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천사의 통로
달칸을 봉인한 곳을 보던 난 핥짝이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어떤 것이 있을지 가늠이 안 돼 미간을 찌푸렸지만.
“성물?”
예상외로 험악한 무언가가 아닌 성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홀 너머의 공간. 거리가 있어 작게 보이기는 했지만 성물이 틀림없다.
“어, 저거 성물 맞지? 그래. 어쩐지 밖에 아무것도 없더라!”
“후후후. 미래의 소개팅을 대비해 목걸이라도 챙겨야지.”
의욕을 다지는 핥짝이와 탈모맨.
여기까지 왔는데 성물은 챙겨야지.
“넌 안 가냐?”
“먼저 가 있어. 난 여기 좀 둘러보고.”
“나중에 좋은 거 없다고 뭐라 하지 마라.”
핥짝이가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쿡 찌른다.
피식 웃으며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어차피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성물들이 그대로 있잖아. 별 볼 일 없거나 가져가는데 제약이 있다는 거겠지.’
척 봐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는 성물이 벽에 전시되어 있다.
비슷한 광경을 봤었다. 얼음과 불의 교단 유적.
그때도 시련을 통과하고 자격이 있는 사람한테만 유물을 줬었지.
이미 신전에는 우리 말고도 파비안과 이지키일 무리가 들어와 있다.
유물을 챙기려 했다면 진작에 챙겼을 거다.
“다시 봐도 끔찍한 곳이야.”
성물을 향해 달려가는 탈모맨과 핥짝이를 바라보다 홀에 시선을 던졌다.
뿔이 박힌 홀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실상을 몰랐다면 조금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갔겠지만 난 아니니까.
심지어 이곳과 관련된 NPC를 직접 만났다.
“여기 어디에 쉐핀의 뿔도 하나 있겠지?”
“그에에.”
쉐핀이 어째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는지는 알 것 같다.
어째서 동상 속에 천사는 뿔이 2개였는지도, 왜 쉐핀의 뿔이 하나뿐인지도.
잘렸으니까.
잘려서 사람들의 숭배를 받기 위한 제단의 재료로 쓰였으니까.
천족은 숭배를 받고 싶어 한다. 단순한 우월감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찬양받고 싶어 하는 게 다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쉐핀이 흘러 지나가듯 말하기는 했지만.
‘신앙 덕에 먹고 산다고 했었단 말이지.’
난 기억하고 있다.
제2 천계는 교단까지 있다. 다섯 날개라고 했었나.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오르골. 그 안에는 천사가 준 청혼 반지가 있었고,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메루가의 청혼 반지 (AAA)]
-천족을 섬긴 왕국 잉그리옴.
-교단, 다섯 날개의 신도 엘리는 천사를 만났습니다.
-메루가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 아이템 때문이라도 천족들의 집단, 하얀 나무에 가기는 해야 한다.
들어가기 위한 물건도 있다. 켄락의 유골을 수습하면서 목걸이를 얻었으니까.
이건 이거고.
이전, 쉐핀의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물건들을 꺼냈다.
[천사의 뿔 단검 (S)]
-제2 천계 천사의 뿔로 만든 단검.
-강력한 신성력을 지닙니다.
-마魔를 가를 수 있습니다.
천사의 뿔로 만든 단검.
봉인 시설만이 아니라 이런 걸 만들 때도 뿔을 사용한다는 건가. 등급도 상당하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게 이건데.
[날개 없는 천사의 깃털 (AAA)]
-제2 천계 천사가 사망 시 남기는 깃털 중 하나.
-강력한 신성 무구를 만드는 재료!
-제2 천계에서는 깃털에 영혼 일부가 담겨 있다고 전해집니다.
-동족에게 가져다주면 깃털 주인에 따라 대접을 받을지도?
깃털.
설명에도 나와 있다시피 날개 없는 천사의 깃털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동상에 있던 천사는 뿔도 멀쩡하고 날개도 있었단 말이지.”
날개가 왜 있을까?
이번에도 빼앗겼나? 그건 아닌 거 같다. 아이템 이름부터가 날개 없는 천사의 깃털이니까.
제2 천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에는 엮이게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의 중앙. 달칸을 봉인한 수정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영원한 밤의 야수, 달칸을 봉인하기 위해 714명의 천족이 희생하였다.]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라.]
