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없앱시다
서량과 함께 움직였다. 해가 지고 있다. 오늘 내로 승부를 볼 생각.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황으로 봐서는 하루에 한 명은 죽어.’
베히가와 겔릭.
하루에 한 명씩 희생자가 나오고 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구체적인 소원 내용을 알 수 없으니 추측에 불과하지만 꽤 신빙성 있어 보였다.
“서량, 준비는 끝났겠죠?”
“어, 티 안 나게 전사들 대기시켰어.”
“나머지는 하월에게 맡기죠.”
혹시 마을 단위의 분쟁이 생길 때를 대비해 서량에게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하월 역시 범인을 찾았다며 다른 대표들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은밀하게 전사를 모으고 있었다.
마을의 동쪽 입구, 대표들이 다시 모였다.
여덟 명의 대표. 그들의 눈이 번뜩였다.
“범인을 찾았다는 게 사실이냐, 인간.”
성격 급한 타이가가 물었다. 다른 이들 역시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지 말리지 않았다.
범인이 누구인지 먼저 들은 서량과 하월만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내가 굳이 둘에게만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범인을 알아도 티를 내지 않을 거 같아서.
그것도 그렇고 묘인족의 마을은 범인의 마을 근처에 있다. 하월은 신비한 술법으로 빠르게 다른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고.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났다.
“거의 분명하다고 봅니다. 확인만 하면 끝입니다.”
“단순 의심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확실해야 해요!”
“치킨맨, 지금은 의심되는 인물이 나타난 것만 해도 다행인 거야. 확인 방법도 있다는 거 같고.”
서량이 나서서 지지해 준다.
하긴 서량은 내가 오기 전에도 광란의 밤을 일으킨 범인을 예측하고 있었지.
“연못으로 갑시다.”
길은 낮에 외워 놨다. 앞장서서 걷자 다른 이들도 따라온다.
횃불조차 없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 중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맬 사람은 없었다.
가는 길은 조용했다. 다들 한두 명씩 동족을 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수인은 동족애가 강한 종족.
‘범인은 자기 동족도 공격했어, 특이한 경우지.’
분명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표 자리에 있다는 건 동족을 위해 가장 헌신했다는 의미기도 하니까.
스스로 목덜미를 긁으라는 소원을 빌 때 자기 동족은 제외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더라도 후순위에 뒀을 수도 있다.
그런 의문이 들었기에 히포토스와 그레이는 범인일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어디까지나 심증. 물증은 어디에도 없다. 정황과 가능성으로 판단하고 있던 거지.
다음으로 눈여겨봐야 했던 건 연못 근처에서 죽은 수호자들. 직접 보기도 했고 면담을 하며 자세한 이야기도 들었다.
손톱 혹은 발톱에 뜯긴 흔적이 있었다 했지.
여기서 치킨맨과 리아나가 제외.
그 외에 항상 동굴에 칩거하는 웅인족 고행과 실험실에 박혀 있는 서량은 최근 한 달 동안의 알리바이가 확실했다. 적어도 먼저 연못을 발견했을 리는 없다는 것.
남은 건 하월과 타이가.
‘다른 대표들의 말에 따르면 하월은 직접 육탄전을 벌이지 않아. 술법을 주로 쓰지.’
날카로운 손톱과 발톱은 있으나 피지컬로 승부를 보지는 않는다.
광란의 밤 때도 그러했다고 한다. 직접 맞붙은 적이 있는 그레이는 하월이 육탄전에는 약한 면을 보인다고 언급했다.
일대일로 싸운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지만 수호자 전체를 상대로 육탄전으로 이겼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
그러면 남은 것은 호인족 타이가뿐.
가장 호전적이며 육탄전에 강하고, 짐승의 흔적을 자랑스레 여기는 광란의 밤의 패자 중 하나.
모든 정황이 타이가가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타이가가 아니야.’
모르토가 준 물건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도착했다.”
“거기, 다들 비켜! 확인할 거 있으니까!”
새로 들어온 수호자와 경비를 위해 배치되었던 각 마을의 전사들.
예고 없는 대표들의 방문에 당황했으나 곧 길을 비켜 줬다. 수호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잠시 자리를 좀 비켜 주시죠.”
“연못에서 무엇을 하든 참관인은 있어야 한다.”
수호자 중 하나가 길을 막았다.
가능한 보는 사람이 적게 하고 싶었는데. 범인의 정체를 널리 알려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막말로 복수를 하겠다며 범인의 마을을 공격할 수도 있었다.
