다.]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한순간 어둠에 잠기는 신전.

댄싱 마스터 왕관 위로 얼음과 불의 신전에서 뺏어온 마그나로크의 왕관을 썼다.

[SSS급 아티팩트,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를 착용합니다!]

-구구구구구궁!

-파아아아앗!

이어 날개를 펼쳤으니 어두운 공간, 홀로 빛나는 나의 모습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신성력.

천사 날개의 효과로 지금, 이 순간 내 신성력은 천족조차 경외할 만한 수준에 도달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는 것도 잠시.

“오오. 오오오오!”

“이 무슨… 진정한 천사의 강림이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신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고.

[수정 내부의 신성력을 몰아냅니다.]

[새로운 신성력이 주입됩니다.]

힘의 차이를 버티지 못한 수정이 기존의 신성력을 버리고 내 신성력을 받아들였다.

신도들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너희는 속고 있다. 다섯 날개는 잘못되었어. 난 얼음과 불의 교단에서 온 팔라딘이다.”

[칭호, 잊힌 교단의 팔라딘이 빛납니다!]

더욱 강해지는 신성력.

거짓말은 아니다. 어찌 됐든 명예 팔라딘이기는 하니까.

“설마 그 고대에 존재했다는!”

얼음과 불의 교단을 알고 있는지 신도 한 명이 번쩍 머리를 들었다 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다는 모습.

난 내 신성력이 차오른 성물을 물에 담갔다.

-화아아악!

기존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빛나는 물.

난 황금잔에 물을 떠 그에게 내밀었다.

“이곳은 너희를 이용할 뿐이다. 진정한 신성을 원하거든 이곳을 벗어나 얼음과 불의 교단을 따르라. 그리고 복수하라. 너희를 농락한 자들에게 대가를 받아내라.”

“아아!”

조심스럽게 잔을 받아든 신자가 떨리는 눈으로 날 바라봤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을 질끈 감으며 물을 삼켰다.

[신성력 저장수정 (AA)의 효과!]

[상대방에게 신성력을 전달하시겠습니까?]

[막대한 신성력!]

[흡수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바로 성물의 효과가 발휘된다.

‘흡수량 최대로.’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리자 신도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미약한 신성력과는 전혀 다른 수준.

그 변화를 눈치챈 건 주변에 있던 신도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가장 확실하게 체감한 건 말할 것도 없이 물을 마신 NPC 본인.

-떨그렁

몸을 타고 흐르는 신성력에 감복한 신도가 잔을 떨궜다.

이어 바닥에 엎드렸으니.

“얼음과 불의 교단과 함께하겠습니다!”

[칭호, 잊힌 교단의 팔라딘이 더욱 빛납니다!]

[새로운 신도의 등장에 얼음과 불의 신선의 두 기둥이 크게 기뻐합니다!]

[칭호가 업그레이드됩니다.]

[칭호, 부활한 교단의 성자가 생성됩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두 기둥은 말할 것도 없이 19층의 주인 휴고 아르테와 29층의 주인 마그네타 프랫이겠고.

생각보다 뜨거운 반응.

난 다른 신도들도 굽어봤다.

“나를 따라올 자가 더 있느냐.”

대답이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고.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다섯 날개를 버리고 얼음과 불의 교단에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를 우롱한 이들에게 천벌을!”

다른 신도 모두 머리를 박았다.

성물을 훔치는 김에 교단도 같이 훔치면 좋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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