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두 사람이 더 필요하다
새로운 오망성에 도착한 나는 이지키일과의 만남에 반가운 동시에 민망함을 느꼈다.
“무지개 용사님 무지개 타고 오셨다! 흐학하하학!”
“제발 닥쳐 줘.”
배를 잡고 웃어 젖히는 녀석. 60층에서 내게 붙은 별명은 무지개 용사.
거기에 무지개다리까지 타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 이런 반응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래, 무슨 변명을 하겠나. 이미 탑에 올라오고 인생 자체가 콘셉트가 되고 말았는데.
‘커뮤니티에서는 쁘띠공듀, 탑에서는 무지개 용사. 어쩌다 이렇게 됐냐.’
찔끔, 눈물이 나올 것만 같다. 과거의 내가 미웠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무지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펠라인 세트 때문에 이렇게 된 거고.
오케이, 그래도 ‘무지개 용사 쁘띠공듀’가 되지는 않았으니 위안을 가지자.
“넌 왜 여기 있냐?”
“브로, 탑을 오르는 데는 이유가 없다고.”
“탑 숭배자를 쫓아간다고 했잖아.”
“그렇지. 빅스타랑 노블 나이트에서도 말을 해 주던데. 너희 쪽이랑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알 거 다 알 테니 말하기 쉽겠어.”
현재 쁘찡 연합은 빅스타 길드와 노블 나이트와 협력 관계. 탑 숭배 집단에 대해 파고 있다.
아직까지 60층대에 올라온 사람들이 많지 않아 비밀로 해 두고는 있지만, 준비가 끝나면 발표할 예정이다.
하와이안 셔츠 포켓에 선글라스를 넣은 이지키일이 뭔가를 꺼낸다.
“너도 이건 봤겠지?”
“숭배자 증명패.”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건네준 물건을 살폈다.
숭배자들은 위치에 따라 티어가 나뉜다. 내가 상대했던 녀석은 브론즈.
내 기억이 맞다면 가장 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고, 그 밑으로 다이아, 골드, 실버, 브론즈가 자리 잡았다.
브론즈 아래에는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했는데.
“따르는 자들이군.”
증명패의 재질도 나무다. 내가 상대했던 테일러는 동으로 만들어진 패를 가지고 있었다.
“맞아. 조사를 좀 해 봤거든? 등반가 중에도 숭배자가 있는 건 알지?”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네가 쫓던 사람은 등반가라며, 파비안이었나?”
“예쓰, 브로.”
60층에 있던 무패기록자 중 한 명. 독일 대형 길드 소속이라고 했었다.
대형 길드 내부에 숭배자가 있다는 건 눈여겨봐야 할 일이다.
단순히 개인의 의지로 숭배자가 된 거면 상관이 없지만, 길드 내부에 숭배자들이 있는 거면 영향력이 엄청날 테니까.
탑 안에서는 물론이고 탑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대형 길드의 본진은 탑 밖이다. 그들 입장에서 탑은 어디까지나 헌터가 되기 위한 등용문이다.
그리고 대형 길드는 정부와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최악의 경우 나라를 움직이는 윗사람들이 숭배자일 가능성도 있다는 건데…….
‘그럴 이유가 있나?’
탑 숭배자들은 말 그대로 탑을 숭배하는 집단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목표는 탑 안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거다.
불멸. 탑에 속하게 된다면 나이도 먹지 않으며 특별한 사고나 사건에 휘말라지 않으면 죽을 걱정도 없다.
프램버그나 60층대가 유독 위험한 거지 다른 안전지대나 저층에는 위험한 게 없으니까.
즉, 70층 이상을 등반해 NPC가 될 자격을 얻어야 숭배자로 활동하는 의미가 있다는 건데.
이미 밖으로 나간 사람 중에는 70층을 넘어선 이들이 없으니 숭배자가 될 이유도 없고, 없는데…….
툭툭. 손가락을 두들겼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면 방법이 아예 없지도 않다. 알리오스는 페니를 아이템화 시켜 탑 안으로 들어왔다.
베힐탄은 99층에 오른 자의 특권으로 프램버그 전체를 탑으로 옮겼고.
특수한 경우지만 불가능은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대형 길드는 이미 멸망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어.’