희생. 숭고.
눈살을 찌푸리며 권능을 사용해 홀에 박힌 뿔들을 살폈다.
[데드 판의 뿔]
-뿔을 대가로 가족의 안위를 약속받았습니다.
-가족은 지금 어디 있을까요?
[헤멘의 뿔]
-뿔을 대가로 빈민가에서 벗어났습니다.
-빈민가 출신이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릭 베스몬의 뿔]
-뿔을 대가로 처형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누명을 씌운 자는 누구일까요?
하나같이 찜찜하기 그지없는 설명들.
이걸 자발적으로 받았다고 해야 할까. 희생이 맞기나 할까.
찬찬히 뿔을 바라보기를 몇 분.
[쉐핀의 뿔]
-귀족에 거스른 죄로 뿔이 뽑혔습니다.
“찾았다.”
난 쉐핀의 뿔을 찾을 수 있었다.
단검을 쥐었다. 똑같은 신성력이 깃든 물건이니 뜯어낼 수 있겠지.
[달라붙기 (A) Lv.1]
벽을 타고 올라 벽에 박힌 뿔 주변을 긁어 냈다.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으나 못 떼어낼 수준은 아니었고.
-쩌적
기어이 뿔을 뽑아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쉐핀에게 돌려줄 생각이다.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에 안 드는 건 안 드는 거니까.
주인한테 돌려줘야지. 힘든 일도 아니고.
오징혁도 그렇고 60층에 올라온 사람들이 몇 있다. 개인 거래로 넘긴 다음 등반하는 김에 전해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타이밍.
[당신은 레지스탕스 일원들의 호감을 받고 있습니다.]
[히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뭐야?”
메시지가 떠올랐다.
언제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모르는 게 히든 퀘스트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지는 몰랐는데.
[이 뿔이 네 뿔이냐?- 히든 퀘스트]
-제2 천계의 천족들의 신성력은 뿔에서 나옵니다.
-뿔이 뽑힌 천족들의 미래는 암담한 법!
-더욱 밑바닥으로 떨어진 이들은 뭉쳤고 레지스탕스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뿔을 돌려주는 건 어떨까요?
-보상: 레지스탕스 하얀뿔과의 접촉 후 결정(연계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레지스탕스와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연계 퀘스트로 이어진다라.
그것만 보면 끌리기는 하는데.
“레지스탕스랑 엮이게 된다는 거군.”
이 부분이 조심스럽다.
만약 이 퀘스트를 받아들인다면 귀족 신분 천족으로 이루어진 집단, 하얀 나무와는 안 좋은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할까.
난 잠시 고민했고.
“수락한다.”
그러기로 결정을 내렸다.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어차피 모든 집단과 친해질 거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럴 거였으면 대형 길드에 들이박지도 않았지.
이미 우호적인 집단도 가지고 있고, 따지고 보면 나도 한 집단의 수장이다.
귀족 천사들은 인간을 얕보고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고 했으니 제대로 된 퀘스트를 진행하기 힘들지도 몰랐다.
“해보자고.”
[탑에 존재하는 이들의 뿔이 표시됩니다.]
우우우웅.
몇 개의 뿔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700개가 넘는 뿔을 모조리 뽑지 않아도 되는 모양.
하기야 뿔을 빼앗긴 천족 전원이 NPC가 되지는 않았겠지.
대충 세어 보니 30개가량이다. 이 정도면 금방 한다.
-서걱
-그그그극
팔을 걷어붙이고 빛이 나오는 뿔을 모조리 뜯어냈다.
[봉인이 불안정해집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봉인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은 65층. 우리가 포탈을 넘어가면 달칸은 봉인에서 풀려나게 되어 있다.
그래야 다음에 올라온 사람들이 달칸을 상대로 층을 클리어할 수 있지.
일단 챙기기는 다 챙겼는데.
“어떻게 다 보내지?”
이 많은 수의 뿔의 주인을 어떻게 찾아줄지가 문제다.
당장 천족도 본적이 거의 없는데.
뭐,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릴카나 헬다잉 키친을 통해서 해도 되고, 영 안 되겠다 싶으면 화조국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이건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구경 좀 해 봤냐?”
성물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내가 히든 퀘스트. 그것도 연계 퀘스트를 얻었다는 건 꿈에도 모를 두 녀석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얻기는 얻었는데 영 별론데?”
