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06화 (306/740)

306화 오늘만 사는구나?

탈모맨의 기습 공격에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면 괴상한 옷차림의 등반가 2명으로 늘어나서 질색하는 건가.

“크르르릉, 퉷.”

얼굴을 얻어맞은 달칸이 낮게 울며 몸을 돌렸다.

잠깐만, 저거 방금 침 뱉은 거 맞지?

짜증이 물씬 섞인 얼굴로 날 한번 뒤돌아본 녀석이 훌쩍 뛰어 산을 타고 사라졌다.

살짝 찜찜했지만 뭐, 대거리하는 것보다는 낫지.

멀어지는 녀석을 향해 손을 살짝 흔들어 주고, 여전히 타이즈를 입고 있는 녀석을 바라봤다.

“넌 진짜, 와…….”

진짜 이 꼴로 탑을 오르고 있는 건가.

나도 콘셉트가 확실하지만 이 녀석도 제정신은 아니야.

“음하하핫! 눈치챘나? 오랜만에 꺼내 입었는데, 처음에 입어서 그런가 이게 가장 마음에 들더라고.”

“크로마키 쫄쫄이?”

“크, 뭐?”

“아니야.”

시선을 돌렸다. 등반 초기에 입던 초록색 타이즈를 착용한 녀석.

여기가 60층대인 건 알고 있는 걸까. 보통은 어떻게든 스펙을 높이려고 발버둥 치는구만 얘는 이러고 있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걸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이템 빨을 잘 못 받는 걸 수도 있겠군.’

녀석이라고 멍청이가 아니다. 아니, 가끔 멍청이 같을 때도 있기는 한데 아무튼.

뭐라 하기에는 능력이 출중하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것보다…….

‘방금 탈모맨이 나섰을 때 신성력이 느껴졌던 거 같은데.’

찰나의 순간이어서 확실치는 않다. 내가 달칸과 싸우며 신성력을 많이 써서 착각한 걸 수도 있고.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너, 이 자식! 내가 공듀라 부르지 말랬지!”

난 놈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동네방네 다 들리게 공듀라고 소리치는 건 그 자체로 공포였다.

핥짝이랑 냥펀은 공블아이라고 놀릴지언정 대놓고 공듀라고 하지는 않는데 이놈의 자식은!

“아아아악! 왜! 공듀는 공듀야! 여전히 공듀는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지금이라도 말해, 넌 이블아이고 공듀는 따로 있다고! 그렇다고 말해 줘. 여전히 공듀는 커뮤니티에서 살아 숨 쉰단 말이야!”

“살아 있으니까 숨을 쉬지. 그래, 죽자. 좀 죽어라, 자식아!”

“낭만은 죽지 않는다!”

악! 억! 악!

한참을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지쳐 숨을 골랐다.

이놈 자식, 순순히 현실을 받아들인 줄 알았더니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네.

“아, 맞다. 공듀, 나 소개팅은? 공듀를 잊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아아아, 나의 순정이!”

“…조인족 괜찮냐? 64층에서 치킨맨이 구애 중인 공작새랑 앵무새가 있다고, 오케. 표정 풀어. 농담이지. 64층에 있는데 어떻게 만나.”

“그치? 나 방금 매우 섭섭할 뻔했어.”

역시 이건 안 되나.

곤란하다.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 탑에서 생긴 인연도 있지만…….

‘생각해 보면 다 커플 됐네.’

김소담은 오징혁과, 30층대에서 만난 최영미는 고대진과 만나고 있다.

등반가 중 여성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

어느 정도 올라오면 본인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위로 향할 수 있지만, 튜토리얼 구간은 진짜 생으로 들이박아야 해서.

슬쩍 탈모맨을 흘겨봤다. 기대 가득한 눈빛, 눈망울이 너무 맑아 사실 소개해 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기가 힘들다.

“공듀, 나 모쏠이야. 세상 개판 되고 땀내 나는 94 특임대에서 평생 구르다 탑으로 들어왔다고. 내 첫 시작이 너에게 달렸어. 시작이 망하면 내 순정이 공듀의 이름을 세상에 외칠지도 몰라.”

맞다. 이 녀석 특임대 출신이었지. 자연스럽게 협박하고 있어, 탈모맨 자식.

손톱을 물어뜯었다.

없나, 진짜 없나?

오필리아? 아냐, 그리 친하지도 않고 사명감에 움직이는 사람이다. 소개팅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터.

그럼 누가 있지? 아는 여자가 없는데.

NPC도 괜찮으면 릴카한테 물어볼까. 외로운 NPC 있냐고.

“그, 그보다 언제 올라왔냐?”

