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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316화 (316/740)

316화 끼루룩

콰창!

파비안과 데이본드의 연결 고리가 깨지며 놈의 몸이 크게 들썩거렸다.

-푸화아아악!

입, 코, 눈 할 거 없이 마기가 빠르게 빠져 나간다.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을 뽑아내듯 격렬하게.

시커멓게 물들었던 피부가 원래의 색을 되찾았으며, 세로로 찢어졌던 눈동자가 아물었다.

빼곡했던 송곳니가 무뎌졌으며, 두 개의 음성이 겹쳐졌던 목소리까지 돌아왔으니…….

“네놈들을 기억하겠다! 끔찍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끝으로 모든 마기가 휘몰아치다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없어진 마기의 흔적.

남은 것이라고는 무너지기 직전인 공동과 시체처럼 쓰러진 파비안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파비안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월등히 강대한 존재를 받아들인 부담감도 상당했을 텐데, 전투의 여파로 몸 전체가 망가졌다.

애초에 악마의 생명력이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없는 부상이었다.

제대로 숨도 못 쉰 채 바닥에 처박힌 녀석을 그냥 버려 둘까도 싶었지만…….

“죽게 놔두면 안 되겠지?”

“이 고생을 했는데 알아낼 건 모조리 알아내야지.”

“옳소!”

뭐가 됐든 간에 골드 티어의 숭배자와 계약한 놈이다.

생각보다 숭배 집단에 깊게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계약을 하면서 일종의 퀘스트도 받은 거 같고.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위 티어 존재들에게 명령받은 건 분명했다.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

놈이 노리던 건 이거였으니까. 파비안 본인은 사용하지도 못할 물건이니 데이본드가 원한 거겠지.

물건을 받기 위해서라도 파비안은 데이본드가 있는 곳까지 등반을 해야 하고.

이제야 좀 앞뒤가 맞는 느낌이다.

그건 그거고…….

“아,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같은데.”

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힘이 다 빠졌다. 달칸 때도 힘들었는데 어디서 빙의된 악마가 나타나 가지고.

다만 피곤한 것과는 별개로 성과는 많았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골드 티어부터는 빙의가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놈들의 힘 또한 겪을 수 있었다.

예상하건대 골드 티어는 무조건 90층 근처까지 오른 놈들이다. 못해도 80층대 중후반까지는 올랐던 이들이겠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 난 이미 NPC들과도 싸워 본 전적이 있다.

99층까지 올랐던 알리오스와 대련했고, 49층에서 만났던 노역소장 메글릿과도 싸웠다. 메글릿도 90층을 넘어선 괴물이었지.

당시에는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둘과의 수준 차이가 커서 객관적인 판단이 안 되기는 하다만 최근에는 좀 비교할 대상이 생겼다.

‘61층에서 만난 테일러와 64층에서 만난 수인들.’

체감상 내 수준은 대략 70층대 초중반 정도.

순간 화력이라면 더 될지 몰라도 평균적으로는 이 정도인 거 같다.

80층대랑 비교하는 건 조심스럽다. 그쪽부터는 초월자의 영역이라서.

“데이본드, 유헤다.”

내가 알고 있는 골드 티어 숭배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빙의 페널티로 힘 일부가 봉인되었음에도 이 정도면 본신의 힘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안 된다.

[버프 종료]

[신성력 스텟이 900을 넘지 않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 (SSS)’가 해제됩니다.]

-츠즈즈즈즈

망자귀환 버프가 끝나며 천사의 날개가 사라졌다.

스킬형 아티팩트라고 했던가. 펠라인 세트 스킬을 쓰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다.

충만했던 신성력이 사라지며 탈력감이 느껴졌지만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는다.

아무튼…….

“이겼다!”

누운 상태 그대로 소리 질렀다.

다른 복잡한 걸 떠나서 나보다 강한 대상을 이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래서 헌터들이 파티 사냥을 하는 건가. 다구리 최고다!

“스으으응리이이!”

“악마 쉐키, 담에 걸려 봐 그냥!”

“그에에에!”

탈모맨과 핥짝이도 환호성을 지른다.

덕춘이도 마찬가지.

잠깐만, 덕춘아. 너 이번엔 좀 활약이 없지 않았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물끄러미 덕춘이를 바라봤고.

“그에에.”

덕춘이가 앙증맞은 주먹을 흔들었다.

그치, 우리 덕춘이는 응원만 해도 최고지. 그럼 그럼.

