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범인 잡으러 갑시다
동일범.
수인들의 최악의 역사를 만들어 낸 자와 이번 사건의 범인은 같다.
그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불화를 싹 틔우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목적?
잘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광란의 밤을 일으키려는 건 아닐까.’
너무 앞서간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가능성에서 제외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전적이 있다. 광란의 밤은 어느 순간 끝이 나버렸고, 범인은 만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살인 사건.
2명이었던 희생자가 18명으로 늘어났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
심지어 대상이 특정되지도 않았다. 그냥 죽였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상황.
이 상태가 지속되면 범인을 찾겠다는 명목하에 수상쩍은 이들을 처형시킬지도 몰랐으며, 그 불똥이 다른 마을에까지 튄다면…….
‘그때는 진짜 전쟁이지.’
느껴본바 이들은 자기 마을 사람은 소중히 아낀다.
히포토스도 그러했고, 리아나도 그랬다. 하월 역시 마찬가지.
단순한 타이가마저도 용의자가 호인족과 같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치킨맨은 조인족이 의심받는 걸 자신이 의심받는 것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고.
나머지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이들이 대표로 있을 수 있는 건 단순 능력뿐만이 아니라 자기 사람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60층대에 만난 모든 마을이 그랬다.
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이 정보는 나만 가지고 있자.’
대표들도 소원이 겹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어떤 소원과 겹치는지는 알지 못했다.
모두가 의심스러운 상황.
비장의 한 수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으음, 우리보다 먼저 소원을 빈 사람이 있다는 거군요.”
“보나 마나 범인이겠지, 나라도 그럴걸.”
“그렇지. 그래야 다른 사람이 같은 소원을 빌더라도 자신을 알아내지 못할 테니까.”
“베히가를 죽이자마자 이곳으로 온 거야. 그래야 순서가 맞아.”
“동의하오.”
대표들 역시 이야기를 나눈다.
그래, 저게 일반적인 흐름이 맞지.
범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먼저 소원을 빌었다.
나도 권능이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방향성을 살짝 바꿀 필요가 있다.
최근 벌어진 사건에만 정신 팔리지 말고 모두가 겪었던 광란의 밤에 대해서 파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신을 수습해야겠군.”
“하월, 부탁하오.”
“알겠어요.”
하월이 나뭇잎 하나를 불자 하늘 높이 올라간다.
나뭇잎은 그대로 거대한 새가 되어 날아갔으니 사람을 부르기 위함일 거다.
대표들이 묵묵히 시신을 옮겼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후.
“연못이 이곳에 있는 걸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듣자 하니 대림원 주민은 소원을 빌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전원이 알고 있는 건가요?”
난 바로 질문을 던졌다.
잔인한 일일지 모르겠으나 가만히 있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이미 범인은 18명을 죽인 살인자였으며, 광란의 밤을 일으킨 테러범이다.
한시라도 빠르게 잡는 게 모두를 위해서 좋았다.
대표들도 자기 부족의 일원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협조적으로 나올 터.
“연못은 기본적으로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아.”
서량을 시작으로 이야기가 나왔다.
“숲을 돌아다니다 연못을 발견한 자는 대표에게 보고하기로 되어 있소. 이번 연못은 곰 부족의 일원 대양이 발견했소이다.”
웅인족 대표 고행이 말했다. 일단 대양이라는 수인도 용의선상에 놓고.
“그 외에는 대표들만 위치를 알고 있지. 소원을 빌러 가는 녀석들도 우리가 눈을 가리고 길을 꼬아서 데려다 준다고.”
“수호자들은요?”
타이가의 말에 질문을 던졌다.
“수호자들은 연못을 수호하겠다고 명약을 건 자들입니다! 소원을 빌 수도 없을뿐더러 연못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머물죠!”
치킨맨의 말대로라면 이들 역시 용의자가 아니다.
이미 죽은 것도 있지만 소원도 못 빌고 마을에 오지도 않으니까.
수호자들은 전원이 얼굴에 붉은 문신을 했다.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것.
마을에서 수호자를 봤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으니 확실하겠지.
종합해 보면…….
“여러분들과 대양이라는 사람.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는 거군요. 고행, 대양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연못의 위치를 발설한 자는 큰 벌을 받는다오. 대양은 입이 무겁소.”
“그게 아니더라도 연못을 발견한 자는 자신이 봤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아요. 대표에게만 살짝 말하죠.”
하월이 옆으로 다가왔다.
“괜히 말하고 다녔다가 욕심 많은 자에게 시달릴 수도 있거든요. 본인은 벌을 받고 몰래 연못을 찾아간 이들은 수호자에게 죽겠죠.”
“맞아. 수호자들은 연못에 침입한 적을 죽여도 벌을 안 받아.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받지.”
“이들 역시 뛰어난 전사이건만…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케이.
결론을 내자면 이거구만.
“범인은 대양을 포함해 여기 모인 대표 중에 있겠군요. 대양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연못을 발견한 사람이 있지 않다면 말이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등반가가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타이가가 으르렁거렸지만 그 누구도 동조하지 않았다.