당장 우리나라 대형 길드장들도 등반할 때 현자 존 트레일러를 만났다고 했다. 현자는 멸망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찾아오는 멸망.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거 같지는 않다. 뭔가 대비를 했겠지. 어쩌면 탑으로 이주할 생각을 할지도 모르는 거고.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다.
복잡하다. 이건 탑 밖에서 정보를 모아야 한다. 탑 안에서는 알 수 있는 내용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파비안을 쫓는 이유는 두 가지. 탑 내부에 있는 숭배자들에 대한 정보, 대형 길드 혹은 정부와의 관계 파악. 이거야.”
이지키일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
“파비안은? 잡았어?”
“놉. 난 빅스타, 그 친구는 데어 힘멜. 멋대로 싸우다가는 대형 길드끼리의 마찰로 이어지지. 심지어 미국과 독일 국가 단위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각자 소속되어 있는 곳이 다르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수많은 시선이 따르는 곳이 대형 길드고.
“특히나 빅스타는 신생 대형 길드지. 트집 잡으려고 눈에 불 켠 사람이 많다구, 브로. 확실하게 증거를 잡지 못하면 건들 수 없어. 안 그랬으면 60층에서 진작 잡았지.”
“정치판이라는 거네.”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그놈 때문에 썬텐도 못 하고 고생이 많아. 내 건강한 구릿빛 피부가 옅어지고 있다고.”
이지키일이 팔뚝을 보여 주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하얗다. 썬텐 효과가 없는 것 같다만 굳이 말해 주지는 않았다.
잠시 팔짱을 끼며 생각했다.
파비안, 탑 숭배 집단.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내 등반 라이프를 위해서도. 내가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세계가 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이지키일.”
“와이?”
“파비안 숭배자인 거 맞아?”
“놈의 물건에서 증명패를 찾았으니까 거의 확실하지. 이름이 안 적혀 있어서 증명이 안 될 뿐.”
“혹시나 그 녀석도 숭배자를 쫓고 있을 가능성은?”
“있었다면 빅스타나 노블 나이트에 접근했겠지. 놈이 속한 곳도 대형 길드야. 어느 정도 정보력은 있다고.”
오케이, 높은 확률로 숭배자라는 거구만.
“내가 도와주지.”
“음?”
“난 소속이 없거든. 쁘찡 연합은 말 그대로 연합이지 길드도 팀도 아니야. 시비 붙으면 지들이 뭐 어쩔 거야. 이미 한국 대형 길드랑도 들이박았어. 결과는 너도 알 거고.”
“이쪽 바닥에서는 유명하지. 한국 대형 길드는 탑 내에서의 영향력을 잃었으니까. 다른 대형 길드한테 비웃음거리가 됐다고.”
“무엇보다 놈들과 달리 연합은 탑 안이 본체야. 탑 안에서는 우리가 훨씬 강해.”
최소한 한국 서버에서는 더 이상 연합을 건들 세력이 없다.
서버가 합쳐지는 50층 이상?
거기도 상황은 비슷하다. 연합의 규모는 늘어나 글로벌 해졌고, 50층대 이상 올라온 헌터 중에도 연합 사람의 비율이 상당했다.
내가 공략을 열심히 뿌린 덕분. 적어도 탑에서만큼은 대형 길드가 몰려와도 상대할 만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한 이지키일이 씨익 웃는다.
“네가 대신 나서겠다는 거군? 역시 무지개 용사, 인류의 영웅!”
“제발 닥쳐 주고, 그래서 파비안은 어디에 있어?”
“어디긴, 우리랑 같은 층에 있지. 위치는 파악해 놨어. 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곤란하네.”
난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낮 종료까지 남은 시간- 00:31:14]
다시 밤이 찾아온다. 밤은 달칸의 영역.
달칸의 추적을 끊고 파비안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여기는 달칸의 영역이니까.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이지키일이 입꼬리를 올린다.
“빅스타 길드의 선배들이 공략법을 말해 줬거든.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어.”
“오오오! 안 그래도 물어보려 했거든. 팻말에 보니까 빅스타 길드인 사람이 남긴 흔적이 있더라고.”
“이미 봤다면 이야기가 빠르겠지.”
-가가각
이지키일이 바닥에 그림을 그린다.
“브로, 달칸에 대해 얼마나 알지?”
“밤의 영물이라는 것 정도? 9층에서 마주친 적이 있지. 그때는 봉인되어 있었는데, 쯥.”
“예쓰. 그게 포인트야.”