“후후. 난 만족하지. 짜잔!”
탈모맨이 자랑스레 성물을 들어 올렸다.
큐빅이 박힌 목걸이.
[숙면의 목걸이 (B)]
-잠이 보약!
-착용 후 잠들 시 상태 이상이 완화됩니다.
-체력 회복 증가.
그냥저냥 무난한 물건이다.
생긴 건 좀 예쁘네. 척 보니 성능보다는 선물용으로 고른 거 같고.
반면 성능을 중시하는 핥짝이는…….
“말이 돼? 고작 하나만 가져가라는데 등급이 이 모양인 게? 이게 제일 높아.”
[하이 프리스트의 숭배 반지 (AA)]
-신성력을 머금고 있습니다.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사악한 효과에 저항합니다.
-뾰족해서 맞으면 아플지도.
“AA등급이면 그리 낮은 것도 아니구만.”
“60층대 유적에서 얻은 것 치고는 아쉽다고.”
그 말도 맞지. 슬슬 S급 아이템도 하나둘 맞췄을 테니까.
나도 AA급 아이템은 상당히 많은 편이고.
장비 같은 경우에는 만들 수도 있다. 시간과 재료가 좀 들기는 하지만.
“신전은 여기까지인가 본데.”
“너 없는 동안 더 둘러보기는 했거든? 텅 비어 있어.”
“하나만 빼고 말이지.”
“아, 거긴 못 들어가잖아.”
두 녀석의 말대로 주변을 살펴봐도 더 볼 만한 곳이 없다.
몇몇 신도들과 사제들이 지내는 용도로 보이는 방과 예배실 정도.
그 외에는 잡다하게 사용되는 다용도실과 창고가 전부.
신전 밖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다.
그런데…….
“못 들어가는 방이 있다고?”
“이쪽에. 내가 발견했지!”
탈모맨이 복도 한쪽에 세워진 천사상을 밀었다.
드러나는 문 하나.
[천사의 통로.]
[신도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격을 증명하시오.]
“나도 한번 도전해 봤는데 안 되더라. 신성력 스텟이 800은 넘어야 통과할 수 있다는 거 같은데. 다른 방법이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천족은 기본 신성력이 700이 넘는다. 일반적인 경우로는 절대 사람이 가질 수 없는 수치.
그걸 넘어 800을 요구한다는 건 어지간하면 못 간다는 거지.
자격을 증명하라는 것도 그런 뜻인 거 같고. 아니면 탈모맨 말대로 다른 물건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증명을 하든가.
하지만 난 귀찮게 그럴 필요가 없다.
-구구구구궁
문을 밀었다. 육중한 문이 조금씩 움직인다.
[신성력 스텟이 800을 초과합니다.]
[자격 증명 완료]
“너, 진짜 800이 넘었다고?”
“진짜라니까. 말하면 믿어라 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그랬지. 대체 뭘 하고 다녔길래.”
입을 딱 벌리는 핥짝이.
“나도 800은 안 되는데? 역시 공, 읍읍!”
“어허! 무엄하다! 공듀의 ‘공’자도 꺼내지 말고 더욱 정진하거라, 탈모맨아.”
감탄하는 척 금기 단어를 말하려는 녀석의 입을 틀어막고 안으로 들어갔다.
두 녀석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내밀어 봤지만.
[자격을 증명하시오.]
[진입할 수 없습니다.]
“칫. 더러운 세상.”
역시나 안 됐다.
어, 잠깐만. 러브 앤 피스라면?
난 두 녀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생명수를 먹이는 건 덤.
[러브 앤 피스 (S) Lv.10]
최대 레벨까지 도달한 러브 앤 피스와 800대를 넘어가는 신성력 스텟, 거기에 생명수까지 합치면.
[자격 증명 완료]
[동행자 자격 증명 완료]
[동행자 자격 증명 완료]
“오오오오오! 이블아이! 이블아이!”
“믿고 있었다! 이! 블! 아! 이!”
동행자 자격으로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럴 때만 이블아이지 요것들아.
뭐라 한마디 하려다가도 헛웃음이 나와 고개를 저었다.
야광석이 박힌 통로.
우리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고.
흠칫. 자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가락을 입가에 댔다.
통로 끝.
치명상을 입은 브레드가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