내가 한 말이 맞다는 걸 다들 안다는 거다.
“아니, 치킨맨! 서량! 화도 안 나? 저 건방진 인간이 우리 중에 범인이 있다잖아!”
“하지만 타이가, 이블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차라리 잘됐죠. 용의자가 줄었잖아요!”
“흐흐, 우리 중에 범인이라… 오싹오싹한걸. 너무 좋아.”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옵니까, 서량.”
“뭐 어때, 그레이. 다들 익숙한 상황 아니야? 수인들 끼리 죽이는 거 말이야.”
서량의 말에 그레이가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상황이라, 광란의 밤을 말하는 거다.
이미 이들은 그때의 광기를 엿보고 있다. 사건이 더 커진다면 그때처럼 되리라는 걸 깨달은 거지.
“다들 왜 그래? 이미 본모습 다 본 사이끼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서량의 말에 그레이가 코를 찡그렸다.
광란의 밤. 대표들도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겠지.
리아나가 말했었다. 모두에게 죄가 있고 가슴 속 깊은 곳에는 광기가 도사린다고.
사냥 본능. 힘의 역전.
혼란은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힐끗, 서량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과 달리 광란의 밤에 대해 말하는 걸 꺼리지 않는다. 성향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그쪽에 관심도 많은 거 같고.
따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그건 나중에 하도록 하고.
“면담을 하죠. 대양을 포함해서요. 대양보다 먼저 연못을 발견한 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범위가 너무 늘어나니 우선은 여러분과 대양, 9명을 대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왜 인간인 네가 조사를 주도하는 거지?”
“유일하게 용의선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이니까요. 이제 막 64층대에 오른 사람이 NPC 18명을 상대하고 재앙을 이용했을 거라 생각하는 멍청이 있으면 손 들어 주세요.”
“끄으응.”
타이가의 불만을 빠르게 잠재웠다.
두두두두.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하월의 부름을 받은 이들이 몰려온 모양. 하늘을 바라보니 나뭇잎으로 만든 새가 방향을 인도하고 있었다.
“회의실로 가서 대기하죠. 한 명씩 면담하겠습니다. 시신부터 수습해 주시고요. 저는 따로 조사 좀 하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러죠. 믿을 만한 전사들도 불렀으니 연못은 통제할 수 있을 거예요.”
뭐가 됐든 이들은 대표. 동족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이들. 8개의 부족에서 온 전사들이 무장을 한 채 연못을 감싼다.
사람이 나뉘어 시신을 수습했고, 대표들은 전사들과 대림원으로 돌아갔다.
난 연못으로 향했다.
“이방인은 연못을 사용할 수… 컥!”
너구리 수인이 날 막으려 했으나 빠르게 달려온 누군가가 그의 뒤통수를 때렸다.
“방해꾼은 너굴맨이 처리했으니 걱정 말라구.”
“아, 고마워요.”
하월이 따로 말해 둔 모양.
너굴맨이 엄지를 세우더니 동료를 질질 끌고 사라졌다.
그럼 조사를 마저 해 볼까.
퀘스트 재료도 얻고 말이야.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말이지.
보물 주머니에서 병을 꺼냈다.
혹시 몰라 3개를 꺼내 연못물을 떴다.
[소원 들어주는 연못의 물]
-재앙의 힘이 깃들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물.
물 자체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거 같다.
릴카가 이걸 왜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져다줘야지.
퀘스트창을 확인한 이후 권능을 발휘했다.
-츠즈즈즛
미약한 빛무리가 번지더니 연못에 대한 정보가 떠오른다.
[소원 들어주는 연못]
-재앙.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기회는 찾아올 때 잡아야 하는 법.
-소원 들어주는 연못이 기회인지는 스스로 판단하세요!
별 영양가 없는 설명.
내가 원하는 건 다른 거다.
“소원을 빈 사람이 누구냐.”
눈에 힘을 더하며 정보를 읽어내려 했으나 힘만 들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역시 안 되나. 하긴 내 권능은 사이코메트리가 아니니까.
권능으로 좀 쉽게 가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아쉬운 마음에 연못 주변을 둘렀다.
혹시나 범인이 남긴 흔적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발자국. 핏자국. 무기의 파편 등등. 눈에 밟히는 거라면 뭐든 살폈고.
-스으으
그런 내게 나뭇잎 하나가 떨어졌다.
그냥 지나쳤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어째서인지 시선이 갔다.
허리를 굽혀 나뭇잎을 집었다. 겉은 평범했으나.
‘뒷면에 글씨가?’
나뭇잎을 뒤집자 글씨가 나타났다.
-단서를 찾았어. 이곳으로 와. 모르토가.
씨익, 입꼬리가 올라간다.
모르토 이 녀석, 그동안 놀기만 한 건 아니구나.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와 단서를 찾아낸 게 분명하다.
나뭇잎의 글씨가 사라지더니 약도가 생겨났다.
이곳에 모르토가 숨어 있는 거겠지.
아직 밤이 되려면 시간이 남았다. 대표들도 회의실로 모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
모르토를 먼저 만나 보자.