따지고 보면 탈모맨이 당했을 때 치유도 해 주고 다 해 줬다.

아무튼…….

“급한 불은 다 끝난 거 같고, 파비안은 어떻게 하지. 한동안은 심문 못 할 거 같은데.”

상태가 워낙 안 좋아서.

그냥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코인이 있다면 60층으로 떨어질 거고 다시 기회가 있겠지만 코인이 없다면? 탑 밖으로 나가게 될 거고 탑 안에서 놈을 심문할 기회는 사라진다.

조금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엘릭서를 꺼내 놈에게 먹였다.

포션도 상처에 좀 뿌려 주고.

“파비안은 우리가 관리하지, 브로. 한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정보를 캐내면 될 거야.”

시선을 위로 돌렸다.

[달칸이 봉인에서 깨어날 때까지 남은 시간 -134:34:52]

[봉인 해제와 동시에 빛의 도시가 사라집니다.]

대충 6일 정도는 빛의 도시가 유지될 거다.

달칸이 봉인에서 풀려나야 다른 사람들도 65층을 클리어할 테니.

우리야 좋지. 괜히 시간 낭비할 거 없이 등반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좋아. 알아낸 거 있으면 연합에 이야기해 주고.”

“세세한 거 하나하나까지 다 말해 줄 테니 걱정 마.”

이지키일에게 그러라며 손짓했다.

“아, 브레드는 통로 쪽에 응급 치료 해 놨으니까 챙겨.”

“신세를 졌군.”

“신세는 무슨, 나도 좋은 거 얻었는데.”

손바닥으로 파닥거리는 시늉을 했다.

천사의 날개. SSS등급 아이템. 심지어 귀속 아이템이다.

한번 착용하면 끝이라는 것. 상황을 보아하니 이지키일도 천사의 날개를 노렸던 게 뻔했다.

“어쩔 수 없지. 오필리아한테 쓴소리 좀 듣겠는걸. 그래도 뭐, 오른쪽 날개도 있으니까.”

“아, 오필리아. 그럼 너희가 여기로 들어올 수 있던 것도?”

“예쓰. 오필리아가 도움을 줬지.”

어쩐지. 신성력도 없는 애들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나 했더니만 오필리아가 도움을 줬던 건가.

그 콧대 높고 위계질서 철저한 천족들이 아끼는 존재가 오필리아다. 신성력 스텟이 900을 넘는 사람이기도 하고.

얘네는 그렇다 치고. 파비안은 데이본드 덕에 들어올 수 있던 거겠지. 원하던 물건이 있던 만큼 무슨 조치를 했어도 했을 거다.

일단은 좀 쉬자. 한계까지 싸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탈모맨도 고생을 많이 했고, 그나마 멀쩡한 핥짝이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이지키일과 브레드는 들어올 때부터 중상이었으니 말 다 했지.

천사의 통로로 들어올 사람이 더 없는 지금이 휴식하기 최고의 적기였다.

* * *

몸을 회복시키는 데 무려 이틀이 걸렸다.

덕춘이의 집중 케어가 있었음에도 이 정도. 그만큼 몸에 부담이 많이 갔다는 거겠지.

쉬는 중간중간 포션도 제작했다.

이번에 포션 대부분을 사용해서 앞으로 등반에 필요한 것들을 수급하기 위함.

핥짝이가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대체 이런 건 왜 만드는 거야?”

“어허, 무엄하다! 네가 맛없어 포션과 악취 포션의 위대함을 아느냐!”

“위대한 거까지는 모르겠고 위험한 건 알겠는데. 으으. 보기만 해도 울렁거려.”

맛없어 포션에 당한 적이 있던 만큼 진저리를 치며 피했다.

포션은 포션대로 만들고, 천사상 조각은 헬다잉 키친을 통해 프램버그에 보냈다. 연락한 김에 식재료를 사서 요리도 좀 하고.

“오우, 무지개. 이게 뭐라고? 맛있는데!”

“그거 코리아 믹스스튜야.”

“코리아 믹스스튜. 탑 밖으로 나가면 꼭 한국에 들러서 먹어야겠어!”

응. 짬탕이야.

다른 요리 하고 남은 걸로 대충 끓여 줬는데 의외로 입에 맞는 모양.

나야 자투리 버릴 필요 없고 좋지.

[요리 (B) Lv.2]

요리도 어느새 B등급까지 올랐다.

전만 해도 요리해 먹으면 소화 스킬이 자동 활성화됐는데. 장족의 발전이랄까.