연못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건 대표들뿐.
웅인족 대양도 있기는 하지만 그는 수호자를 상대할 능력이 없다.
난 대표들을 바라봤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수호자는 연못을 악용할 때가 아니면 나서지 않으니. 무엇을 보고 듣든 잊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뭐.
우리는 연못 앞에 섰다. 사고의 흔적은 없었다. 고요하게 흔들리는 연못만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사일러스 (S) Lv.MAX]
[인지 저하 (S) Lv.MAX]
.
.
.
서량이 스킬을 사용했다.
수호자도 수호자지만 밖에 각 마을의 전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귀가 좋은 이들인 만큼 이 정도 조치는 해야 하는 법.
“범인은 이 안에 있습니다.”
난 대표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가장 간단히 범인을 알아내는 방법이 있다.
“소원 하나 빌죠?”
“연못으로 범인을 찾는 건 불가능하단 걸 알지 않나. 이미 누군가 소원을 빌었어.”
히포토스의 말대로다. 연못은 결과가 같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말을 돌려 범인의 머리에 뿔이 자라게 해 달라고 빌든, 범인의 털이 초록색으로 바뀌게 해 달라는 것도 안 된다.
결과적으로 범인의 정체를 알려 달라는 뜻이니까.
그럼 다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슬슬 정보를 풀자.
“여러분은 아직도 범인이 수호자를 죽이고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하지!”
“그렇지 않나요?”
“아닙니다.”
애초에 소원을 빌 필요가 없었다.
소원은 예전에 이미 빌었으니까.
“이번 일의 범인은 광란의 밤을 일으킨 범인과 동일인입니다. 이미 광란의 밤을 일으킨 사람을 알려 달라고 소원을 빌었었죠? 그거 때문에 연못이 반응이 없던 겁니다.”
대표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입을 다물고 있던 수호자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범인 알려 달라는 소원을 빈 사람이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야.
“리아나 아닌가요?”
“…내가 맞아.”
“나와 보세요.”
리아나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소원은 아직 안 이루어졌죠?”
“그야 소원을 빈다고 바로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으니까. 언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아무도 몰라.”
“아뇨. 소원은 이루어졌을 겁니다. 그저 직접 소원을 빌었기에 본인만 알고 있었을 뿐. 아무런 의미 없는 소원인 거죠. 다시 해 봅시다. 조금은 다르게요.”
범인이 누구냐고 물을 수 없다면 다르게 물으면 그만.
사건과 한 발 떨어진 소원을 빌어야 한다.
난 인벤토리에서 모르토에게 받은 물건을 꺼냈다.
[부러진 피어 클로 조각]
-여러 수인의 손톱과 발톱으로 만들어진 클로의 파편.
-손톱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자체적으로 만든 무기.
-제작 기술이 좋지 않군요!
클로. 손톱 무기라고 불리는 건데 수호자들이 죽어 있던 곳에서 모르토가 발견했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수호자 중 한 명이 이것을 꼭 껴안고 있었다고 했다.
죽는 순간까지 단서를 남기려 했던 수호자의 의지가 느껴졌다.
리아나의 눈이 흔들린다.
“리아나, 소원을 비시죠. 이 무기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알려 달라고요.”
난 앞으로 한 발 내디디며 대표들을 둘러보았다.
“범인이 수호자를 처리하는 데 사용했던 무기의 파편입니다. 시신에 남은 상처와 대조해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퉁.
손가락으로 클로 파편을 튕겼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손톱이 흔들거렸다.
“전 제작 스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직접 만든 무기예요. 만든 사람은 제작 관련 스킬이 없고요. 이렇게 부러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제작 기술이 B등급만 돼도 이렇게 쉽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거다.
말 그대로 아무런 제작 기술이 없는 사람이 어설프게 만든 물건.
“범인은 혼선을 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모든 시신에는 손톱자국이 있죠. 육식계 수인에게 의심이 쏠리도록 말이에요. 아마 ‘하루에 한 명, 숲으로 들어가 목 뒤를 그어 죽는다’라는 내용의 소원을 빌었을 겁니다, 인정하나요?”
다시 한 발자국 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이 무기에 쓰인 손톱 중 일부는 겔릭의 것이겠죠. 사라진 손가락은 3개, 발견된 건 하나뿐이니까. 그 손가락이 있던 곳은 토인족의 집이었고요.”
몸을 살짝 굽혀 리아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녀가 주먹을 움켜쥔다.