난 발걸음을 옮겼다.
* * *
노을이 진다.
대표 회의실은 높은 곳에 위치한 만큼 노을이 지는 모습이 잘 보였다.
산을 타 넘으며 노란빛을 뿜는 태양.
미묘하게 따스한 햇볕이 회의실로 들어오고, 길게 이어진 그림자가 뱀처럼 구불거린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건 고양이 수인 서량.
그늘진 곳에 앉아 있는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다른 대표들은 이미 면담이 끝나 마을로 돌아간 상황.
공통적으로 최근 사흘 동안의 동선을 확인했다. 개인적인 의견이나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한 조언도 듣고.
“더 물어볼 거 있어?”
테이블에 엎드린 서량의 말에 걸터앉았던 창가에서 일어섰다.
그녀 앞에 있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서량은 광란의 밤에 대해 잘 알죠?”
“좀 알지. 다들 쉬쉬하지만 난 그런 거일수록 제대로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부정하지 않는다.
나도 그래서 그녀를 맨 마지막에 놔둔 거고.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
“광란의 밤은 소원 들어주는 연못과 관련이 있나요?”
“아, 그치. 그날 밤 모두가 미쳤었거든. 서열 정리.”
서량이 손가락을 들었다.
서열이라.
“수인족은 각각 바탕이 되는 동물이 있지. 자연계 법치 그대로를 따르자는 거였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지. 호인족과 견인족이 싸우고, 조인족이 참전하고. 묘인족은 웅인족을 습격. 늑대들은 토인족을, 너구리는 모든 전장에서 보였던 거 같은데.”
“여우는 어디 있었죠.”
여우라는 단어에 서량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릴카를 만났군.”
“예.”
계승자이기도 하다.
“맞아. 수인족은 원래 12개의 부족이었지. 광란의 밤 때 3개의 부족이 전멸. 여우는 그때까지도 살아 있었지. 꽤 세력이 컸거든.”
“지금은 없지만요.”
“광란의 밤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아?”
난 고개를 저었다.
정작 어떤 식으로 끝났는지는 듣지 못했다.
“여우 부족 대표가 소원을 빌었어. 광란의 밤은 서열 정리인 동시에 연못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기도 했다는 걸 알아 둬. 당시에는 여우 부족이 연못을 차지하고 있었지.”
몸을 내게 기울인 서량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우 부족 대표가 전쟁의 종료를 빈 그 순간, 차원 균열이 그녀의 딸을 집어삼켰지. 딸과의 완전한 이별, 그게 대가였거든.”
그게 릴카고 말이지.
전쟁 종료의 희생자.
“정확히는 그것만 대가가 아니었을 거야. 대업을 가로막았다며 나머지 부족이 몰려들어 여우 부족을 전멸시켰거든. 이후에 정신을 차리고 평화 협정을 맺은 거고, 병신들이지.”
비아냥거리는 말투. 그건 스스로에 대한 자조이기도 했다.
그녀가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9개의 의자.
“회의실에 여우 부족의 자리를 놔둔 건 양심의 가책 때문이야. 정작 원인이 되었던 연못은 알뜰살뜰 잘 쓰고 있지만 말이야.”
“서량은 연못을 좋아하지 않는군요.”
“싫어해.”
난 그녀를 응시했다.
“광란의 밤을 일으킨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죠. 서량은 누가 그랬을 거 같아요?”
“으으으으음, 잘 모르겠는데?”
서량이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을 비빈다. 분명 마음속에는 누가 있다는 제스처.
그녀는 한 부족의 대표.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말을 아끼는 거겠지.
-스윽
모르토에게 받은 물건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이의 이름을 적은 쪽지도 함께.
“난 이 사람 같은데요?”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간다. 두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인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증거가 없을 뿐. 그런데 이게 이번 사건이랑 무슨 상관이지?”
“광란의 밤을 일으킨 사람과 이번 사건의 범인이랑 같은 사람이거든요.”
“뭐!”
“더불어 이 사람이 이번에 빈 소원이 뭔지도 대충 짐작이 갑니다.”
난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갈고리처럼 만들었다.
그 상태로 목 뒤를 긁는 시늉을 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하던 서량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설마.”
“예. 베히가와 겔릭은 살해당한 게 아닙니다.”
스스로 목 뒤를 그은 거지.
그러면 모든 게 이해된다.
미묘하게 사이즈가 달랐던 상처? 그야 둘의 손가락 사이즈가 다르니까.
모르토가 목을 공격한 대상을 보지 못한 이유? 공격한 사람이 없으니까. 설마 대련 중 갑자기 그런 짓을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베히가만 출혈이 심했던 것 역시 그와 겔릭이 가진 스킬이 달랐기 때문이다.
조사하면서 파악됐다. 베히가는 출혈 스킬이 있었다.
범인은 그들이 살해당한 것처럼 꾸몄을 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끝을 볼 때가 됐다.
“갑시다, 범인 잡으러.”
이미 모르토가 움직이고 있었다. 하월을 시작으로 다른 대표들을 움직이기 위해.