처음에는 의심스러워하던 핥짝이도 지금은 마음 놓고 먹는다. 탈모맨과 브레드는 말할 것도 없고.

파비안은 아직까지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라 포션이랑 죽을 섞여서 먹이고 있었다.

“슬슬 가 볼까?”

준비도 어느 정도 끝난 상황.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

내 말에 탈모맨도 의욕적으로 일어났다.

“좋지. 사람이 밥만 먹고 누워 있으면 소가 된다고 했어!”

“소가 아니라 돼지가 되겠지.”

“…오, 돼지가 되지.”

“뭐이 씨, 뒈지고 싶어?”

핥짝이가 숟가락을 들자 탈모맨이 내 뒤로 숨는다.

아니, 너 안 가려진다니까. 나보다 크다고.

말싸움을 끝내기 위해 탈모맨을 핥짝이한테 넘기고 덕춘이를 챙겼다.

탈모맨의 배신당한 눈빛을 보냈지만 외면했다.

‘예상보다 65층에서 오래 보냈어. 상황이 바뀌기 전에 준비해야겠지.’

데이본드와 전투를 치렀고 퇴치하기까지 했다. 숭배 집단과 확실히 척을 졌다는 뜻.

앞으로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짐작하기 힘든 만큼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더불어 숭배자들에 대한 정보도 공개해야 하고.

분명 우리뿐만 아니라 쁘찡 연합과 빅스타 길드도 노릴 거고, 오필리아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도 예외는 아닐 거다.

이지키일이 파비안의 심문을 마치는 시점에 탑 숭배 집단에 대해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구체적인 일정과 과정은 이준석에게 일임한 상황.

자꾸 일을 주는 거 같지만 어쩌겠나. 연합을 만든 사람이 고생해야지. 내 정신 건강의 복수 아니, 정당한 일거리다.

암, 그렇고말고.

“우린 가 본다. 수고하고.”

“오케이, 브로. 다음에 보자고.”

“신세 많이 졌습니다, 쁘찡 연합분들.”

이지키일과 브레드와 인사를 나누고 빛의 도시를 빠져나왔다.

“으읏차! 역시 사람이 빛을 보고 살아야 해.”

“그에에.”

공동 안에만 있다 나와서 그런가 햇빛이 따사롭다.

탑이 다른 건 몰라도 자연 경관은 참 좋단 말이야.

우리는 갈림길에서 멈춰 섰다.

각자 포탈이 생성된 위치가 달라서 여기부터는 따로 움직여야 한다.

어차피 66층에 들어서면 랜덤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흑흑. 다들 건강해야 해. 나 없어도 밥 잘 먹고 울지 말고.”

탈모맨이 우는 시늉을 하며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손수건을 흔들었다.

“그럴 일 없으니 손수건 치워라.”

“보타이도 그렇고 저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신사의 기본이지. 하하하!”

내가 알고 있는 신사와 다른 단어인가?

모르겠다. 해맑으니 됐지.

호탕하게 웃은 탈모맨이 포탈로 향했고.

“66층부터 다시 시작인가. 70층에 가장 먼저 올라가는 건 나다!”

“가장 늦게 65층에 올라온 사람 손.”

“공블아이, 온 천하에 이름이 외쳐지고 싶어?”

“언제나 핥짝 님의 평온한 등반을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잘해. 나도 간다.”

핥짝이도 손을 흔들고 자리를 떴다.

나 역시 포탈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웅

나를 반기는 포탈.

66층에는 또 뭐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

탈모맨과 핥짝이도 올라가니 여차하면 같이 움직일 수도 있을 거고.

기분 좋게 포탈에 들어가려는 순간.

“끼루루룩!”

새소리가 들렸다.

끼루룩? 어째선지 낯익은 소리.

하늘을 올려다보니 갈매기가 보였다.

바다도 없는 곳에 웬 갈매기인가 싶었으나.

“설마?”

짐작 가는 게 하나 있었다.

탑에 존재하는 여러 집단 중 하나.

NPC들의 우체국과 같은 곳.

갈매기.

내 예상이 맞는 거 같다. 평범한 갈매기가 넥타이를 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누군가 내게 연락을 준 건가. 등반가가 갈매기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다고 들은 거 같은데.

확인해 보면 알겠지.

난 녀석이 내려앉을 수 있게 손을 내밀었고.

“아, 감사합니다. 이블아이 되십니까? 갈매기에서 나온 갈매기라고 합니다. 편하게 갈매기라고 불러 주세요.”

갈매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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