그림을 마친 이지키일이 설명을 시작한다.
“달칸은 서버 공통으로 나타났다는 거 알아?”
서버마다 탑의 구성이 달라진다는 건 상식이다.
공통점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달칸은 아예 고정이었던 모양.
“9층에서 마주친 달칸. 녀석은 8개의 봉인에 걸려 있었지. 그리고 여기 65층에는…….”
“7개의 오망성이 있군.”
정육각형의 모양으로 6개. 중앙에 하나.
7개의 오망성이 모여 거대한 오망성을 다시 만들었다.
대충 감이 온다. 7개의 모든 오망성을 발동시키면 달칸을 억누를 강력한 마법진이 활성화되는 형식이 아닐까.
오망성이 밝혀질 때마다 놈의 힘은 약해지는 거고.
“잠깐만, 너도 알다시피 달칸은 8개의 봉인이 있었어.”
“맞아. 마지막 한 개는 모든 오망성이 작동되면 나타나지.”
이지키일이 손을 펼쳤다.
“빛의 도시.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강력한 마법진이자 유적. 거기서 여명의 오망성을 만드는 제작법을 배울 수 있다더군. 달칸은 8개의 봉인에 걸려 힘을 잃고.”
이제야 알겠다.
빛의 도시는 모든 오망성이 밝아지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팻말은 다음 오망성이 있는 곳을 알려 줄 뿐.
팻말 뒤편에 적혀 있던 STAY의 의미는…….
“오망성에 한 명씩 있어야 작동된다는 거였어.”
“빙고. 65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7명은 있어야 한다는 거지.”
“너랑 나, 파비안까지 합치면 3명이군.”
“더 있어. 나랑 같은 길드인 친구 한 명이랑 어디 소속인지는 모르겠지만 65층에 도착한 사람 한 명. 총 5명이 65층에 있지.”
그래도 부족하다, 2명이 더 있어야 한다.
“타이밍이 안 맞으면 전멸하는 구조네.”
인원이 찰 때까지 먼저 65층에 도착한 사람은 버티고 있어야 한다.
어쩐지 친절하더라.
낮도 찾아오고, 불가침의 영역도 있고.
그러지 않으면 클리어가 불가능하니까 시스템이 만들어 둔 거였다.
“적어도 65층을 클리어할 때까지는 파비안을 살려 둬야 해.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거지.”
이지키일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는 말이다. 뭐가 됐든 클리어가 우선이다.
“아니면 다섯 명 다 합쳐서 덤벼 볼까? 잡을 수도 있잖아.”
“네가 괴물처럼 강한 건 알지만 달칸은 진짜 괴물이야. 잡으라고 있는 놈이 아니라고.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도 없어. 최근에는 잘 안 보였거든.”
그렇겠지. 나랑 놀고 있었으니까.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언제나 플랜B는 있는 게 좋잖아? 보고 판단해.”
이지키일과 만난 곳은 네 번째 여명의 오망성.
[네 번째 여명의 오망성]
-낮을 불러들이는 마법진.
-불가침의 영역 (0/4)
-불가침의 영역은 개인마다 할당됩니다.
이전에 있던 곳과 달리 불가침의 영역이 모두 살아 있다.
한 번 정도는 써도 되겠지.
[밤이 찾아옵니다.]
하늘의 빛이 힘을 잃고 사라진다.
-크르르르르
“왓 더! 밤이 되자마자 이쪽으로 온다고?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있나?”
멀리서 들려오는 달칸의 울음소리에 이지키일이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멍멍이, 하던 거 마저 해야지. 너도 중간에 좀 도와라.”
“그냥 붙게? 헤이!”
위험할 때 도와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놈을 향해 달려갔다.
“크하아아앙!”
어둠을 타고 달려온 녀석이 크게 울부짖었다.
-쾅! 콰앙!
-쿠구구구궁!
맞붙는 검과 발톱.
넘실거리는 칠흑의 불길과 내가 터트리는 붉은 화염.
신성력을 머금은 검은 찬란히 빛났고, 놈을 감싸는 어둠은 날 잡아먹기 위해 일렁였다.
어두컴컴한 공간, 놈과 내가 있는 곳만은 빛을 되찾았으며.
“오 마이 갓, 이게 무슨 싸움이야.”
나와 달칸의 전투를 지켜보던 이지키일의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