“집주인이 사라진 틈에 누군가 몰래 넣어 뒀습니다. 집에 사람이 있었다면 못 했겠죠. 누가 집이 비었는지 알고 있었을까요. 다른 마을 사람들? 그 마을의 대표? 답은 나왔다 보는데요.”
“…짜깁기야. 그냥 애매한 물건이랑 상상만으로 만든 이야기라고!”
리아나가 소리를 질렀지만 난 눈도 깜짝 안 했다.
“상상은 아니죠. 목격자도 있으니까, 하월.”
“알았어요.”
하월이 품에서 나무토막을 꺼낸다.
부적이 붙어 있는 나무토막은 특별할 거 없어 보였으나.
-찌이익
-퍼엉!
부적을 떼어 내자 너구리 수인으로 변했다.
익숙한 얼굴.
“클로 파편을 찾아낸 사람이자, 수호자들이 당했을 당시 근처에 있던 유일한 목격자입니다.”
몸이 찌뿌둥한지 모르토가 기지개를 켠다.
다른 이들의 눈이 커진다.
“모르토라면 그 외톨이?”
“지금까지 밖에 있던 건가.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목격했다는 말이 진짜입니까?”
모두의 시선을 받자 부담스러웠는지 모르토가 쭈뼛쭈뼛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소리가 나서 갔다가 휘말릴 거 같아서 돌멩이로 둔갑했죠. 얼굴은 가려서 확실치는 않지만 토인족이 있었어요. 같은 토인족 수호자는 몸에 발톱 자국이 없을 거예요. 목이 돌아갔거든요.”
토인족 수호자만 목이 돌아간 이유야 뭐.
동족마저 난도질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수호자를 돕지 않고 숨어 있었다고 욕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고 지켜봤다는 것에 용감하다 독려해 줄 뿐.
모르토가 뒤로 빠지고 마을 대표들이 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소원을 빌어라, 리아나.”
“아니면 저항이라도 할 건가요?”
아무리 토인족의 대표라도 이곳에 모인 모두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
광란의 밤에서 살아남아 각 부족의 정점에 오른 이들이다.
“아니, 됐어. 내가 범인이니까. 수호자들을 죽이고 소원을 빌었지.”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타이가가 소리쳤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
그런 타이가를 보며 리아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왜? 당장 옆을 둘러봐. 여기 초식계 수인이 몇이나 있지? 나밖에 없지 않아? 광란의 밤 전에 부족이 몇 개였지? 그전에는! 습격, 약탈, 전쟁! 항상 당하던 건 누구였는지 생각해 봐.”
너희도 똑같이 당해 봐야 해.
그 말을 끝으로 리아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리아나, 널 동족 살해자로 체포한다.”
그레이가 선언하듯 말했다.
[명계의 사슬 (SS) Lv.MAX]
[아나크네의 고치 (S) Lv.MAX]
[죄인의 포승줄 (S) Lv.MAX]
.
.
.
-촤르르르륵!
-꾸구구국!
수십 개의 속박 스킬이 리아나를 감쌌으나, 몸과 입이 봉인된 리아나가 붉은 눈동자로 대표들을 노려봤다.
고행이 그녀를 짊어졌다.
“어리석은 짓을 벌이셨소, 리아나.”
나직이 울리는 고행의 말.
범인을 찾았음에도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단순 범죄가 아니다. 힘겹게 이어져 왔던 대림원의 신뢰가 깨지는 사건이었지.
[모르토의 변호자 퀘스트 클리어!]
[대림원의 배신자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칭호 수인족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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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토와 각 대표에게 받았던 퀘스트 보상이 떨어진다.
“자네 덕에 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네.”
“대림원의 이름으로 이블아이를 적대하는 자가 나타난다면 직접 나서 주지.”
“크흠! 계속 인간이라 무시해서 미안하다, 인간.”
“고마워요. 뒷일은 우리에게 맡겨요.”
내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바라보며 난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어쩔 생각입니까?”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물음.
대림원은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대표 중에 배반자가 나왔다는 건 마을 사람 중에도 광란의 밤을 원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뜻.
이번에는 잡았지만 다음은 어떨지 모른다. 어느 부족의 일원이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툭. 난 손가락을 두들겼다.
“퀘스트 보상으로 소원권이 제게 하나 생겼죠?”
“그렇지.”
“지금 바로 쓰겠습니다.”
이미 소원권은 어디다 쓸지 정해 놨다.
“소원 들어주는 연못을 없앱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