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302화 (302/740)

302화 STAY

팻말 뒤편에 적혀 있는 단어.

-STAY

녹슨 팻말에 희미하게 긁힌 거라 흔적이 거의 사라졌지만 분명하다.

영어로 되어 있는 걸 보아하니 먼저 이곳에 머문 사람이 남긴 것 같은데…….

“여기에 머물라는 건가?”

“그에에.”

왜? 뭐가 있어서? 이동하지 않고 여기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이걸 쓴 사람은 몇 번 오망성부터 이동을 시작한 걸까.

그 전에 누가 쓴 걸까.

보송송이의 말에 따르면 상위층을 오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50여 명 정도 되려나? 내가 만난 상위층 사람은 헬다잉 키친 파티에서 만난 녀석뿐이다.

그놈이야 한국인이니 패스. 뭐, 그냥 영어로 쓴 걸지도 모르지만.

다 떠나서…….

“신뢰가 없는 건 이것도 마찬가지란 거지.”

의심병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난 그렇게 생각한다.

정체 모를 사람이 남긴 흔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라면? 단순히 심심해서 쓴 거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예 악의를 가지고 잘못된 정보를 남겼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모든 사람이 호의를 베풀지는 않는다.

무엇 하나 확실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판단은 나의 몫이고, 책임 또한 내가 진다.

남 탓할 이유도 여유도 없다.

[낮 종료까지 남은 시간- 03:12:33]

3시간 후면 밤이 찾아온다. 달칸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며, 아직 몸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무지개 반사도 이미 사용한 상황. 하루가 지나기 전까지는 다시 쓸 수 없다.

그나마 아스트랄 레인보우와 홍예참을 쓰지 않아서 다행.

무지개다리는 여러 번 쓸 수 있으니 괜찮다.

숨만 쉬어도 시간은 흐르는 법.

“골 아프네.”

한번 의심이 들어서일까, 팻말 방향까지도 의심스럽다. 먼저 왔던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돌려 버린 건 아니겠지?

자기만 무사히 빠져나가고 다음 사람은 엉뚱한 곳으로 가게.

혹시나 싶은 마음에 팻말을 잡아당겼고.

[시스템적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네.”

팻말 방향 자체는 그대로다.

오케이, 모르겠으면 알아보면 되지.

다른 사람이라면 머리 싸매고 고민했겠지만 난 그나마 추가적인 정보를 볼 수 있다.

-츠즈즈즉

권능이 발휘된다.

먼저 단어부터.

[레싱턴 크렉의 메시지]

-미국의 등반가 레싱턴 크렉이 남긴 메시지.

-빅스타 길드의 일원.

-위로 올라가다 보면 만날지도?

미국인 등반가라, 그것보다 빅스타?

60층에서 만난 하와이 셔츠가 떠오른다.

이지키일 존 스페너스, 그 녀석도 빅스타 길드였지.

신생 길드가 대형 길드로 인정받는 건 드문 일. 하지만 빅스타 길드는 해냈다. 그 바탕에는 걸출한 인재들이 있는 것도 있지만…….

‘상위층을 오르는 중인 이들이 있다 했었지.’

그렇기에 기존의 대형 길드도 무시하지 못한 거고.

오필리아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와도 접점이 있는 길드다.

두 곳 모두 대형 길드와 정부의 비밀을 알고, 세계가 멸망의 과도기에 접어든 사실을 눈치채고 움직이는 중.

동시에 탑 숭배 집단을 쫓는 곳이기도 하다.

이지키일 역시 탑 숭배자를 쫓아 위로 올라갔다. 아직까지 보지 못했으니 나보다 먼저 위로 올라갔든, 여기 어딘가 있든 하겠지.

직접 맞붙은 적은 없지만 대단한 실력자라는 생각이 든다. 등반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빅스타 길드의 지원과 정보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빅스타 길드원이 남긴 흔적이라면 신뢰도가 살짝 상승한다.

이어서 오망성을 살폈다.

[네 번째 여명의 오망성]

-낮을 불러들이는 마법진.

-빛의 도시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여명의 오망성은 일곱 개 존재합니다.

-불가침의 영역 (0/4)

-불가침의 영역은 개인마다 할당됩니다.

이런 마법진이 일곱 개 있다는 건가.

여기가 네 번째니까 중간쯤 되겠네.

그보다 불가침의 영역이라…….

“이건 확인해 봐야겠는데.”

어쩐지 STAY와 관련된 내용 같다.

일단은 머물러 보자. 이동은 다음에 해도 된다.

오망성 주변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혹시나 몬스터들이 덤벼들더라도 미리 알 수 있도록.

낮이 되었기 때문인지 숨어 있던 몬스터 몇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그리 위협적인 놈들은 아니었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3시간, 온전히 회복하기에는 부족하나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소중한 시간인 만큼 최대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피곤하다.”