도무지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은근슬쩍 주제를 바꿨다.

“몰라, 대충 하루쯤 지났나? 이틀은 안 지났어. 커뮤니티에 올렸는데 못 봤나?”

“볼 시간이 없었거든. 저 녀석이랑 싸우느라.”

턱으로 달칸이 사라진 곳을 가리켰다.

커뮤니티도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거지 이럴 때는 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이 녀석도 참 대단하단 말이야. 어떻게 이 속도로 등반을 하면서 커뮤니티에서 살 수가 있지?

다른 녀석들도 커뮤니티를 곧잘 하지만 이 녀석은 볼 때마다 있다.

심지어 아직 60층대 공략은 다 올리지도 않은 상황. 스스로 돌파하면서 커뮤질을 했다는 건가?

물론 64층의 경우 대림원과 협약을 체결했으니 비교적 쉽게 올라왔겠다마는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였다.

탈모맨보다 빨리 60층에 도착한 냥펀과 핥짝이가 아직 65층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어쨌든 올라온 지 얼마 안 됐다라…….

“네가 아니었군. 하긴 너였으면 소속 불명 헌터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소속 불명?”

“어. 너, 혹시 올라와서 헌터 못 봤냐. 연합도 아니고 빅스타 길드도 아닌 사람. 그 사람을 찾고 있어. 65층 공략에 필요해.”

“아아, 알지.”

“안다고?”

“하하하! 그럼. 내가 미리 안면 터 놨다고.”

호탕하게 웃은 녀석이 오망성 안으로 들어간다.

오망성 중앙. 얼굴이 퉁퉁 부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안면을 튼 게 아니라 터트려 놓은 거 같은데.

“왜 저래.”

“아니, 오망성에 들어오니까 다짜고짜 공격하더라고. 안면 마사지 좀 해 줬지.”

건틀렛 낀 그 손으로 말이지.

정신을 잃은 채 팔다리가 꽁꽁 묶인 사내를 살폈다. 연합 표시도 빅스타 길드 문신도 없다.

찾고 있던 사람은 맞는 거 같다.

탈모맨을 공격한 거 보니 연합 사람은 확실히 아니다. 연합 내 탈모맨의 인지도는 대단하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소개팅이 아니더라도 연합 사람 중에서 만나면 되는 거 아니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집어넣었다. 지금은 공략이 더 중요하다.

잠깐 분위기가 샜지만 65층에서 해야 할 일이 많다. 유적, 빛의 도시도 있고 탑 숭배자로 의심되는 파비안도 있다.

[워터 (C) Lv.7]

-촤아아아악

“흐아압! 컥! 뭐야!”

얼굴에 물이 쏟아지자 정신을 차린다.

난 바로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노려봤다.

흑인인 걸 보니 아시아 쪽일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데.

유심히 그를 살폈다.

“확실히 기절해 있었나 보군. 운이 좋아.”

안 그랬으면 처리했을지도 모르는데. 탈모맨 녀석이 외친 걸 들었을 수도 있잖아.

다행히 놈은 진짜 기절했던 모양이다.

상황 파악을 위해 눈알을 굴리는 모습에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소속은?”

“넌 누군데? 팔은 또 왜 묶여. 으아아악!”

꾸욱. 난 녀석의 손가락을 지그시 밟았다.

“탈모맨을 왜 공격했지?”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정체불명. 탑 숭배자일 가능성도 있었으며, 탈모맨을 공격한 만큼 쁘찡 연합에 악감정이 있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너 같으면 쫄쫄이가 미친 듯이 달려오는데 그냥 보고 있겠냐!”

어…….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오망성은 일종의 안전지대. 달칸을 피해 이곳에 도착했는데 척 보기에도 수상한 사람이 돌격해 오면 경계심이 생기기는 하지.

우리한테야 이 사람이 정체불명이지만, 이 사람한테는 우리가 정체불명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즉

[어니 프레릭]

-최고 등반층: 65층.

-닉네임: 자메이카 스윙.

-AA급 권능, 타고난 사냥꾼 보유.

.

.

.

정보가 떠오른다.

권능이 제대로 작동하는 걸 보니 나보다는 약한 모양.

별을 주시하는 눈은 동급 이상의 권능을 가지고 있거나 나보다 수준이 높은 상대의 정보는 제대로 읽지 못하니까.

아프리카계 헌터 같고 소속은 없다. 권능은 낮았으나 기타 사냥에 대한 스킬과 칭호가 많은 편.

크게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없다.

65층까지 올랐으니 고국으로 돌아가면 영웅 대접을 받겠지. 아프리카 쪽은 S급 헌터가 거의 없으니까.