“궤에.”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마가 나를 덮쳤다.

* * *

미약한 탄내와 짐승 특유의 노린내. 몸을 찌르는 살기.

난 눈을 떴다.

해가 지고 있다. 아니, 가려지고 있다.

[낮 종료까지 남은 시간- 00:03:27]

꿀잠 잤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달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이 싫은지 숲의 그늘에 모습을 숨긴 채 똑바로 날 응시하고 있다.

피식 웃어 주고 남은 3분 동안 알뜰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모르는 만큼 갑옷을 입은 상태로 잠들었지만 몸이 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초인에 가까워진 몸은 이 정도 노숙에는 끄떡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샤워에 클린까지 사용하자 머리가 상쾌해진다.

“그에에에.”

덕춘이도 기지개를 켜며 어깨에 올라왔다.

뇌봉참검을 수리하지 못한 게 좀 걸리지만 어쩔 수 없지. 당장은 휴식이 더 중요했으니까.

일회용으로 쓸 만한 무기는 많다. 릴카와 작업하면서 만든 것도 있고, 개인적으로 제작한 것도 있고.

영 급하면 화조국에 넘기기로 한 물건들을 사용해도 된다.

재앙과 싸울 때 쓰기에는 부족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난 아공간 팔찌를 열었다.

“오늘은 이것들도 써 보자고.”

아직 무지개 반사의 쿨타임이 돌아오지 않았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 한다.

모든 봉인이 풀린 달칸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밤이 찾아옵니다.]

“크하아아앙!”

완전히 빛을 잃은 하늘.

시커먼 세상이 찾아왔다.

밤의 부활을 기뻐하듯 달칸이 울부짖고.

“멍멍아, 물어와!”

난 앞으로 달리며 놈을 향해 포션병을 던졌다.

[악취 포션]

-고약한 냄새가 퍼집니다.

-비위가 약하다고요? 우엑!

-쨍그랑!

포션이 깨지며 병 속의 액체가 한 번에 기화됐다.

안개처럼 퍼져나가는 악취 가스.

“크하아아악!”

영물이기는 하나 토대는 늑대.

후각이 예민한 놈이 기겁하며 펄쩍 뛴다.

악취라는 게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데 심하면 쇼크사도 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거다.

놈에게는 말할 것도 없겠지.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좋다. 그래, 싸움에 더러운 게 어디 있냐. 필요하면 뭐든 하는 거지.

“아직 한참 남았다 요놈아! 흐하하하!”

자리를 피하는 놈을 향해 연달아 포션을 던졌다.

다시 한번 퍼지는 가스. 이대로는 안 된다 생각한 걸까 놈이 날아오는 병을 꼬리로 쳐 낸다.

푹신한 꼬리털이 포션을 깨트리지 않고 멀리 날려 보낸다.

“영특한 놈일세.”

“크르르르르!”

“화났어? 기다려. 다음에는 콧구멍에 쑤셔 넣어 줄 테니까.”

휴식을 취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 달칸 역시 암염으로 뒤덮혔던 눈과 코가 재생되었다.

회복이 엄청 빠르지는 않은 것 같다. 티는 잘 나지 않지만 상처 부위의 털이 온전히 자라지 않았다.

완전히 재생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는 거겠지.

-부웅

가볍게 혼돈검을 한 바퀴 돌리며 손목을 풀었다.

바람이 분다. 악취 가스도 서서히 옅어지고 있다. 아직 여유가 좀 있지만 한 번에 다 쓸 생각은 없다. 좀 더 근접했을 때 쓸 예정.

-사가가가각

숲이 흔들린다. 어둠 속의 그림자. 놈을 따르는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덕춘이가 죽였던 그림자 왕도 있다. 그새 다른 놈이 붙은 모양.

나도 불러내고 싶은데 저번 싸움 때 내 옵텍터가 전멸했다. 아쉽지만 별수 없지.

‘몬스터는 잡아 봤자 소용없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채워지는 만큼 저쪽에 신경을 쏟으면 안 된다.

중요한 건 본체. 달칸을 꺾어야 한다.

지난 전투를 통해 몇 가지 작전을 생각해 냈다. 얼마나 통할지는 봐 보자.

-쒜에에엑!

다시 한번 악취 포션을 던졌다. 연막탄도 함께.

-푸쉬쉬쉬쉬

자욱이 피어오르는 연막. 시야가 가려 악취 포션을 제때 쳐 내지 못한 녀석이 뒤로 물러선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땅굴 이동을 사용했다.

-쿠구구구구

빠르게 땅을 파고들면 내부를 헤집었다.

땅속에 거대한 공간이 생긴다.

[워터 (C) Lv.1]

[워터 (C) Lv.1]

[워터 (C) Lv.1]

.

.

.

빠르게 물을 채운 뒤 물약을 뿌렸다.

25층에서 얻었던 프레노옥토토신, 물과 닿으면 독성을 내뿜는 물질을 모조리 붓고, 내가 만든 포션도 아낌없이 던졌다.

[상급 마비독 포션]

-온몸이 저릿저릿!

-입도 뻥긋 못할걸요?

[잘못된 목욕제]

-물에 풀어서 씁니다.

-피부가 녹아내릴지도?

[위염 유도제]

-물과 함께 먹는 위염 유도제.

-위에 구멍이 숭숭!

이외에도 물에 섞었을 때 효과가 좋은 것들을 잔뜩 풀었다.

천장에는 시한폭탄을 설치.

“이제 놈을 끌고 와야지.”

가만히 청각에 집중했다.

악취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 없는 놈이 마구잡이로 들쑤시고 다니는 게 느껴진다.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진동음.

[땅굴 이동 (AA) Lv.1]

난 놈을 향해 이동했고.

“네발짐승은 배가 약점이라 하더라고.”

에지 있게 손끝을 위로 향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오로라 빔 (S) Lv.4]

-찌유우우우우웅!

한번은 정이 없어 연달아 세 번을 더 쏘았다.

땅을 뚫고 일직선으로 위로 뻗어가는 오로라 빔.

“크하아아앙!”

덩치가 큰 만큼 오로라 빔 네 발 모두 놈에게 적중했다.

-콰아아앙!

놈이 앞발로 땅을 내려친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토굴이 흔들린다.

이어 브레스.

-푸화아아악!

오로라 빔으로 뚫린 구멍. 칠흑의 불길이 지하로 몰려든다.

이럴 줄 알았다. 오로라 빔 몇 번으로 놈을 잡을 생각은 안 했으니까.

미리 대비한 만큼 프로즌 브레이크를 사용해 불길을 잠시 묶어 두고, 땅굴 이동으로 자리를 빠져나왔다.

애초에 내 목적은 놈의 화를 돋우는 것.

“계속해 보자고.”

“그헤헤헤!”

땅속에서 이동하며 계속해서 오로라 빔을 사용했다.

놈도 대응하기 시작했다. 땅굴 이동 특성상 진동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발바닥을 통해 나의 움직임을 파악하겠지. 후각도 어느 정도 돌아왔는지 쫓아오는 속도가 빠르다.

괜찮다. 그러라고 이러는 거니까.

난 전속력으로 목적지로 향했다. 온갖 포션을 푼 웅덩이. 웅덩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그러기에는 너무 커서.

-쿵, 쿵쿵!

달칸의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웅덩이 바로 위.

[시한폭탄 (AA) Lv.9]

[시한폭탄 (AA) Lv.9]

.

.

.

난 설치해 둔 시한폭탄을 일제히 터트렸다.

토굴 천장이 무너지며 놈의 몸이 기운다.

괜히 재앙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이건가. 폭발 범위가 제법 큰데도 불구하고 떨어지지 않고 빠져나가려 한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내가 말했지! 다음에는 콧구멍에 쑤셔 준다고!”

-콰앙!

[달라붙기 (B) Lv.6]

몸을 날려 놈의 턱을 붙잡았다. 덩치만큼 털도 길어 잡을 건 많았다.

[중량 팔찌 (C)]

이어 마력을 한껏 불어넣어 무게를 늘렸다.

-끼기기긱

막대한 양의 마력이 한 번에 들이닥쳤기 때문일까 팔찌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으나 다행히 부서지지는 않았고.

-풍덩!

“크, 크헝! 그르르르!”

단번에 늘어난 무게에 놈의 머리가 웅덩이에 처박혔다.

[독 내성 (S) Lv.7]

[저주 내성 (S) Lv.3]

[강체 (S) Lv.5]

[소화 (AA) Lv.3]

내 몸도 같이 웅덩이에 빠져 중독이 일어났으나, 이를 악물고 놈의 콧구멍에 악취 포션을 넣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쨍그랑!

“크라라라라락!”

끔찍한 악취에 놈이 입을 크게 벌렸다. 독성 액체가 놈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가뜩이나 악취로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 놈이 폭식 능력도 쓰지 못한 채 물을 삼켰고.

[안개 질주 (S) Lv.2]

[망자귀환 (AAA) Lv.9]

[스킬 레벨업!]

[망자귀환 (AAA) lv.10]

-상태 이상이 해제됩니다.

-스텟이 상승합니다.

난 안개 질주로 빠져나와 놈의 위로 몸을 띄웠다.

[러브 앤 피스 (S) Lv.6]

-우우우우우웅!

하늘 높이 들어 올린 검.

신성력을 머금은 검이 달처럼 번뜩였으며.

[홍예참虹霓斬 (SS)]

곧 무지개를 품었다.

놈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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