-서걱

단검을 꺼내 팔과 다리를 묶고 있던 줄을 끊어 냈다.

제법 튼튼한 줄을 썼는지 절삭을 사용할 정도.

팔목을 문지른 그가 나와 탈모맨을 바라본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사실 난 죽은 건가? 지옥에 왔다던가.”

“뭔 소리야.”

“무지개에 쫄쫄이잖아. 여긴 탑이라고. 아! 악몽이었군. 아하하하! 등반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거야. 난 또 뭐라고.”

혼자 착각을 한 어니가 다시 바닥에 눕는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제길! 꿈이 아니었어!”

“현실을 직시한 걸 축하한다.”

“공, 흠흠. 이블아이, 이 친구도 정상은 아닌 거 같은데? 가끔 있어. PTSD로 현실 분간 못 하는 애들.”

아냐. 그런 거 아냐, 탈모맨. 그냥 우리 옷차림 때문에 그래.

그래도 무지개가 초록 쫄쫄이보다는 낫지.

“그에에, 엡!”

입을 벌리며 따지려는 덕춘이의 입을 막았다.

아무튼 찾던 사람은 찾았고.

“난 이블아이, 이쪽은 탈모맨. 넌?”

“어니라고 불러라.”

“그래, 어니. 65층 클리어하고 싶지?”

“당연한 말을.”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잠깐의 오해가 있었지만 어찌 됐든 협력을 구할 수 있을 거 같다.

영 아니다 싶으면 다시 묶어서 오망성 안에 던져 두지 뭐.

안에만 있으면 오망성은 작동한다고 하니까.

“65층 클리어 방법은 간단해. 그냥 여기 계속 있어.”

찬찬히 이지키일에게 들었던 공략법을 말해 줬다.

빅스타 길드의 이름값 덕분인가 어렵지 않게 그의 동의를 얻어 낼 수 있었다.

쉽게 위로 올라갈 방법이 있는데 마다할 사람은 없는 법.

“탈모맨, 넌 낮이 돌아오면 나랑 간다. 너까지 6명이야. 한 명만 더 있으면 돼.”

“좀만 있으면 되겠네. 보니까 핥짝이도 조만간 올라올 거 같다던데.”

탈모맨도 올라왔으니 핥짝이도 올라올 때가 되기는 했지.

“냥펀은?”

“대림원에 볼일 있어서 나중에 올 듯?”

화조국에 속한 만큼 대림원에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커뮤니티를 켰다.

오늘 밤에 달칸이 다시 찾아올 것 같지는 않다. 이미 두 번이나 퇴치했으니까.

낮이 올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상황, 밀린 커뮤니티도 보고 핥짝이가 구체적으로 언제 올지도 파악해 두는 편이 나았다.

[쁘띠공듀]: 핥핥짝짝이! 64층인가욧?

[정수리 핥짝]: ㅇㅇ, 아직 64층. 연못이 아직 안 나타나서.

아, 맞네.

이미 탈모맨이 연못을 없애고 올라왔으니 연못이 다시 나타나길 기다려야 한다.

생기더라도 위치가 랜덤이니 찾는 데 시간이 또 걸릴 거고.

이러면 길게 보면 일주일까지도 봐야겠는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잠시 계산을 하고 있던 찰나.

[니머리 탈모]: 천하의 핥짝이가 나보다 늦게 오르네. 하핳ㅎ하핳!

[니머리 탈모]: 난 이미 65층에 있는데. 밑이래요, 미티뤠엽! 에베베벱!

[니머리 탈모]: 어어어어이, 아래 공기는 상쾌하신가!

탈모맨이 난입했다.

어떻게 말리기도 전에 연달아 달리는 글.

난 입을 딱 벌렸고.

[정수리 핥짝]: …넌 진짜 가면 뒈졌다^^

핥짝이는 살인 예고를 남기고 사라졌다.

어이가 없어 탈모맨을 바라보자 녀석이 찡긋 웃으며 엄지를 세운다.

“어때? 이러면 더 빨리 올걸? 나 잘했지?”

“넌 오늘만 사는구나?”

“하하하하! 언제나 현재가 제일 중요한 법이지!”

밝게 웃는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됐든 효과는 확실했다.

핥짝이와 연락하고 하루.

[정수리 핥짝]: 탈모쉨… 지금 만나러 갑니다 ㅎㅎㅎ.

[냥냥펀치]: 탈모맨, 미리 말하지만 난 수육이 좋아. 편육 말고 수육! 육개장 고기 많이!

[쁘띠공듀]: 벌써부터 탈모맨을 병풍 뒤로 보내다니. 공듀는 감동했어욧!

핥짝이가 65층의 입성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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